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몰: 깊은 마음속으로, 가라앉고 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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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버린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지만, 남겨진 이의 마음은 언제나 같았다. 끝없는 ‘만약’의 연속.
제인이 떠날 때는, ‘만약 조금만 더 일찍 그녀의 진심을 들여다봤다면, 만약에 자신이 먼저 한 걸음 다가가 그녀를 안아줬다면, 만약에 조금 더 빨리 그녀의 사랑을 알았다면….’ 그런 돌아오지 않는 순간들의 연속을 떠올리다 보면 재희의 마음은 가라앉고 떠오르지 못할 듯 무거워졌다.
그 어두운 마음의 한 곳에서 어떻게든 버티려고 뭔지도 모르는 자신의 감정들을 붙잡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를 일들을 해냈다. 작업을 하고, 일을 하고, 사업과 관련한 사람들을 만나고, 상담을 하고, 다시 작업을 하고.
마리아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만약’의 연속, 그 시간을 견디는 것이 힘들었고 떨치려고 할수록 혼자 더 깊고 깊은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온 집안의 문을 열어두고 바람을 통하게 하고, 정원을 다듬고, 상담을 하고, 다시 작업을 하고, 전시회를 준비하고…, 그렇게 재희가 어떻게든 울지 않고 버티려 애썼던 모든 시간들이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 원우야.”
지금 재희가 마주한 감정, 이 슬픔은 떠나버린 사람에 대한 ‘만약’의 연속이 아니었다. 지극히 현실의 ‘지금’이었다.
두 그루의 나무 앞에서 원우는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멍하게, 이리저리 살짝 고개를 돌려가며 이쪽저쪽을 바라보는 그 모습이 이상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리고 작게 ‘우리 집 방향이 어느 쪽 이더라.’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재희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허공을 향해 고정된 시선이 저를 향하지 않길 바라며 원우에게서 조금 더 멀리 떨어지도록 걸음을 옮겼다.
과연 떠나버린 사람은 남겨진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그들의 실체는 어디에도 없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닌 기억의 연속에 남겨진 사람들은 한참을 버둥거려야 하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아니, 언제까지 그럴지도 모르는데.
“고마워.”
“그런 말 하지 마. 지금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응.”
곁을 끝까지 지켜 줬던 멤버들이 한 명씩 안아주며 인사를 하고, 매니저와 두런두런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그의 감정과는 전혀 상관없이 눈부신 햇살 아래에 있어 단정한 셔츠와 양복을 입은 원우의 모습은 비현실적인 그림을 보는 기분이었다. 마음을 정리할 시간, 스스로를 추스를 시간. 그런 것들은 정량화되어 있지 않는데, 과연 얼마의 시간을 얻은 것일까. 알 수 없는 그 얼마간의 휴식기가 주어지고 돌아서던 원우는 아직도 주변인처럼 한참 멀리서 서성거리던 재희를 향해 섰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 거리에서 두 사람은 한참을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 한걸음 두 걸음, 거리를 좁히며 차가워진 손을 주머니에 꽂은 원우는 하얀 입김을 뱉으며 천천히 그리고 작게 말했다.
“…, 집에 가자.”
“…….”
“이제 우리 집에…, 가자.”
여전히 안경을 쓴 채 운전을 하는 원우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무겁지 않은 대문이 열리고, 한 걸음씩 집안으로 발을 들였다. 힘들었던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으니 누군가가 반겨주며 문을 열어주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의 집.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집은 금방이라도 혜숙의 웃음이 들릴 것 같아서 재희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며칠 동안 사람이 없었던 집안은 썰렁할 법도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마 금방 다녀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길을 나설 때, 함께 돌아온 누군가가 추위를 느끼지 않도록 혜숙이 배려한 덕분일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다정한 습관, 누군가를 향하는지 모를 중얼거림 같은 그 말이 원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2층으로 터벅터벅 올라가는 원우의 어깨가 너무 무거워 보여서 재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1층 혜숙의 공방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1층의 공방 문은 닫혀 있었다. 언제나 그 문을 열면 통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원목의 테이블을 앞에 두고 바느질을 하던 혜숙의 모습이 있었다. 손잡이를 잡고 돌리는 짧은 순간, 재희는 혹시라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구름에 햇살이 가려진 그늘진 공간과 아무것도 없는 휑한 테이블뿐이었다.
