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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dcat혜진 Jul 23. 2022

세계와 세계, 그 끝에서 끝까지

| 낙화: 떨어져 내리는 모든 것들 사이에, 너…

-




원우의 침대, 그 옆에 협탁에는 장례식 내내 쓰고 있던 원우의 안경이 있었다. 그건 현우의 서재에 있는 안경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예전에 현우가 쓰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자 자신의 생일에 선물로 준 것이라 했었다. 착용이 오히려 불편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스케줄을 마치고 편한 시간이 되면 책을 읽거나 가볍게 어딘가로 이동할 때 착용하면 마음이 편해지는 일종의 애착 템 같은 것이었다.


어렵게 견디는 모든 시간들을 막아주는 방패처럼 사용된 그 안경을 쓰고 원우는 두 사람을 보내는 시간을 버텼다.


언제나 함께할 ‘우리’를 위해 만들어둔 현우와 혜숙의 공간은 이제 주인이 없었다. 자신의 방 침대에서 나지막하게 경사진 천장을 한참 보다가 아래층에서 자신을 부르는 혜숙의 목소리도, 현우의 두런거리는 나지막한 말소리도 없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떠올려야 했다.


그 사실이 순간 무서워서 복도로 나가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면 재희가 인형처럼 소파에 앉아있거나, 산책을 나가는 뒷모습 혹은 조심스럽게 현관문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럼 또 안심하고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밥을 먹을 때도, 그리고 어둑한 침묵의 시간이 와도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무언가를 조심할 뿐이었다.


그런 무미건조한 시간이 쌓이고 쌓이자 원우는 문득 이 순간도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가장 쉬운 도피를 위해 알코올의 힘을 빌렸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안함은 깊게 가라앉혀 두었던 짙은 슬픔을 꺼내버렸고, 이성은 저 밑바닥으로 추락해서 눈앞에 있는 재희가 허상인 듯 상처를 주고 아프게 만들었다.




“왜 자꾸만, 곧 떠날 사람 같은 얼굴로 그렇게 나를 보고 있어….”

“원우야….”

“왜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그런 표정으로…. 있는 건데.”

“아니야. 아니야, 원우야.”

“내 옆에 있어줘, 제발. 이제는 정말….”

“…….”

“난 이제 정말….”



 

…, 너 밖에 없는 내가 되어 버렸으니까.


마지막 말을 입 밖으로 뱉고 보니, 정말 이 세상에 자신만 남겨진 것 같았다. 두 팔로 안고 있는 사람이 저에게 남겨진 하나뿐인 뭔가인 것 같아서, 원우는 그것을 두 팔로 온전히 안고 취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불어나는 슬픔에 떠밀려 겨우 버티며 재희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던 깊은 슬픔은 원우와 재희를 삼키고 나서야 그쳤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서로를 한참 동안 끌어안고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울음은 멈추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겨우 울음이 그친 후 서로의 퉁퉁부은 얼굴을 쓰다듬다가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누군가의 두 손이 2층으로 이끌었다.




“가지 마….”

“응. 안 가.”




취기가 올라 비틀거리는 자신의 걸음과 낮게 잠긴 목소리에도 재희는 손을 꼭 붙잡아 주었다. 이대로 가버릴까 봐, 눈을 감았다가 뜨면 정말 허상이 되어버릴 것 같은 걱정에 원우는 자꾸만 재희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침대 위에 누워 잠시 감았던 눈을 뜨자 제 옆에 꼭 붙어 저를 보고 있는 재희가 있었다. ‘원우야, 괜찮아. 얼른 자.’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깍지 낀 손끝에서 울렸다. 얇은 재희의 입술 끝이 자신의 손가락 끝에 닿아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고, 그 간지러운 기분이 안정적인 숨소리로 변했다. 이상하게 편안한 느낌에 잠시 숨을 고르며 잠이 들었고, 꿈을 꿨다.




‘네 인생이 그렇게 행복하지는 않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현실에서 불행을 끌어들이는 건 결국 너 자신이야.’




