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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리 Jun 12. 2023

한국과 프랑스, 서로를 향한 낙인

프랑스에 대한 환상


파리에 온 지 한 달 하고도 열흘이 지났다. 이왕 어학연수에 왔으니, 한국어를 최대한 안 써야 하는데 말이지. 여기 와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언어가 생존의 필수 요건은 아니라는 거다. 어느 타지를 가도 ‘안녕하세요.’, ’실례합니다’, ‘고맙습니다’ 이 세 문장만 내뱉을 줄 알면 밥은 먹고살 수 있다. 어쨌거나 벌써 한 달이나 됐다고? 달력을 보고 각성이 확 되던 차에 ‘헬로톡’이라는 언어교환 앱을 알게 되었다. 그래, 어떻게든 말을 뱉어 보자! 


가입한 지 24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메시지들이 쏟아졌다. 요즘 한국어가 엄청 인기 있다는 말은 익히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프랑스어 가르쳐 줄 수 있어요.”, “저는 한국어를 배우고 있어요.”, “나도 K-POP을 좋아해 요.”… 두세 명에게 답장을 보내다가 포기했다. 현지인 친구를 사귀고 싶었지만, 하루 종일 핸드폰만 붙잡고 채팅하는 모습을 상상한 것은 아니었다.


한 편으로 궁금해졌다. 이들에게 한국은 대체 어떤 매력이 있는 걸까. 드라마나 영화, K-POP을 통해 접했을 세상과는 아주 동떨어진 현실을 사는 내가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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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를 왜 배우고 싶어?” Lucas라는 프랑스인과 채팅을 하다가 내가 물었다.

“나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걸 좋아해. 한국어가 예뻐! 그리고 난 대체로 한국인을 좋아해.”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Lucas, 네가 대체로 좋아하는 한국인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니?




내 채팅 목록에는 읽지 못한 메시지가 50개는 더 쌓여있었고, 이따금 핸드폰이 지-잉하고 울리면 헬로톡의 메시지 알림이었다. 그리고, 별로 중요한 사실은 아니지만, 50개 중 40개는 남자들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어느 만남의 장이 다 그렇듯, 기능의 본질을 흐리는 자들은 있기 마련이니까. 그러려니 하려고 했지 만, ‘이 사람들 언어 가르쳐준다는 좋은 무기로 동양인 여자 한 번 꼬셔 보려는 거지?!’라는 꼬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외국에 혼자 사는 여자라고 해서 다 외롭지 않다고!



이 꼬인 생각은 내 상황에서는 자연스러운 발상이기도 했다. 한 달 사이에 길에 서 성희롱을 두 번이나 당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동양인 여자가 혼자 있으니 놀리기 만만해 보였을 거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내가 너희를 그냥 보내준 건, 내가 바보라서가 아니라, 너희들 따위가 나의 소중한 하루를 망치게 둘 수 없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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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지내는 건 어때?” Christina가 내게 물었다.

“너무 좋아! :)” 앞서 말한 기분 더러운 수난들은 이미 툴툴 털어버렸고, 파리 생활에 만족하며 지내고 있다. 진심으로.



“다행이야. 한국에는 언제 돌아가?”

“음... 안 돌아가고 싶어. 난 여기서 공부도 하고, 일도 하면서 오래 지내고 싶어.” 나는 가볍게 놀러 온 여행객이 아니라는 걸 말해 주고 싶었다.

“왜? 한국은 살기 좋은 나라 아니야?” 그는 나의 대답이 다소 놀라웠던 모양이다. 나 또한 그의 반문이 예상 밖이었다. 


넌 내가 부러워하는 나라에 살고 있어!




“나는 한국의 경쟁 문화에 많이 지쳤어. 우리는 일을 너무 많이 하고, 뭐든 빨리빨리 해야 해. 그리고 남들과 비교를 많이 해.” 이들이 한국에 대해 어떤 환상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국가 이미지에 딱히 도움이 안 될 나의 평가가 이어졌다.

“우리는 좋은 집, 좋은 회사, 좋은 차에 집착하고, 남들보다 잘 살기 위해 과하게 노력해. 심지어 얼마나 좋은 음식을 먹는지, 좋은 곳에 여행을 가는지 까지도 과시하고 비교해.” 적고 보니, ‘한국인은 체면과 과시욕이 심해’라는 낙인을 스스로 찍고 있었다. 모두가 그렇지 않다는 걸 물론 알고 있지만.



“그래서 한국 남자들은 유럽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어 하는 거야?” 으엑? 이건 갑자기 웬 무맥락 질문일까. 그가 뜬금없이 물었다.

“응? 그래? 나는 잘 모르겠어. 만약 그렇다면, 그건 좀 다른 이유이지 않을까?”

“헬로톡에서 채팅했던 한국 남자들이 나한테 만나자고 하는데, 그럴 때마다 유럽 여자를 사귀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어.” Christina의 대답을 보고, 그의 채팅 목록도 나처럼 성비가 불균형적이겠다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아, 그랬구나... 근데, 그건 어느 나라건 모든 남자들의 공통점이지 않을까? 하하;; 왜 나면, 나도 대부분 남자한테 메시지가 오거든. 만나자고 하는 사람도 있고.” 



‘Christina, 사실은 우리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아닐까?’라고 말하면, 한국 여자 들은 자아도취가 심하다는 낙인이 찍힐 수 있으니 이 말은 넣어 두었다. 나는 애써 한국 남자들에게 찍힌 낙인을 지워주려다가, 지구상의 모든 남자들에게 오명을 씌운 격이 되었다. 하지만, 많은 여성 사용자들의 프로필에서 ‘노 플러팅!’, ‘노 데이팅!’이라는 문구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어떠한 현상을 반영한 결과일 테다.



아무튼, 나는 ‘프랑스 남자들은 동양인 여자를 쉽게 본다’라는, Christina는 ‘한국 남자들은 유럽 여자를 사귀고 싶어 한다’라는, 우린 서로의 나라를 향해 낙인을 찍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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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Christina는 앞서 이런 말도 했다.

“프랑스에도 마찬가지로 직장, 돈, 애인, 성공이나 가진 것들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래. 어느 나라건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겠지. 프랑스인은 여유롭고, 자유롭고, 검소할 거라는 나의 환상은 하루빨리 바사삭 없애 버려야겠다. 앞으로 누구를 만나던지, 프랑스인과 한국인의 만남이기 전에 ‘사람 대 사람’으 로 만나고 싶다.



다만, 내가 한국인을 향해 찍은 낙인은 아주 오래되고 깊어서, 언제 희미해질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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