“저 왔어요.”
재희도 작게 중얼거렸다. 주인을 닮은 공간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손길을 받은 티를 내면서 있는 모든 소품들이, 혜숙의 웃음과 다정한 말 같아서 재희는 순간 울음이 나오려 했다. 아니다. 자신은 울면 안 된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문을 닫으려다가 문득 무언가가 눈에 들어와 행동을 멈추었다. 눈에 들어온 그것에서 신경을 돌리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시 확인한 그 자리에 누군가의 외투가 걸려 있었다.
“아….”
외마디처럼 터져 나온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서 재희는 자신의 입을 천천히 막았다. 봉제된 하프 마네킹 그 위에 예쁘게 걸려 있는 외투는 자신의 것이었다. 혜숙이 한 땀씩 만들어내던 시간은 재희를 기다리고 있었던 증거였다. 다가가서 만져본 외투는 겨울을 지내는 동안 재희를 감싸줄 혜숙의 다정함이었다. 따뜻하고 밝은 봄의 햇살을 닮은 색은 외투를 입을 때 기뻐할 누군가를 그리며 고르고 골랐을 것이다.
…, 그랬을 것이다. 분명히 그러했을 것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소매 끝과 옷깃은 완성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제 누구도 그 다정함을 완성할 수 없었다. 이제 다시는 그 다정함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드디어 실감했다.
이제 어디에도 마음속의 ‘어린 재희’를 감싸 줄 ‘다정한 어른’은 없다.
원목 테이블에 손을 얹고 겨우 버티고 있던 재희는 결국 그 자리에 주저 않은 채, 몸을 웅크리고 울음을 삼켜야 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울어버리면 이제 세상에 돌아오지 않을 다정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끝까지 터져 나오려던 울음은 아직 제 것이 아니라고 다독이며 재희는 제 가슴을 두드리고 또 두드리며 한참을 그대로 멈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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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으로 올라간 원우는 드디어 안경을 벗고 죽은 듯이 잤다.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나도 인기척이 없어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을 때, 침대 위에 누워있는 그 모습이 뭔가 아슬아슬해 보여서 한참을 소리 없이 들여다보다가 나왔다.
주방으로 들어선 재희는 갑자기 허기짐을 느껴 냉장고를 열었다. 그리고 원우가 말했던 것들을 보았다. 잡채 재료와 그밖에도 재희가 있었던 동안 잘 먹었던 반찬과 곧 4명의 식구로 늘어날 그날을 기다렸던 흔적들을 발견했다. 가지런하게 정리된 재료들을 하나씩 보다가 재희는 천천히 문을 닫았다.
같이 지내는 동안 혜숙의 어깨너머로 몇 가지를 배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손을 천천히 씻었다. 재워둔 불고기거리가 며칠 사이에 상한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몇 가지의 야채를 꺼냈다. 하나씩 손질을 했다. 손은 느렸고, 익숙하지 않은 일은 재희를 더 느리고 더디게 만들었지만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서툴지만 하나씩 모든 과정을 거치고 나니 시간은 어느새 9시를 향해 갈 때쯤.
밥솥 안의 밥이 익어가는 소리와 무언가가 지글거리는 소리 등이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도록 만들어 재희는 편안함을 느꼈다.
“원우야, 밥 먹자.”