거울 속의 자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답답한 표정의 자신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저곳으로 그녀를 보내면 괜찮아 질지도 몰라. 하지만, 넌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야. 그렇지? 그래야 해.’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에는 검은 구덩이가 있었다. 무엇이든 흡수할 것 같은 무한의 어둠, 블랙홀 같았지만, 그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여전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서 고개를 돌리니,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한 그가 서 있었다. 거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멍한 자신의 어깨를 잡으며 또 다른 자신은 계속해서 저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이상하게도 그 이후에는 무음 모드가 된 것처럼 중간의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답답한 표정을 짓던 또 다른 자신은 결국 큰 소리로 자신에게 뭐라고 했다.




‘네 마음을 따라가!’




사랑, 미움, 슬픔, 고통, 아픔, 불행, 행복, 기쁨, 우울, 불안, 설렘, 긴장, 질투, 욕망, 사유……. 깊은 생각이 계속되면 함정에 빠질 수 있으니 그러지 말아야 한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 재희에게…. 그러지 말아야 한다. 나에게도 그러지 말아야….




“괜찮아.”

“…….”

“좀 더 자.”




갑자기 잠이 깼다. 번뜩 뜬 눈으로 앞을 보자 낮은 천장, 고개를 살짝 돌리니 제 옆에서 저를 보고 있는 재희가 있었다. 갑작스럽게 눈을 뜬 저를 향해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여전히 잠겨 있었다. 무슨 꿈인지 도무지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눈을 뜬 후 바로 앞에 있는 재희를 꼭 안아줘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원우야.”




아직 새벽인지 해는 뜨지 않았다. 겨울의 긴 새벽 동안 제 곁을 지킨 재희의 어깨를 끌어안아 주려고 하자 지난 저녁의 일 때문인지 갑작스러운 행동에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미안해.”

“…응.”




많은 감정을 담은 그 세 마디에 경직되었던 재희의 어깨가 조금 풀리더니 얇은 손이 원우의 등을 감싸며 토닥여주었다. 얕게 다독거리는 그 손길에 원우는 다시 한번 ‘미안, 정말 미안해.’라고 말했고 이번에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따뜻한 품이 더 자신을 끌어안아주었다. 저보다 훨씬 작은 체구가 자신의 넓은 어깨를 감싸고도 남을 정도로 넘실거리는 따스한 감정으로 한참이나 토닥거림은 이어졌다.




“예전에….”

“응.”

“노을 보러 호수 공원에 가자고 했던 거 기억나?”

“어, 그랬지.”




햇살이 내리던 어느 초겨울에 함께 점심을 먹고 소파에 기대서 산책을 이야기하던 때가 있었다. 재희와 함께 있는 일상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던 그 겨울에 입을 맞추고 또 잠깐의 이별을 했었다. 결국에는 다시 돌아온 재희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고, 다시 용기를 냈었다. 사실 용기를 낼 필요도 없었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과 같았다. 자신의 인생에서 이제 재희는, 아니, 처음부터 재희는….




“그때 못 봤으니까, 대신 오늘 해 뜨는 거 같이 보자.”

“그래.”

“오늘은 추워도 가야 해.”

“응.”

“이제 게으른 고양이 아니야?”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다녀오면 게으른 고양이처럼 있을 거야. 이렇게 딱 붙어서.”

“그건 고양이 아닌 것 같은데.”

“몰라. 그럼 고양이 말고, 원우 할래.”




말도 안 되는 대답이었지만 재희는 알겠다는 뜻으로 작게 웃었다.


왜 당연한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세상에 이유를 따지지 않는 ‘지극히 당연한 일’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조금 전 자신의 꿈에 뭔가가 나타났던 것 같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꿈이었지만, 재희가 ‘지극히 당연한 자신의 누군가’인 것은 변함없었다.





-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아직 깨어나지 않은 시간 같았다. 잠겨있는 하늘의 어둠과 얼어있는 땅의 감각들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한 걸음씩 올라가는 길은 제법 다져져 있어서 수월한 편이었다. 작은 봉우리 하나 올라가는 것도 이만큼이나 시간이 걸리는 일인데, 앞으로의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봉우리 넘고 또 얼마나 많은 길을 더 걸어야 할지 문득 막막해지는 기분에 하얀 입김을 쏟아내던 원우는 걸음을 멈추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해?”

“조금만 더.”

