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살아가는 당신에게
삶이 유난히 선명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나요? 우리가 살아있음을 인식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바로 죽음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의 삶은 더 선명해지곤 하죠.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발전한 정물화의 한 장르인 ‘바니타스(Vanitas)’가 있습니다. 라틴어로는 ‘공허함’을 의미합니다. 고전적인 바니타스 작품에서는 주로 해골, 시든 꽃, 썩은 과일, 모래시계, 꺼진 촛불 등이 등장하는데요. 존재하는 한 영원할 수 없다는 삶의 유한함과 공허함을 통해 우리는 결국 사라질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또다시 시들어버릴 사랑을 찾고 있나요? 하루하루 나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쓰고 있나요? 삶에 의미를 물으면 물을수록 더욱 모호한 대답만이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쩌면 실마리를 던져 줄지도 모르는 20세기 이후 바니타스 작품들을 감상하며, 소멸과 끝을 향해 흘러가는 삶의 의미에 대해 성찰해 보려 합니다.
아름다움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여 우리를 절망하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에게 잠시 동안 영원의 한 조각을 엿보게 하고, 우리는 그 순간을 온 시간에 걸쳐 펼쳐보고 싶어한다.
_ 알베르 카뮈
허무주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아름다움이란 너무나 순간적이고 강렬해 우리를 절망케 한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찰나의 황홀함에 현혹되어, 인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원을 갈망하게 합니다.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요. 아냐 갈라치오(Anya Gallaccio)는 인간의 이 헛된 욕망을 통찰합니다. "아름다움을 보존하다(Preserve ‘beauty’)”는 작품의 제목처럼 불가능한 시도를 하지만 이와는 상반된 결과를 보여줍니다.
작가는 500개의 붉은 거베라꽃을 유리판과 전시장 벽 사이에 격자 형태로 배열했습니다. 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부패합니다. 관람객들은 처음에는 생기 있고 화려한 꽃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일주일을 채 넘기지 못합니다. 꽃들은 시들고, 곰팡이가 피며, 바닥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처음 모습 그대로 멈춰 있지 않고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목격하게 되지요.
이것이 아름다움이 지닌 잔인한 이면입니다. 사랑도, 젊음도, 어떠한 아름다운 시절도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영원해지길 바라는 인간의 덧없는 욕망을 기어코 끄집어내고 말죠. 필자는 전시장에 걸린 이 작품을 직접 감상할 수 있다면, 꽃이 가장 붉고 싱그러운 첫날이 아닌 시들고 부패하여 교체하기 직전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모든 생명은 소멸로써 삶이 완성되기 때문이죠. 한때는 아름다웠고, 향기로웠고, 존재 자체로 의미 있던 시절을 모두 지나온 가장 완전한 존재를 목격할 수 있지 않을까요?
소멸해 버린 존재로 인한 허무나 절망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면, 우리는 피었다가 시드는 꽃이 아니라 저 꽃을 바라보는 관찰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불꽃 같은 사랑이 사그라들지라도, 당신은 그 사라져 버린 불꽃이 아니라 불을 피울 수 있는 주체라는 것을 기억해 보세요.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며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오늘 하루도 가치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기 위해 출근과 같은 반복적인 행위를 할 테고요. 혼자만 보기 위해 쓰는 일기도 사실은 스스로 존재를 확인하는 하나의 행위입니다. 오늘의 증명이 끝나면, 내일 또 다른 증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한 멈추지 않는 이 고단한 증명은 과연 언제 끝이 날까요? 증명의 끝에는 어떤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로만 오팔카(Roman Opalka)는 캔버스에 1부터 시작해 순서대로 숫자를 적어가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각 캔버스가 가득 찰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했으며, 한 캔버스가 다 채워지면 중단 없이 다음 캔버스로 이어갔습니다. “1965/1-∞”라는 프로젝트입니다. ‘1965’는 오팔카가 카운트를 시작한 해를, ‘1-∞’는 1로 시작해 정의할 수 없는 끝을 의미합니다. 그의 목표는 무한에 도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실패는 시작부터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어차피 무한에 도달할 수 없으니, 죽기 전까지 최대한 높은 숫자를 그리는 것이 최선일까요?
우리가 살고 창조하는 시간은 우리의 점진적인 사라짐을 구체화합니다. 우리는 동시에 살아 있고 죽음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생명체의 신비입니다. _로만 오팔카
점진적으로 높아지는 오팔카의 숫자들은 무한을 향해 나아가는 것일까요? 아니면 죽음을 향해 사라져가는 것일까요? 첫 번째 캔버스의 배경은 검은색이었습니다. 그러나 70년대부터 그는 이 검은색에 흰색을 1%씩 추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배경색은 점차 회색으로 변하다가, 2008년에는 완전히 흰색에 도달했습니다. 흰 물감으로 그려진 숫자들은 매우 희미해지기 시작했죠.
그의 숫자는 5,607,249에서 멈췄습니다. 다음 숫자인 5,607,250은 삶의 경계선 밖에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숫자가 되었습니다. 5,607,249는 가장 희미한 숫자였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가장 선명한 숫자이기도 합니다. 오팔카가 도달하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마지막의 가장 높은 단 하나의 숫자가 아닌, 5,607,249번의 숫자를 써 내려가며 살아있었던 매 순간들이라는 단순하고도 자명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결코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시간 속에서 우리가 관측하고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찰나에 불과합니다. 우주의 나이를 1,000년으로 압축하고 우리가 100살까지 산다고 가정해봅니다. 그중 우리의 삶은 약 0.0026일, 그러니까 3분 42초 정도입니다. 우리는 방대한 우주 속에 태어나 4분도 채 되지 않는 삶이라는 노래 한 곡을 남기고 간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문화예술 커뮤니티 안티에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