아직도 잠에 빠져있는 원우를 깨우려고 올라갔다. 잠에 취해 겨우 눈을 뜬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재희는 애써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원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밥, 밥 먹고 자.’라고 말하며. 몽롱한 얼굴로 1층까지 내려온 그의 눈이 식탁 위를 가득하게 채운 음식들을 쳐다보다가 재희를 바라보았다.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빨리 앉으라고 말하는 혜숙을 방금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앉아.”
“네가 한 거야?”
“이것만. 불고기는 혜숙 씨가 만들어 둔 거.”
“…….”
“먹자.”
“…….”
“응? 원우야….”
몇 달 만에 돌아올 아들과 그가 좋아하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기를 바라는 두 사람이 돌아올 날과 함께 이 식탁에 앉아 식사를 나눌 그 시간을 기다리던 혜숙은…, 이제 없다.
마당 쪽에 야외 데크 위에 가득 쌓아둔 장작들은 현우의 취미였다. 예전에도 혜숙과 현우, 재희 셋이서 마당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담요를 두르고는 따뜻한 차를 한 잔씩 했었다. 나이가 드니 멀리 가는 것도 큰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캠핑 기분을 집에서 낼 수 있으니 얼마나 좋냐고. 원우가 오면 이번에는 넷이서 함께 하자는 이야기를 했었다. 맞다, 마지막 통화에서 장작도 많이 준비해 뒀다고 현우가 말했는데, 당신 그거 하다가 허리 삔 것도 애들한테 이야기하라고 혜숙이 옆에서 웃으며 말했던 것도 떠올랐다.
“먹자, 원우야….”
“…….”
이제 ‘네 명’이 할 수 없는 일. 절대로, 이 식탁을 둘러싼 네 개의 의자는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먹어, 응? 일단은 먹고…, 다시 자던지 해.”
“알았어. 먹을게.”
“응….”
“먹을 테니까….”
“…….”
“너…, 그만 울어.”
꾹꾹 눌러 담은 밥공기를 바라보던 원우는 앞에 앉은 재희의 턱에서 툭 하고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보다가 손을 뻗어 닦아주었다. 고개를 숙인 채 꾸역꾸역 밥을 입안으로 넣고 있는 작은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재희는 전혀 몰랐는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제대로 눈이 마주치고, 두 사람은 잠시 그대로 숨도 멈춘 듯이 그렇게 있다가 다시 수저를 들었다.
마주한 얼굴은 수척함, 처연함, 눈물, 슬픔, 아쉬움……, 더는 가질 수 없는 것과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에 대한 미련까지. 엉망진창이 되어 두 사람의 시선을 빼앗았다. 하지만 서로 내색하지 않았다.
“…….”
“잘 먹을게.”
“…응.”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와 천천히 입을 움직이며 뭔가를 씹는 소리가 작게 들리고, 백색 소음 같은 바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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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그리고 이틀, 그리고 또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은 식사 시간이면 서로 마주 앉아 겨우 깨작거리는 식사를 하며 넘어가지 않는 밥을 삼켰다. 만들어두었던 혜숙의 정성과 다정함을 그렇게 겨우 씹어 넘기고, 그 빈자리를 버티고 견뎠다.
두 사람은 서로의 방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냈고, 가끔 재희는 혜숙과 함께 걸었던 산책로를 따라서 한참 걷다가 돌아오고는 했다. 이미 너무 추워진 날씨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완성하지 못한 외투 대신 예전에 혜숙이 만들어줬던 외투를 입고 그렇게 한참 걷다 보면 혼자가 아닌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해가 짧아져 가끔은 어둑한 하늘을 뒤로하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원우가 2층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다가 아무 말도 없이 다시 방으로 들어가고는 했다. 원우는 재희의 어떤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
재희는 아직도 장례식장에서 빛의 경계선을 넘어가 겨우 원우의 옆에 앉았던 그날과 같았다. 가깝게 다가가 안아줄 수도 없었고, 다정하게 위로하는 일 같은 건 꿈꿀 수 없었다.