“너 아까 전에도 똑같은 말 했어.”

“게으른 고양이 아니라며.”

“게으른 건 아니고, 산행이 싫은 거야.”

“해뜨기 전에 올라가야지.”

“그냥 바다로 갔으면….”

“운이 좋으면 바다도 보일 거야.”




혜숙과 함께 다니던 산책로를 따라서 집과 가장 가까운 산으로 오르는 길이었다. 자꾸만 한 걸음씩 뒤쳐지는 원우의 손을 붙잡아주자 그제야 얼굴이 풀린다. 볼을 다정하게 다독이며 ‘이런, 이런. 정말 체력이 약한 고양이네요.’라고 웃으며 말하자, 원래 이 정도로 지칠 체력은 아닌데 며칠 동안 너무 쉬었던 것 같다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원우의 손을 다시 꼭 붙잡아 주자, 이번에는 자신이 한 걸음 앞장선다. 위험한 길은 아니었지만, 아직은 새벽의 어둑한 길이라 조심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여기야?”

“응.”

“저기 멀리 보이는 거 바다야?”

“응.”




현우와 처음으로 와서 제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 곳이었다. 나중에는 현우와 혜숙, 셋이서도 같이 왔었다. 맑은 날에 가벼운 산행을 하고 이곳의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는 했다. 새벽이라 아직 카페는 열지 않았지만, 이른 아침의 산행객을 위해 해가 뜰 때쯤 열릴 테니 기다리기로 했다. 오늘은 다른 산행객은 보이지 않았다. 조용한 새벽의 시간이 아침으로 향하는 동안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드러날 해만 기다리고 있었다.




“산이 섬처럼 보인다.”

“응. 현우 씨도 그런 말을 했었어.”

“다 같이 오면…, 왔으면….”




말을 다 하지 못하는 원우의 표정을 읽던 재희는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함께 하지 못한 시간들은 너무나 아쉽지만, 아쉬움으로만 남기기에는 아직은 슬픔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그 꼬리표가 언젠간 그리움이나, 추억으로 대체될 쯤에는 마음이 편해질까.


아니, 아니다.


재희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만약’이라는 이름으로 떠난 이를 기억하게 된 후부터 알게 된 사실은 그 감정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대체되는 그리움이나 추억, 그리고 그 뒤에도 언제나 항상 따라올 그 ‘슬픔’이라는 꼬리표는 아쉬움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될 수는 있지만 정체는 변하지 않는다.


이제 원우도 자신이 느낄 그 불안함을 평생 안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 너 밖에 없는 내가 되어 버렸으니까.’




혼자, 완벽히 혼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어느 곳에도 자신을 붙잡아 줄 누군가가 없을 거라는. 세상의 슬픔과 불안이라는 그림자 속으로 떠밀려 떨어질 때쯤, 지쳐버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후로는 끝없는…. 끝도 없는….




“해 뜬다.”

“응….”




꼭 잡은 손 때문인지 춥지 않았다. 한참 바라본 하늘이 붉어질 쯤에 원우는 하얀 입김을 길게 내뱉었다. 그리고 한참을 또 그대로 있었다.







이대로 해가 뜨는 걸 보고 집으로 돌아가면 마당에 아빠가 있는 거야. 오늘 밤에 쓸 거라고 장작을 더 만들고 계신 거지. 엄마는 식탁 위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올리고 있고. 잡채며 시금치며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한다고 아빠가 한 마디 하면 엄마는 또 투덜거리면서도 소시지 구워준다고 분주해…. 아빠가, 소시지를 좋아했어. 너도 알고 있었어? 맞아, 엄마가 매번 입맛이 어린애 같다고 놀렸어. 그런 건 그냥 입맛 취향이라고 아빠는 늘 조용히 맞받아치고.







‘만약’을 가장한 현실을 바라던 말들은 어느새 과거로 향해서 지금은 없는 두 사람을 그리워하고, 또 기억했다. 원우의 말을 듣고 있던 재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맞아, 내가 같이 있을 때도 그러셨어.


