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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해 Nov 17. 2016

이 미친 세상에서

이 시국의 수능을 앞두고, 브로콜리 너마저 <졸업>


그 어떤 신비로운 가능성도 
희망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청년들은 
쫓기듯 어학연수를 떠나고

꿈에서 아직 덜 깬 아이들은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날 듯 
짝짓기에 몰두했지

난 어느 곳에도 없는 나의 자리를 찾으려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고
우리들은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작별의 인사들을 나누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넌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널 잊지 않을게


낯설은 풍경들이 지나치는 
오후의 버스에서 깨어 
방황하는 아이 같은 우리
어디쯤 가야만 하는지 벌써 지나친 건 아닌지 
모두 말하지만 알 수가 없네

난 어느 곳에도 없는 나의 자리를 찾으려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고
우리들은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작별의 인사들을 나누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넌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널 잊지 않을게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을 믿지 않을게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세상을 믿지 않을게


-브로콜리 너마저, <졸업>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은 학생이 대학에서 ‘학문을 닦을 수 있는’ 능력을 보는 시험이다. 이 시험은 너무도 중요하여, 당일날에는 모든 소음이 그 시험의 눈치를 보고, 모든 공권력이 수험생을 위해 복무한다. 대부분의 경우 초중고교 12+@년의 결실은 이 시험 하나로 결정되고, 60만 개의 데이터가 가지런히 정렬된다. 숫자로 환원되는 성적에 따라 학생들은 차곡차곡 대학/학과별로 분류된다. 높은 성적은 순위가 높은 ‘좋은’ 대학을 보장하고, 좋은 대학은 좋은, 혹은 덜 나쁜 미래를 약속한다. 대학 입시는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신분상승욕구의 장이고, 수능은 사람을 거르는 여러 겹짜리 고운 체다. 거의 모든 학생은 한 번쯤은 이 체를 최대한 많이 통과하기 위해 스스로를 기꺼이 깎아낸다. 수능은 국가적으로 운영되는 커다란 순응의 체계이다.


    쏟아내듯 수능을 마치고 나면 상대적으로 별 중요하지 않은 마지막 고사가 있고, 그리고 졸업이 있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졸업>은 오늘날 헬조선을 살아가는 대학생 청년들의 졸업에 바치는 노래이지만, 사실상 그 가사말은 청소년에게도 해당된다. ‘그 어떤 신비로운 가능성도 희망도’ 그 다채롭고 촘촘한 주름을 접힌 채 ‘대학’이라는 기표 속에 우겨넣어진다. 여기서 ‘공부’하지 않고 방황하다가는 쫓기듯 더러는 군대로, 더러는 최저시급 알바로 떠나게 된다. 어느 대학 어느 학과 몇 학번의 ‘나의 자리’가 없으면, 몇 백만원을 내면서 ‘팔려가는’ 서로들에게 ‘서글픈 작별의 인사’를 나눌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원하는, 혹은 원한다고 믿었던 대학이 정말 그간의 자기통제와 순응과 자발적/수동적 억압을 보상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아니, 사실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팔려오기 위해 냈으며 앞으로도 꼬박꼬박 내야 할 돈은 무겁기만 하고, 책상과 의자가 불편하게 합쳐져 불편하게 앉아 듣는 강의가 정말 그 돈의 값어치를 하는지 매번 미심쩍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는 청춘을 전진밖에 되지 않는 고장난 탱크에 빗댄다. 누구나 그런 모습으로 내일의 문 앞에 서 있고, 곧 돼지 발정제를 먹은지 5분이 지나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새 ‘낯설은 풍경’ 속 ‘오후의 버스’에서 졸다 깨어난다. 그러면 이제야말로 <졸업>의 가사처럼 되는 것이다. 적은 돈을 받으며 기꺼이 임시로서 일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팔려가기에 몰두한다. 기꺼이 수능에 순응하기 위해 공부했듯, 세상 속에 무사히 어느 회사 어느 부서 몇 기의 ‘나의 자리’로 편입되기 위하여.


    사실 어렴풋이 알고는 있다. 이 일련의 과정이란, 벌어지는 설국열차 칸 사이를 놓치지 않게 아슬아슬 건너뛰는 것과 비슷하다. 오직 이 체계에서 저 체계로 가기 위해서, 해야 한다고 학습된 일들을 최대한 충성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최대한 덜 불행한 길이라고 견고히 들으며 자라왔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누군가의 자식은 오직 그를 위해 모든 체계가 움직인다. 마음껏 결석을 해도 참작이 되고, 점수가 낮으니 더 높은 점수의 학생이 대신 낙제점을 받는다. 학점이 낮게 나오려 하자 교수가 바뀌고, 달그락 딱 써낸 글로 학점을 보장받는다. 급기야는 그를 위해 재단이 만들어지고, 혼자 나간 대회에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금메달을 거머쥔다. 반면 누군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는 이유 때문에 바닷속으로 가라앉았고, 누군가는 대학은커녕 생계를 위해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처럼 일하다가 지하철에 휘말려버렸다. 그래도 공정하다 믿으며 열심히 복무한 이 체제는, 사실 드라마 하나, 친한 사람 몇 명을 중심으로 하여 가장 사사로이 움직인다는 것이 드러나 모든 개인, 모든 우주를 배반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체제의 거대하고 견고한 벽에는 융털처럼 세세한 억압이 돋아나 있고, 우리의 눈앞에서 그것들은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버그가 없으면 오히려 불안해하는 프로그래머처럼, 너무 평온하고 여유로우면 오히려 불안해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었다. 어떻게 하겠는가. 당장 내일은 내일의 과제 제출, 발표, 퀴즈가 기다리고 있는데. 정말이지 어떻게 하겠는가. 10년이 넘게 달려왔고, 그래서 당장 자고 일어나면 수능인데. 시험 하나를 위해 식단, 수면주기 등 스스로를 맞추어 가며 규율권력 속에 최대한 복종하는 신체를 갈고 닦았는데. 꼭 이제까지 살아온 생의 성적표처럼, 여느때와 같아야 할 그 하루가 더없이 무겁게 닥쳐올 텐데 말이다. 결국 우리는 다 알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놓을 수 없어 살아간다. 우리는 그저 착실히 분열증을 배울 뿐이다.


    또 누가, 언제, 얼마나 자책하고 절망하고, 기어이 목숨을 끊을지 모르겠다.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다. ‘이 미친 세상’이 잘못된 것이다. 당신의 숫자가, 재현된 등수가 당신의 모든 존재를 대신하지 않는다. 그냥, 잘 달려왔고, 수고했으니, 어떻든간에 행복했으면 좋겠다. 행복이 개소리가 되어버린 개소리같은 이 세계에서, 그래도, 그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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