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여행기
드라마를 워낙에 좋아해 언젠가 한번 즈음은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기도 했던 나.
그런 내가 요즘엔 좀처럼 드라마에 흥미를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손예진 배우가 '서른, 아홉'이라는 작품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평소 드라마를 선택할 때 배우의 안목을 중요하게 여기는 나로서 그녀의 선택은 기본적으로 첫 방송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거기에 '서른, 아홉'이라는 드라마 제목과 동일한 나이를 먹은 내 모습을 보기 위함이었을까.
드라마 속 세명의 여주인공 중 찬영은 불륜 아닌 불륜인 인연이 있고, 주희는 모태솔로에 가까운 처녀이며, 미조는 모든 걸 다 아는 일곱 살에 입양 경험을 가진 인물이다.
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인물들 간의 관계와 갈등들이 다소 작위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그 정도 즈음은 드라마적 허용으로 넘어갈 수 있을 정도다.
불륜도 사랑이라 주장하는 친구를 너무도 사랑해 지지보다 비난에 가까운 힐난을 하며 관계를 끊어낼 것을 가르치고,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에 마음 깊은 곳부터 고통받는 모습, 너무도 사랑했던 친구가 급작스럽게 시한부라는 것을 알았을 때 불륜남에게 무작정 찾아가 온몸으로 분노하던 주인공. 서른아홉이 되어야만 가질 수 있는 성에 대한 솔직함과 당당함 등...
이제 겨우 2화를 마친 드라마 속 주요 내용이다.
서른아홉.
피붙이 같던 친한동생은 죽었고, 언니는 마흔 전에 유방암에 걸렸고, 친구는 다섯 번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다. 반면 어떤 친구는 관계의 무게를 감당하기 버거워 단 한 번의 진한 연애도 없이 마흔을 맞이하고, 같은 이유로 한 친구는 원나잇과 같은 가벼운 관계만을 취사선택하며 지낸다.
이 모든 일 들이 내 주변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그럼 나는 어떤가.
나 또한 15년 전 진즉에 끝난 인연을 부여잡고 5,6년 동안 친구도 뭣도 아닌 그 관계로 지지부진하게 끌고 오지 않았던가. 결국 끝을 냈지만 말이다.
여하튼 주변과 나를 돌아볼 때 옛날이었으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비난과 힐난을 보냈을 법한 일들 앞에 어느 순간 말이 없어지고, 숙연해진다. 더욱이 삶에는 뭐라 답하기 어려운 일들로 가득 차 있다는 현실 앞에 입이 무거워진다.
처음 시나리오 작법을 가르쳐 주었던 선생님은 이렇게 종종 말씀하셨다.
"드라마는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즉, 삶에 대한 이야기. 그 뻔한 이야기를 어떻게 창조적으로 그려내느냐.. 이겁니다."
10년이 지났지만,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나를, 내 친구를, 내 연애를, 내 마음을 '서른, 아홉'이라는 드라마를 통해서 보았다.
기대된다. 앞으로 어떻게 또 나를 울고 웃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