유학 생활하실 때 이야기를 거의  안 하셨는데, 그래도 음식 이야기는 많이 하셨어. 비 오는 날에 전 부쳐 먹어보겠다고 구하기 힘든 김치 구해서 해 먹다가 건물 전체가 발칵 뒤집혔던 이야기는 자주 했어. 비 오는 날에는 아주 당연하게 김치전 아니면 부추전, 가끔 기분이 좋으시면 두 분이서 막걸리를 마시고는 하시는 거야.


넌? 너도 같이 마신 적 있어?


…, 한번. 난 감자전 좋아한다고 엄마가 따로 해 줬어. 그날 비가 엄청 많이 왔었거든. 이사 오기 한참 전이었고, 서울 살 때. 그때 너 떠나고, 나 데뷔하기 직전이었어. 사실은 마시면 안 되는데, 집이라고 엄마랑 아빠가 딱 한 잔만 마셔보라고 준 거였어. 그런데 그날의 기억이 되게 오래가더라.


그랬어?


응. 애들이랑 성인 막 되고 난 다음에 술을 마셔봤는데, 그때의 기억만큼 맛있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


… 그랬구나.


다시 그런 날이 올 거라고, 충분히 원하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뒤통수 맞은 기분이야. 그래서…, 그래서 이렇게 계속 아쉽고, 그립고 그런 감정만 남는 건가 봐.


……..


넌…, 넌 대체 어떻게 이런 걸 견딘 거야?   


……..


재희야.



시간이 지나면,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 마지막 끝맺음을 할 수 없었다. 자신 또한 그렇지 않음을,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상대에게는 할 수 없는 거짓말이었다.




“재희야….”




다시 부르는 이름에 고개를 돌려 드디어 원우와 눈을 마주쳤다. 이미 젖어버린 눈동자에 재희는 잡고 있지 않은 손을 천천히 올려 곧 흘러버릴 눈물을 막으려 했다. 뚝, 떨어지는 눈물방울에 재희는 같이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뜨는 해를 보며 하려던 것들은 이런 눈물 어린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결국 다시 또 제자리인 것 같아서 재희는 막막한 마음으로 원우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젖어버린 눈으로 서로만 보다가 드디어 맞이한 아침의 시간이 새로웠다. 그리고 재희는…. 아무도 모르게 아랫입술의 속살을 씹어 내렸다.


이러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더 모르겠잖아.


네 옆에는 내가 없어야 한다는 따위의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차 마시자. 카페 열었어.”

“…응.”

“반대쪽으로 내려가면 혜숙 씨가 좋아하던 칼국수집 있어. 아침 먹고 가자.”

“응.”




일단 오늘은. 그리고 지금은 아니라고. 재희는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것을 미루었다.


유예된 이별을  기다리는 것이 어쩐지 익숙했다. 생각해 보면 원우와 자신의 시간은  그랬다. 멈추고, 미루고, 그리고 원우만 모르는 이별을 했다.  번이나 도망가고 다시 찾아오기를 반복했고, 원우는 매번 도망간 자신을 기다리고  쫓아오고. 이번에야 말로 따뜻한 일상으로 영원의 시간을 보낼  있을 거라고 믿었었나 보다.


그래서 지금의 마음이 이제껏 있었던 ‘헤어짐의 유예 시간’보다 더 힘든가 보다,라고 재희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따뜻해.”

“응, 따뜻하다.”




그리고 원우를 향해 웃어주었다. 힘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그래, 괜찮다. 곧, 괜찮아질 것이 분명하다.




-




천천히 돌고 돌아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두 사람이 함께 걷는 시간은 아침에 떠오른 해가 함께 따라왔다. 각자의 방에서 씻은 후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두 손이 얽히고, 서로의 몸을 의지한 채 그렇게 황량하지만 한편으로는 따뜻해 보이는 겨울의 풍경을 감상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 있어?”

“곧 중요한 일정이 있어서 가야 해. 회사에서는 더 쉬라고 하지만.”

“그렇구나.”

“나 대신해서 다른 멤버들이 스케줄 하는 것도 있으니까.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울 수는 없지.”





원우의 어깨에 기대어 있던 재희가 살짝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곧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왜?라는 눈짓을 하자, 다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는 작게 말했다.




“…, 너무 다행이다.”

“뭐가.”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잖아. 친구도, 동료도, 팬들도.”

