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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수 Jan 13. 2024

머리를 자르며

끈기가 있다고 해야할까.


문득 곁을 살펴 보니 내 주위에는 나와 긴 시간을 함께한 존재들이 참 많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도 시덥잖은 카톡을 남기는 대머리 내 친구는 20년 전부터 계속된 끈질긴 인연이고, 지금도 내 머리를 책임지는 홍대 앞 이끼헤어는 십여년전 전역 직 후의 우연한 첫 만남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책 모임은 어떠한가. 나는 여전히 스스로가 모임에 조인한지 얼마 안된 꼬꼬마라 생각하는데, 벌써 4년차에 접어들어 영락 없는 고인물 취급을 받고 있다. 코로나 직전 큰 뜻 없이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해오고 있는 피티까지 고려한다면 나는 시작했다하면 3-4년이요, 좀 지났다하면 10년은 금방인 숙성 전문 인간이다.


이 쯤 되면 내가 긴 시간에서 오는 안정감을 좋아하는 사람이겠거니 싶지만. 시간이 흐른다해서 그 많은 일 들이 그저 편안해져만 가는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고 내 생활도 꽤나 바뀌어 왔기에 길고도 길게 이어온 내 소소한 관계들은 여기저기 삐걱대기 일쑤다. 어릴 적 그저 동선 상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택한 이끼헤어는 그새 서너번 자리를 옮겼고, 이제는 굳이 왜 거기까지 머리하러 가냐는 주위의 비아냥을 들으며 하루 반나절을 들여 그 곳에 가 뻔하디 뻔한 남성 커트를 받는다. 한 편으로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게 되어 90%쯤은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린 친구의 넋두리를 들으며 수시간째 그저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시간은 참 많은 것들을 불편하고 불필요하게 만드는 듯도 하다.


최근 나와 꽤나 긴 시간을 함께 했었던 한 사람을 애써 끊어냈다. 관계에 있어 끊어낸다는 표현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라는 걸 알지만, 수더분한 시간을 함께한 만큼 억지로 끊어내지 않고서는 끊어질 수 없는 관계였음을 알기에 끊어냈다는 표현만큼 적확한 표현을 나는 찾지 못했다. 시간은 꽤나 많은 것들을 낡게 만들고, 시간 앞에서 우리는 사물이든 사람이든 동일하게 무력해질뿐이다. 결국 이끼헤어든 대머리친구든 그 사람이든 다 시간이 흐르면 낡아지고 불편해지는 건 다 마찬가지일텐데, 왜 어떤것은 아직 내 곁에 남아있고, 어떤것을 나를 떠나게 되었을까. 결국 모든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 낡아지고 불편해져 결국 멀어지게 되는걸까.


이별을 마치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다시 홍대로 향했다. 아무렇지 않은듯 아무일 없는듯 그저 미용실 의자에 앉아 질끈 눈을 감았다. 그저 매번 그래왔듯 그렇게 잘라주세요 하며 눈을 감고 상념에 빠질 때쯤 문득 익숙한 원장님이 내게 질문을 걸어왔다. "요즘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나요? 평소보다 머리가 좀 부어있는 것 같은데,". 내 머리를 만져온 그 긴 시간이 만들어 낸 직감이겠지. 살며 오고가면 나는 언젠가 그 낡음과 직감을 그리워하게될까. 시간만이 답을 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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