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별 생존기
성희롱도 모자라 일방적 업무지시를 당연시하는 상사의 행태에 '좋은 게 좋은 거지. 나만 참으면 되는 건데.. 조직에 누가 되지 말자'라는 말로 2년 동안 참아내던 내 마음은 무너졌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노조에 신고를 했고 노사 협의회를 열었다.
노사협의회 자리에 사측에서는 6명이 동석했고 나는 노조 간부 두 명과 함께했다. 2시간 가까이 열린 협의회에서 난 두 가지를 요구했다. 일방적 업무지시를 인정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왠 걸,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내 상사는 거짓말을 했다. 예상했었다. 평소 거짓말과 속임수로 일관하던 그다웠다. 수차례 그에게 부탁했다.
"제발 부탁이니 거짓말하지 마세요. 부장님 똑바로 얘기하세요. 후회하지 마시고요.."
이에 노조 간부는 "그럼 이 부분에 대해선 서로의 기억이 다르니 확인이 필요하겠네요"라고 마무리했다.
노사 협의회 자리에서조차 거짓말로 일관하는 그를 보며 나의 몸은 격렬하게 떨어대고 있었다. 온몸의 피가 바닥으로 끌어내려지고 차가워진 손은 이미 내 손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게요. 부장님. 사실대로 정확하게 얘기하세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이는 그의 입 언저리에 바람이 새어 나왔다. 그 때였다. 나는 그가 쉽사리 인정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어!!!"
격앙된 목소리였다.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저 녹음했거든요."
5분 남짓한 녹음 파일이었다. 핸드폰으로 녹음 해 음질이 다소 떨어졌지만 평소 그가 어떻게 무례한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뭘 상의해야 하는데!! 하라면 하는 거지. 무슨 의견을 들어야 하냐고. 필요해서 하라는 건데!!!
녹음 파일 재생이 끝나고, 나는 무너져 내렸다. 2년 동안 크고 작은 부당한 일들이 가슴속을 휩쓸었고, 그것을 폭로한 지금 그의 대처 방식은 고작 거짓말이 전부였다. '나는 무엇을 한 것인가?' 하는 자괴감에 터져버린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노사 협의회까지 오는 데 적지 않은 기회들을 나는 회사 측에 주었다. 기관장에게도 말했다. 그는 나의 상사가 해대는 아부와 아첨에는 즉각적으로 반응하면서도 정작 나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성희롱도 참아낸 나로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여겼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엉켜 흐르는 눈물은 쉬이 멈추지 않았고 협의회 구성원들은 침묵했다.
"일방적 업무 지시했네요. 고압적인 태도와 말투, 모두 다 우리 000 씨의 말이 맞았군요. 이제 부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어떤 것도 믿을 수가 없네요. 참고로 녹음은 제가 하라고 했습니다. 별다른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노조 간부의 정리였다.
그제야 상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나는 한 가지 더 요청했다. 이후 어떠한 경우에도 그 상사와 나 단 둘이서만 얘기하거나 하는 상황을 만들지 말아 달라고. 이유는 서로의 기억이 다른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고압적인 말투와 태도들 앞에 내 의견을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사측은 받아들였고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후 회사 내에서 나는 함부로 건들면 안 되는 직원이 되었고, 간부일수록 내 앞에서 특히나 말을 조심했다. 아무래도 녹음 파일의 여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 남자 직원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예전 언젠가 삼삼오오 마음 맞는 사람끼리 가진 술자리에서 그와 재미나게 얘기했던 기억이 있어 반갑던 차였다. 업무의 특성상 혼자 사무실을 쓰는 시간이 많기에 다른 직원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지 않은 나는 그런 시간을 특별히 좋아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회사 내에 뭔가 시정되었으면 하는 것에 대해 함께 얘기를 했다. 그 남자 직원도 공감했고 나는 회사 내에 이걸 정식으로 건의해 보면 어떨까 싶다고 했다. 그때였다.
센캐 그만 해요. 회사 생활 좀 원만하게 하세요. 원만하게~
순간, 해머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이 얼얼했다. 역시 말로 맞는 통증은 실제로 맞는 것 못지않다. 평소 그와 친분이 있다고 여겼지만 이런 식의 무례한 반응은 예상치 못했다. 한 마디로 불쾌했다. 하지만 아침 출근 시간이었고 어떤 말을 한다 해도 싸우자는 것 밖에 안 될 것 같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노사협의회 이후 학교 내에서 간부급들은 나를 대할 때면 조심하기도 했지만 미묘하게 나를 배척하고 문제 있는 사람이라고 취급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었다. 그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다. 아니 어쩌면 예상한 것보다 심하지 않아 감사했다. 업무적 불이익이나 온갖 보복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에 비하면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름 가깝고 친하다고 느꼈던 사람에게 그러한 피드백을 받는 것은 적지 않게 충격이었다. 이내 친하다는 이유로 행해지는 무수한 침범과 무례함 속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마음 속 어지러운 생각들이 정리되었다. 그를 참아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그리고 다음에 또 그런다면 그에게 이렇게 말해야겠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