“…, 그렇네.”

“혼자가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다.”

“…, 너….”

“진짜 나 밖에 없는 건 아니잖아. 원우 너한테는 다른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렇지?”

“그건….”




이상한 기분에 원우가 재희의 눈을 마주 보려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을 확인하자, 익숙한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손을 흔들며 ‘나야, 나! 왜 둘 다 전화를 안 받아?!’라는 밝은 햇살을 닮은 목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시호다.”

“시호네.”

“오늘 온다고 했었어?”

“아니, 그런 말 하고 오는 놈이….”




원우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정원을 가로질러 온 시호를 현관문을 열어 반겨주었다.




“어쩐 일이야?”

“아니, 두 사람 전부 왜 연락이 안 되는 거야. 사람 걱정하게. 걱정돼서 내가 여기까지 와야겠냐?”

“미안.”

“야, 솔직히 말해. 걱정돼서 온 거 아니잖아. 일 있어서 온 거지?”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짓는 재희와 달리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원우다. 그런 일로 여기까지 혼자 올 일은 없으니까.




“무슨 서운한 말이야? 내가 진짜 걱정돼서 온 거야. 매니저형도 같이 안 왔어.”

“내가 전화해서 확인해 본다?”

“좀 대충 넘어가.”




거실에 들어서자 소파에 앉더니 원우와 재희를 향해 개구쟁이처럼 웃는 표정은 예전에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났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는 사실이 참 다행이었다.


재희는 그런 시호를 보고 있으니 원우의 곁에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장례식장에서 그의 곁을 지켜주던 동료들이, 그리고 지금도 원우의 갑작스러운 슬픔을 걱정하고 있을 팬들까지. 그 사실은 자신이 그를 떠나도 되는 이유 혹은 핑계가 되었다.


점점 커지는 불안함에 더는 원우의 곁을 지키고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의 불행이 또 언제 그를 덮쳐버릴지 알 수 없으니까. 사실은…, 자신의 불안함이 그의 곁에서 더 커질까 봐 걱정이었다. 그런 걱정은 그를 떠나면 사라질까? 고민해 봤자, 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었다.


여러 가지의 생각이 교차하고 있었지만, 재희는 이미 마당에서 장작을 어떻게 쌓으면 좋을지 고민하는 원우와 그런 원우 옆에서 참견을 하다가 결국 말다툼 아닌 다툼을 하는 시호를 보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럴 거면 가.”

“여기까지 온 친구를 이렇게 보내려고 하네?”

“해 지기 전에 불 피울 수는 있는 거야?”

“얘가 방해해서 그런 거야.”

“야, 난 너 도와주는 거지.”




재희의 물음에 동시에 정 반대의 대답을 하면서 전혀 진척이 없자, 결국 장작은 재희가 말하는 대로 쌓았다. 예전에 현우 씨에게 물어서 장작을 쌓아 모닥불을 피우는 방법을 알아 두길 잘했다.




“캠핑 온 것 같다.”

“그러게. 여기 이사 오고 나도 잘 못 와서. 마당에서 이러는 건 처음이다.”

“우리 예전에 다 같이 한번 오려고 했다가 스케줄 때문에 못 왔었나?”

“그랬을 거야.”




마당 한편에 두었던 그릴 위에 먹음직스러운 고기와 여러 가지 채소들을 올리고 구우면서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하는 이야기들을 듣고 있던 재희는 더 이상 고민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헤어짐의 유예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다 익었어, 먹자.”




입김이 나기는 했지만 이미 모닥불 옆에 차려둔 테이블이 제법 따뜻했다. 입안으로 집어넣는 따뜻한 음식만큼이나 시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원우와 관련된 자연스러운 이야깃거리들은 재희의 질문을 만들어냈고, 그에 아니라며 반박을 하거나 동조하는 원우의 대답도 끊이지 않았다.


한참이나 이어진 따뜻하고 포근한 대화들. 그 속에서 이 순간에 베란다 문을 열고 거실 쪽에서 손짓하는 혜숙과 현우만 있었다면 정말이지 완벽한 저녁이 되었을 거라고 재희는 또 한 번 생각했지만, 그 말은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이거 안으로 들이자. 이제 좀 춥다.”

