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 입문자의 딜레마
“My brain is burning!”
새로운 언어를 배우느라 한창 여념이 없는 나의 대뇌피질은 여름이 오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뜨거워지고 있다. 평일 오전 9시부터 12시 15분까지 어학원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도서관에서 2~3시간 정도 문제집을 풀거나 불어 작문을 하고, 짬짬이 프랑스인 친구들과 채팅을 한다. 지난 토요일에는 언어교환 '밋업'이 있었다. 어학원 선생님을 제외하고, 프랑스인과 실제로 만나서 대화를 해본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대부분의 일과는 불어 공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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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학원 시험 전날, 프랑스인들도 '푸우-'하고 입을 댓 발 내미는 숫자 세기를 0부터 1,000까지 글자로 적어 가며 연습하고 있었다. 이 나라는 숫자를 세는 방식이 아주 비효율적이며, 규칙적인 듯 불규칙이 난무한다. 예를 들어, 70은 60+10이며, 80은 4개의 20이며, 90은 4개의 20에 10을 붙여서 말한다. (이제 이 정도는 능숙하게 말할 수 있다. 호호)
“숫자 쓸 때, '-'이 짝대기를 대체 언제 쓰는 건지 모르겠어.”
Lucas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들은 또 굳이 숫자와 숫자 사이에 '-'를 끼워 넣는다. 그런데, 어떨 땐 쓰고, 어떨 땐 쓰지 않는다.
“아~ 맞아. 헷갈릴 수 있어.”
“21 어떻게 써?”
“Vingt-et-un”
“그럼, 31은 trente-et-un, 41은 quarante-et-un, 51은 cinquante-et-un... 맞지?”
“응. 정확해!”
“101은 cent-un이지?”
“응... '보통'은 맞아. 하지만, cent un이라고 쓰기도 해...”
Lucas는 본인이 설명하면서도 점점 민망해했다.
“221은 Deux-cent-vingt-et-un이 아니고, 왜 Deux cent vingt-et-un이야? 짝대기 어디 갔어...?”
일괄적으로 통일되지 않은 단어들 안에 혹시 숨겨진 규칙이 있다면 외우기 수월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하. 그 이유는 나도 모른다는 걸 인정할게. 불어는 별로 논리적이지 않은 언어야.”
Lucas는 어학원 선생님 Océan이 수업 시간에 자주 하는 말을 했다.
Océan은 종종 입술을 앞으로 내밀고, 고개는 절레절레, 양 손바닥을 펼치고 어깨를 으쓱하는 프랑스인 특유의 표정과 제스처를 보이곤 했다.
"왜냐고? 나도 몰라. 푸우-"
소파는 남성인데, 의자는 왜 여성이냐고? 나도 모르겠다. 얘네도 모른다.
"자, 문제 낼게. 컴퓨터, 거울, 헤어드라이어, 타월, 창문, 문, 헤드폰."
"컴퓨터:남성, 거울:남성, 헤어드라이어:남성, 타월:여성, 창문:여성, 문:여성, 헤드폰: 남성!"
"퍼펙트!"
숫자보다 더 이해되지 않는 문법이 있으니, 바로 남성형과 여성형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의 성별을 나눈다니, 이게 말이 돼? 그보다, 이런 언어와 사랑에 빠진 내가 더 비이성적인 걸까? 평소 언어 선택에 있어 '여성스럽다, 남성스럽다'와 같은 성 이분법적인 표현을 극도로 지양하는 내가, 여성명사인 의자에서 필사적으로 여성스러움을 찾고 있었으니 말이다.
학생보다 더 열정적이었던 일일 과외 선생님 Lucas는 내가 '이제 그만' 신호를 보낼 때까지 쉬지 않고 문제를 냈다.
"Is your brain burning?" (뇌가 불타고 있니?)
"Oui... Je suis très fatiguée. How did you memorize all those?" (응... 나 너무 피곤해. 너흰 저걸 다 어떻게 외웠어?)
"It just comes with practice!" (그냥 연습하면 돼!)
내가 너무 당연한 걸 물었다. 초반에는 연상기법을 활용해서 사물과 성별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 외워보려고 했다. 의자는 다리가 가늘어서 여성, 물은 생명의 근원이니까 여성... 으악! 나의 이런 발상이 소름 끼치게 싫다. 다행히도, 이 방법은 머지않아 실효성을 잃었다. 약 오십이만 사천팔백삼십 개는 족히 넘을 단어들을 두고 이미지 게임을 하는 건 매우 소모적인 일이다. 이제는 그냥 별 의구심 없이 꿀떡 삼켜 본다.
이곳에 살면서 이따금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그러려니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미 세상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데, 한 두어 개 더 이해하려 노력한들 우주를 떠도는 작고 작은 티끌에 불과할 테다.
에어컨이 없는 이 도시의 여름, 식을 줄 모르고 더 뜨거워질 나의 머리와 가슴을 호호 불어 가며 배워야지. 입천장 델라!
마침, 창밖에는 6월의 이른 열기를 식혀 줄 소나기가 좍좍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