다시…, 재희는 다시 예전의 어리고 서툰 소녀가 되어 겨우 그의 주변만 맴돌고 지키고 서 있는 것이 전부였다. ‘이렇게 원우의 옆에 있는 것이 옳은 일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지만 그 답은 자신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늦은 점심을 먹고 길어진 산책을 하고 돌아오자 거실에 원우가 있었다. 장례식 이후에 식사와 잠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던 원우가 다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현우가 챙겨두었던 장식장의 술병이 거실 테이블 위에 나와 있었고, 가득 차 있던 병은 이미 반쯤 비어져 있었다.
술잔을 들고 있는 원우의 모습이 낯설었다. 잔의 얼음은 이미 다 녹아 버렸고, 진한 호박색의 독한 술은 아직도 잔에 반 정도 남아 있었다. 낮의 시간이 지나 어둑한 거실의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에 술잔을 내려두고 한참 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마당 쪽을 바라보던 원우는 천천히 외투를 벗으며 들어서는 재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원우야.”
“…….”
“그만 마셔.”
“나…, 손 좀 잡아줘.”
재희가 옅은 한숨을 쉬며 하는 말에 원우는 멍한 얼굴로 무슨 말인가 생각하는 것 같더니 엉뚱한 대답을 했다. 함께 여러 날을 있었지만,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는 사실을 두 사람 모두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원우의 옆으로 다가선 재희의 손이 원우의 손을 잡았다. 이윽고 그 손을 천천히 제 쪽으로 당기며 원우가 다시 말했다.
“나 좀 안아줘.”
“원우야….”
이상한 기분에 재희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빤히 저를 올려다보는 원우의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그의 곁에 앉으며 최선을 다해서 그의 어깨를 당겨 안아주었다. 재희의 어깨에 원우의 고개가 닿았고, 길고 더운 숨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감싸 안은 넓은 어깨의 느낌과 달리 그 속에 어떤 영혼도 없는 것 같았다. 저보다 한참이나 넓은 어깨를 다 담아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재희는 등을 다독이며 그가 계속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재희야….”
“응.”
“우리….”
“…….”
“키스하자.”
고개를 재희의 어깨에서 떨어트리며 시선을 마주한 그의 눈동자에 아무것도 없었다. 무미건조한 그 단어의 조합에 재희는 의미를 몇 초 동안 생각했다. 그리고 저의 볼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잡아채 입술을 맞춰오는 원우의 행동에 그 생각이 멈췄다. 깊게 파고드는 입술과 상대방의 더운 숨이 재희는 견디기 힘들었지만, 한참이나 그대로 원우의 지금을 받아들였다.
뭐든, 어떤 것이든.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다 괜찮…, 괜찮지 않았다.
그의 손이 점점 자신의 어깨를 누르더니 등 뒤로 소파가 닿고, 어느새 원우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은 채 허리로 진득하게 달라붙는 그 손길이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 재희는 겨우 그의 손을 저지했다.
“원우…. 잠깐…, 만.”
“……”
“원우야. 우리 잠깐…..”
“왜.”
여전히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있던 원우가 겨우 재희와 시선을 마주했다. 허리를 지분거리던 손을 저지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그런 표정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어떤 말도 못 하고 있으니, 낮지만 메마른 원우의 목소리가 제 입술 바로 앞에서 웅얼거렸다.
“왜 안 되는데.”
“…….”
“왜 자꾸 안 된다고만 하는데.”
“…, 너 지금 취했어.”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그럼 내일은 괜찮아?”
“……”
“왜 안 되는데. 난 하고 싶어, 너랑.”