“나 자고 가도 되는 거야?”

“이 밤에 가려고 했어?”

“네가 빨리 가라며.”

“그럼 가던가.”




싫은데? 거 봐, 안 갈 거면서.라는 말들로 다시 또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다가 재희가 팔짱을 끼면서 물었다.




“안 옮겨?”

“해!”

“할 거야!”




거실로 자리를 옮기고 나니, 이번에는 술이었다. 원우는 어제의 과음으로 적당히 잔을 비웠고, 시호도 적당한 속도로 이런저런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잔을 기울이며 시간을 보냈다. 재희는 따뜻한 차 한잔을 가지고 함께 앉아있다가 2층으로 먼저 올라가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너 내 방에서 자.”

“넌?”

“난 거실.”

“그러지 말고 같이 자.”

“야, 침대 좁아.”

“옛날에 우리 연습생 숙소 살 때는 좁아터진 방에서 10명 넘게 잤어.”

“그건 옛날이고.”

“거실 안 추워? 아니면 네 방에서 이불 깔고 내가 바닥에서 자면 되지.”

“그래도 네가 손님인데. 우리 엄마가 손님한테 그러면 안 된다고 가르치셔서.”

“아, 어머니 말씀은 또 들어야지….”

“……..”

“그래도 같이 자. 나 낯선 데서 잠 잘 못 자는데 너라도 있어야지.”

“징그러워. 인마.”

“징그럽기는, 우리 사이에.”




아주 잠시 혜숙의 이야기에 정적이 될 뻔했지만, 시호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덕분에 그 정적은 금방 사라졌다. 그런 자연스러운 대화들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이 집에 다시 온 후 처음으로 원우를 걱정하지 않는 밤이었다. 한참이나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살짝 들리는 듯했고,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았던 건지 잠이 들었다.


잠이 들었던가 싶었는데, 어느새 꿈을 헤매고 있었다. 소용돌이치는 이상한 것들 사이로 걸어가니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다가와, 이상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내 말에는 이제 힘이 없으니, 그만 돌아와요. 더 늦기 전에.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미 와 있지 않습니까.”




소용돌이치던 무언가가 재희의 옆으로 내려와 무언가를 ‘뚝’ 떨어트렸다. 종이로 된 파일 혹은 책 같기도 했다.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대리들도 더는 … 의 부재를 버틸 수가 없습니다.”

“…….”

“옆의 그 아이가 더 불행하기를 바라십니까?”

“내 선택이 이 아이를 불행하게 하는가?”




재희는 처음으로 그 정체 모를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는 질문들이 제 입을 통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미 불행합니다.”

“그럼 달라질 것도 없지 않은가.”

“…….”

“불행에 불행을 더 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으니, 차라리 비루하게나마 행복이라는 것을 빌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한데.”

“대리가 깃들어 있습니다.”

“……..”

“그 아이의 영혼에 이미 깃들어 동화된 지 오랩니다. 그것보다 당신을 다시 돌아오게 만들려고 얼마나 더 많은 인생의 파일들이 사라지고 비틀어져야 합니까.”

“난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다.”

“이미 그 아이의 인생 파일은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다른 주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불행하게 삶을 마감해야만 돌아오실 겁니까?”

“난 그러라고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라고 한 적은 없지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지요.”

“…….”

“늘 너무 불공평하게도 당신은 자유의지로 모든 책임을 넘깁니다. 인간 세계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

“그리고 늘 책임이나 그 끝도 우리에게 지우죠. 처음부터 만들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말입니다.”




책망하는 말투와 달리 그 표정은 하나도 변함이 없었다. 특별하지 않은 눈코입, 뭐라고 특정할 수는 없는 얼굴. 하지만 똑바로 쳐다본 얼굴이 낯설지 않아서 재희는 한참 눈만 깜박이다가 한 마디를 더 하려는데, 그만 눈이 뜨여졌다.




“돌아가겠다…, 이제.”




무슨 꿈을 꾼 것일까. 하지만 마지막에 하려던 말은 기억했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돌아가겠다, 이제.


돌아갈 곳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깨어난 아침은 재희의 남모를 다짐을 한번 더 짙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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