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여행기
지옥과도 같은 시간들이 있었다.
지금도 그 시간들을 떠올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끔찍함에 몸서리 쳐진다.
그렇다.
마음은 그 시간 순간, 그 자리에, 그곳에 묶여 있다.
이제 막 하늘에 계신 그분을 믿고 기도할 때였다.
내가 그렇게 아플 때 대체 당신은 어디 있었나요?
당신이 있다면 날 그때 구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기도가 아니었다.
절규였다.
얼마나 기도했을까.
'그때 너랑 같이.. 그곳에서.. 고통당하고 있었단다..'
그렇다.
치료해주는 것이 신의 본성이기도 하지만...
고통 속에 함께 머무르는 것이 신이기도 하다.
아프고 병들어 고통 속에 있는 존재.
성경 속 예수는 비참하고 참담하기 그지없던 존재들과 함께하는 분이셨다.
그랬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상담 속, 내담자가 이렇게 외쳐댈 때가 있다.
"어떻게 좀 해봐요! 지금 당장 이 고통에서 날 치료해줘요"
얼마나 유혹이 되는지 모른다.
지금 당장 내가 아는 온갖 지식과 가르침으로 내담자의 그 고통을 전복시키고 좀 더 나아지게 앞장서고 싶어 진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유능한 치료자인지 증명해 보이고 싶다.
그때마다, 마음 한편에서 되뇐다.
그리고 내 스승이 내게 가르쳐주고 보여주었던 기본의 자리로 돌아간다.
같이 견디자. 같이, 함께, 머물자. 그저 이 고통 속에 함께 있자.
마음의 고통에 허덕이는 많은 이들의 가장 큰 상처는 목격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아픔을 귀 기울여 들어주지도, 함께 해 주지도 않았다는 것.
그래서 돈을, 시간을 내서라도 찾아와 들어달라 한다.
내 고통에 목격자가 되어달라 한다.
내가 당한 고통이 충분히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냐고 공감받고 이해받길 원한다.
그럴 때면 생각한다.
치료는 상태의 호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저 그 고통 속에 나와 함께 묵묵히 있어준다는 것 자체도 치료가 될 수 있겠구나. 예수가 그러했듯이.
50분이라는 한정된 시간, 공간 속 부디 나란 존재가 그대에게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어 줄 수 있길 간절함 담아 나의 신께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