한 마디씩 할 때마다 더 가까이 다가와 간지러울 정도로 코끝이 닿았고, 입술 끝이 닿았다. 알코올 향이 섞인 달큼한 숨, 입술이 닿은 채 익숙하지 않은 그 문장을 떠들어대던 그의 숨이 다시 재희의 얇은 목덜미를 향하더니 천천히 과일을 베어 물듯이 한입 가득 머금었다. 아찔하고 생경한 기분에 재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 겨우 입술을 꾹 다물고 새어 나오려는 호흡을 멈추었다. 입술이 다시 멀어질 때, 재희는 원우의 등을 오히려 꽉 끌어안았다.
“나 너랑 자고 싶어.”
“아니야. 원우야, 넌 지금….”
“안 된다고 하지 마.”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다시 아무런 힘도 없는 그 포옹에서 풀려나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어둑한 조명에 그림자로 내려 잘 보이지 않았다.
“왜 자꾸 안 된다고 해.”
“아니잖아. 너 지금….”
“왜…, 왜 안 되는데. 왜…, 왜….”
“…….”
“난 이제 정말 너 밖에 없는데. 이제 넌 어떻게든 내 옆에 있어야 하는 거잖아.”
“…, 원우야.”
“그래야 하는 게…, 맞잖아.”
어둑한 조명, 그림자 아래로 어느새 비가 내렸다. 툭, 툭. 내리는 비를 재희는 맞고 있다가 다시 얇아진 것 같은 그의 등을 꽉 끌어안아주었다. 이번에는 아무 저항 없이 끌려와 재희의 품 안에 안긴다.
“왜…, 자꾸 안 된다고 하는데.”
“…….”
불안함이 슬픔으로, 슬픔이 다시 불안함으로 번지고 또다시 번져서 원우를 삼키고 있었다. 재희는 원우의 등을 끌어안으며 눈물을 삼키려고 하는 그의 몸짓을 읽었다. 그리고 그 몸짓은 결국 무너져내리는 그를 보여주었다. 재희는 다시 시작되는 그 거대한 불안한 슬픔에서 그를 꺼내려고 애썼다.
혜숙과 현우를 보내는 동안, 그리고 보내고 난 이후 보이는 원우의 첫 눈물이었다. 그 시간 동안 너무나 참고 참았던 울음은 깊고 깊어서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을 전하고 있었다. 깊은 그 바다에서 원우를 건져야만 했다. 언제나 저를 끌어올린 것이 원우였으니까. 재희는 있는 힘껏 그를 끌어안은 채 그대로 있었다.
“넌 내 옆에 있어야 하잖아. 그런데 너….”
“…….”
“지금 여기 있는 거 맞아?”
“…….”
“너…, 지금 여기 있는 거 확실해?”
떨리던 원우의 몸이 불안함에 재희의 어깨를 함께 끌어안으며 말했다.
“왜 자꾸만, 곧 떠날 사람 같은 얼굴로 그렇게 나를 보고 있어….”
“원우야….”
“왜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그런 표정으로…. 있는 건데.”
“아니야. 아니야, 원우야.”
“내 옆에 있어줘, 제발. 이제는 정말….”
“…….”
“난 이제 정말….”
…, 너 밖에 없는 내가 되어 버렸으니까.
결국 울음처럼 터진 원우의 그 마지막 말에 재희도 함께 빗물이 되어 버렸다.
듣지 말았어야 할 말이었지만, 이미 알고 있는 말이었다. 자신에게는 예전부터 그랬던, 그 불안함이 너무 싫었는데 이제 원우가 그 불안함을 안고 평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재희는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천천히 흐르는 누군가의 눈물에 입술을 맞추고 결국 서로를 찾았다. 흐르는 슬픔의 빗물에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서로를 꼭 끌어안은, 너무나 위태로운 두 사람이었다. 깊은 바다로 함께 떠내려가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추락하게 된다면 자신이 함께 해 주겠다고 했던 원우의 말처럼, 이 깊은 슬픔 속으로 네가 빠져야 한다면 나도 기꺼이… 기꺼이 그러겠노라…, 재희는 원우와 입술을 천천히 맞댄 채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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