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ppleLee Mar 19. 2024

나는 그렇게 두 번째로 완벽하게 버려졌다.

이렇게 고아원에 왔다.



나는 그렇게 두 번째로 완벽하게 버려졌다.



초등학교 3학년 2월의 추운 겨울. 보이는 것이라곤 탁 트인 바다에 집집마다 널린 오징어 빨래 대, 들리는 것이라곤 잔잔한 물결소리가 전부이던 곳에서 논과 밭뿐인 이곳으로 처음 왔다. 차를 타고 달리다 보니 어느덧 빛은 어둠으로 바뀌었고 여전히 나는 차 안이었다. 어떠한 설명도 사치였던 걸까. 그도 아니면 뭐라고 설명한들 이 방법만큼 완벽한 걸 찾지 못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기 어려웠던 걸까. 열 살 남짓한 내가 이걸 이해 못 할 거라 생각한 걸까. 웬걸.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2년 전 길거리에 처음으로 날 유기했던 일만큼 충분한 예고편은 없었으니까. 어떠한 설명도 변명도 없이, 무턱대고 내리라는 그 사람(생물학적 아버지) 손에 이끌리어 도착한 곳. 그곳은 고아원이었다.


그가 찾아낸 방법은 꽤나 완벽했다. 처음 그가 나를 버리려고 했을 때,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몹쓸 놈의 나의 영민함인지 생존본능인지 모를 것들이 방해요인이 되어버렸다. 울며 불며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집을 찾아오는 비극적인 결과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당시 그의 실망스러운 표정은 지금까지도 눈에 마주 대하는 듯 선명하다 못해 아프다. 그때의 실패를 교훈 삼아 그는 나를 4시간이나 떨어지고 폐쇄되어 있는 고아원에 버리는 방법을 찾아냈다. 더 놀라운 점은 그곳을 소개한 사람이 사촌지간에 있던 친척 중 한 명이었다. 심지어 그 친척은 고아원의 한 법인에서 일까지 하고 있었고 내가 갔던 첫날 인사까지 했다. 물론 그날 이후 한 번도 나를 보러 오거나 한 적은 없다. 친척 중 아니 조부모 중에서라도 비록 눈칫밥을 줄지언정 나를 맡아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일상이 영화나 소설을 못 따라간다고 했을까? 두 번째로 버려지던 그 순간, 그는 재혼을 준비 중이었다. 몇 날 며칠 재혼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그 옆에 나란 존재도 함께였고 내 귀는 그 일들을 다 듣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그곳을 떠나 이곳으로 오던 날 그는 자신의 재혼상대와 아들에게 내가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떠나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일종의 인증이었으리라. 더 놀라운 점은 그 아들이 나의 또래정도 되어 보였고, '안녕'하고 인사까지 시켰다. 심지어 나를 잘 데려다주고 와서 연락한다는 둥. 우리 이제 잘 살아보자.라는 멘트까지 떠들어 재끼는 걸 들어버렸다. 한 마디로 상황은 완벽했다. 나만 없어진다면 그의 재혼은 완벽하게 진행될 테니 말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런 기괴하고 해괴망측한 상황을 열 살 갓 넘은 내가 경험했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하긴, 고아원을 오기 전까지 내가 경험한 학대에 비하면 이 정도는 껌인건가?



밤늦게 도착한 고아원 사무실에서 그 사람은 스무 살이 되면 찾으러 오겠다는 얼토당토않은 약속을 혼잣말처럼 뱉어냈다 아니 뇌까렸다. 물론 나는 믿지 않았다. 평소에도 끊임없이 학대와 폭언으로 그는 나를 거부하고 버렸으니까. 아무튼, 이게 내가 기억하는 그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 사람은 그토록 원하고 갈망하던 대로 완벽하게 혼자가 아니 자유의 몸이 되었다. 술만 먹으면 나 때문에 자기 삶이 망가졌고 나만 아니었다면 본인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졌을 것이라 했다. 그의 술안주에 내가 메뉴로 올라가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신세한탄과 함께 시작되는 무차별한 언어와 신체 폭력 앞에 이제 고작 한자리 수 나이였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전무했다.


그는 전형적인 가정폭력범이었다. 자신의 불행이 어리디 어렸던 나를 마음대로 때리고 함부로 대해도 되는 보증서처럼 여겼다. 한참을 개 잡듯(실제로 나는 그가 보신탕용으로 개를 잡는 걸 보았다, 당시 너무 충격적이어서 온몸이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을 정도였다) 비 오는 날 먼지 흩날리듯 때리고 난 뒤면, 잠든 내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미안하다 속삭이며 세상 좋은 아빠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때 이후 서른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니, 상담을 받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 여겼다. 아동학대를 장기간 당해오던 사람들은 다소 가학적인 형태의 행동을 사랑으로 여기기도 한다. 생존을 위해 부모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아이는 양육자가 가해자가 되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이 소화할 수 있는 무의식적 방법은 결국 이것이다. 



나를 사랑해서 그런 거야, 내가 뭔가 잘못해서 날 때리는 걸 거야



상담을 받고 이 가스라이팅에서 겨우 벗어났다. 아니 아직도 벗어나는 중이라는게 더 솔직한 표현이리라. 상대가 조금이라도 함부로 대한다는 조짐을 풍기면 A.I저리 가라 할만큼 빠르게 내 몸과 마음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일상이나 직장에서 함부로 대하는 사람을 보면 따끔하게 혼을 낸다. 위아래 가리지 않는다. 특별히 상사가 함부로 대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 얄짤이 없다. 그렇기에 직장생활이 녹록지 않기는 하다. 물론 반대로 누군가에게 함부로 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하며 살아간다. 자기 자신을 위해 만만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불편한 사람이 되겠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보면 학대받다 못해 버려지기까지 한 나의 삶은 나에게 약이 된 걸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고아원 생존기를 써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