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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드스타 Sep 30. 2022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

<불펜의 시간, 김유원>



어떤 교수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형태소 얘기를 하던 교수는 갑자기 칠판에 그래프를 그리기 시작했다. 회사원에서 기업의 대표, 거기서 이제는 정치인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의 인생 그래프였다. 우상향. 바닥에서부터 하늘을 찌르는 인생. ‘신화’였다. 그리고 그는 대부분의 인생은 같은 선상에서 시작했다가 끝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로로 직선을 그었다. 그리고 우상향 그래프는 절대로 평범한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렇게라도 살면 다행이지.’



「불펜의 시간」. 불펜에만 있다가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결국에는 성공하는, 우상향의 이야기일 것 같았다. 등장인물로는 혁오, 준삼, 기현 세 사람이 나온다. 세 사람은 야구라는 연결고리를 가진다. 프로 야구선수 혁오, 그와 중학교 야구부 동창인 준삼, 스포츠 기자 기현. 이야기는 준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자식이 태어났을 때도 한 방을 기대했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자식이 태어나 자신의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아내의 배에서 나온 아들과 딸은 평범했다… 매달 꼬박꼬박 입금되는 급여에 안주하고 싶어질 때마다, 조금씩 오르는 월급에 기뻐하고 싶은 밤마다 야구장에 들러 홈런을 기다렸다. 경기를 끝낸 선수들이 한 줄로 서서 인사하면 슬쩍 고개를 숙였다. 한 방을 노리는 자로서의 동지애를 표했다.


‘준삼’의 아버지. 평범한 공무원인 그는 ‘특별’함을 갈망한다. 우상향의 인생. 그의 아들인 준삼은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뤄주고 싶어 초등학교 야구부에 입단한다.

내가 얻을 수 있는 성취는 어제보다 나은 내일 같은 자아도취적인 것뿐이야. 그건 일기장에 적었을 때나 의미가 있는 거지 신문에 나올 만한 성공은 아니야. 나는 아무래도 프로가 되긴 어려울 것 같아.


그러나 준삼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야구를 포기한다. 같은 학교 야구부이자 에이스였던 혁오와 자신을 비교해보고 깨달았다. 자신이 야구를 지속한다 해도 혁오처럼 ‘특별’한 존재가 되기 어려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준삼은 회사원이 된다. 그러나 늘 우상향만 해온 것 같은 혁오도 고충은 있었다.


혁오는 너무나 뛰어난 대신 시기와 질투를 많이 받았다. 특히 엄마 친구의 아들이었던 진호가 심했다. 혁오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렸다. 혁오는 늘 참아왔다. 하지만 고교 전국체전 결승전 날, 승리를 거머쥔 그는 패배한 사람의 눈을 응시해서는 안 된다는 엄마의 충고를 잊은 채 진호에게 승자의 눈빛을 보낸다.


혁오는 우승 세리머니를 하다가 진호와 눈이 마주쳤다. 열등감으로 이글거리던 진호의 눈이 가냘프게 떨리고 있었다. 혁오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듯한 진호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대부분의 선수가 자신에게 보내는 복종의 눈빛이 진호의 눈에도 어른거렸다.


다음날 진호는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하게 되고, 혁오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기대를 받으며 프로 입단까지 한 혁오는 타석에 있는 진호의 환영에 괴로워하다 결국 자신만의 규칙을 정한다. 앞서 던진 투수가 넘겨준 점수를 그대로 다음 투수에게 넘겨주는 것. '이기는 것을 욕망하지 않는 스포츠'가 진호리그의 규칙인 것이다. 이런 이상한 투구에 승부조작이라는 의문을 품은 기자가 있었다. 기현이었다.


기현이 청소년 체전 최초의 여자 승리 투수가 되자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찾아왔다. 슈퍼마켓 일보다는 딸의 매니저 일을 재밌어하던 기현의 아빠는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여자라서 안 된다고 할 때는 꺾이지 않던 의지가 돈 때문이라고 하니 의외로 쉽게 접혔다. 눈물이 쏟아졌다. 뭔가 서러운데 누구를, 어떻게 원망해야 할지 몰라 가슴이 아팠다. 나는 왜! 나는 왜!


슈퍼마켓 집 딸 기현은 여자였기에 선수로서 야구를 지속할 수 없었고 그런 그를 위로한 스포츠 기자의 이야기에 납득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도 야구선수 대신 스포츠 기자의 길을 걷게 된다. 감독님 대신 편집장의 말을 귀담아들으며 신입 때부터 특종을 내는 그는 여성 최초의 스포츠신문 편집장을 목표로 달려간다.


우린 쉽게 무너지지 않는 걸 만들고 싶어 해. 작아도 단단한 거, 어쩌면 작아서 단단한 거.


무대는 다르지만 집단이 썩어있기는 비슷하다. 준삼의 회사는 비우호적인 노조를 구조 조정하려고 한다. 야구와 언론은 승부조작 카르텔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세 사람은 자신만의 전력투구를 하며 살았지만, 비열한 집단에서 개인은 버틸 수 없다. 그들은 이제 ‘작고 단단한,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것을 만들려고 한다. SNS에 승부조작을 폭로한 기현은 인터뷰에서 얘기한다. 승리를 향한 과도한 집착과 경쟁 분위기가 사람을 죽이고 있다고. 비명을 질러야 버틸 수 있는 사람이 한계에 다다르기 전에 비명을 지르지 않아도 숨 쉴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말을 해야 한다고.

나의 고등학교 졸업식이었다. 강당에는 학생과 학부모들이 가득했다. 3학년 부장 교사를 맡았던 국어 선생님이 단상에 섰다. 서울대 의대 일명, 서울대 법대 일명을 포함한 서울대 입학자 몇 명... 그는 홀가분한 얼굴을 하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자신이 할 몫을 다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나는 가, 나, 다군에서 모두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웃을 수 없었다. 여기서 사라지고 싶었다.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졸업식을 마쳤다. 뭔가 인생이 잘못되어가는 느낌이었다. 같이 공부한 친구들은 모두 합격했다. 나는 재수생, 공식적으로는 그저 소속 없는 스무 살이었다. 어느 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한 아주머니가 오더니 의아하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대학생이에요? 아니오. 고등학생이에요? 아니오. 그럼 뭐예요?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에서는 ‘네가 죽으면 나도 죽고 네가 살면 나도 산다. 네가 불행하면 나도 불행하고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고 한다. 우리는 승리의 역사를 기록해왔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단편적이지 않다. 승부에서 패배했을 때도, 저성과자로 낙인찍혀도, 특종을 빼앗겨도 삶은 계속되고 그 안에서도 아름다운 조각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심지어 승리도 패배도 하지 않는 지점도 있다. 아름다운 패배가 아닌, 기적 같은 승리가 아닌 그 어떤 것.

가끔 내가 남보다 뒤처진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었다. 승패를 기준으로 나의 그래프를 그린다면 친구들보다 많이 밑에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의 그래프보다는 위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준삼을, 혁오를, 기현을 떠 올리며 숨을 고를 수 있을 것 같다. 승패가 없는 세상에서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또 그런 세상을 모두가 누릴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 소설 속 정치인들의 부조리에 항의하며 거리에 나선 사람들이 질렀던 비명처럼. 과도한 승리에 집착해 옥죄는 세상에 내 작고 단단한 볼을 힘 있게 던져본다.


<승패 없는 세상>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5866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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