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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앞접시 Jul 09. 2022

월간 피자


나는 개인적으로 개최하는 월례 행사가 하나 있는데, 한 달에 한 번 도미노 베이컨체다치즈 피자를 먹는 것이다. 사이즈는 라지, 갈릭 디핑 소스는 10개를 추가하고, 도우는 누가 뭐래도 나폴리 도우다.


이 행사의 식순은 이렇다(이 식순을 엄격히 지킨다). 일단 해가 지기 전까지 그날의 일들을 모조리 마무리해낸다. 저녁 시간에 맞춰 매장에서 피자를 픽업해 집에 돌아온다. 책상 위의 스탠드 하나를 제외한 방 안의 모든 빛을 소등한다. 그리고 노란 조명과 고요 속에서, 피자를 먹는다. 그러면 그 순간 (바로 여기가 이 행사의 목적지인데) 나는 확실히 행복해져버린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살기 싫다는 생각에서 아득히 멀어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살아내기 위해 정신없이 이것저것 해대다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종종 그만 살고 싶어져버릴 때가 있다. 분명 살려고 각종 고됨을 견디는 중이긴 한데, 아니 뭐 이렇게까지 해서 굳이 살아내야 하는 건가, 라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이런 의문은 자칫 꼬리에 꼬리를 물고선 당최 인간은 왜 사는 걸까, 라는 근본적인 의문으로까지 내달려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하면 화들짝 놀란 뇌 쪽에서도, 선생님 지금 뭐 철학자라도 되시려는 건가요? 딱 굶어 죽기 십상이지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사는 이유 같은 거야 이제 적당히 넘기시고 하시던 일이나 마저 하시는 게 어떨까요? 라며 황급히 중재에 나선다. 그러면 답을 내기가 슬슬 버거워진 내 쪽에서도, 하긴 뭔가 이유가 있으니 다들 살고 있는 거려나요. 알겠습니다. 역시 좋은 게 좋은 거니까요 허허, 라는 식으로 좀 전의 의문을 대충 뭉개놓는다. 그리곤 다시 살아내기 위해 정신없이 이것저것 해댄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질문들이란 흡사 부메랑과 같다. 당장은 야! 나 지금 바쁘니까 저리 가! 하고 어디 휙 던져버린다 해도, 언젠가 삶이 좀 휘청거린다 싶으면 이때다! 하고 다시 휘리릭 돌아와버리기 마련인 것이다. 그렇게 익숙한 휘리릭 소리가 들려오고, 마침 사는 것도 좀 벅차고, 시간도 좀 남아버리는 등의 적절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결국 인생의 어딘가에서 삶의 까닭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나 또한 그랬던 적이 있다. 그리고 그 고민의 과정은 대략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어디 보자.. 내가 왜 살더라.. 일단 태어났고.. 죽기는 좀 그렇고.. 음.. 근데.. 내가 왜 태어나기로 했더라.. 어.. 그러니까.. 태어나려고 했던 적이.. 없구나!


태어나려고 했던 적이 없었다. 음.. 이거야 딱히 희망찬 결론이라고 볼 순 없겠지만, 나의 태어남에 나 자신의 귀책사유가 없다는 건 나름 위안이 되어주기도 하는 일이다. 만약 내가, 세상에 넘쳐나는 각종 역경과 좌절과 뭐 그런 것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태어나겠어! 덤벼라 세상아! 정도의 각오로 세상에 나왔다면, 살기 싫다는 생각이 들거나 그만둠을 고민할 때마다 아무래도 좀 민망해지긴 할 테니까(뱉어놓은 말이 있으니). 하지만 내가 온전히 타의에 의해 태어나져버렸다면, 그러니까 뭔가 떠밀리듯이 세상에 출전하게 된 것이라면, 그런 일에 있어서도 한결 가벼운 마음이 되어낼 수 있지 않을까. 사람 수가 부족해 떠밀려 나온 축구 시합처럼, 경기 중에 별 활약을 해내지 못했거나 혹은 실책을 범했다고 해도, 아니 그러니까 내가 안 한다고 했잖아~ 너스레를 떨며 다시 벤치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애초에 나는 선택권이 없었으니까. 물론 누군가를 떠민 사람은 역시 그 누군가에게 기대를 좀 걸긴 했겠지만. 


아마 나는 이런 결론에 도달하고선, 삶에 대한 나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 죽는 것을 하나의 진지한 해결책으로 챙겨놓기 시작했던 것 같다. 정말 더 이상 살아내기가 싫어져버리면 위기에 빠진 조자룡의 심정으로 비책이 담긴 비단 주머니를 풀어내야지, 하고. 직장인들은 가슴속에 사직서를 한 장씩 품고 산다던데 뭐 비슷한 느낌이지 싶다.


엄마 아빠가 정답을 알려주기 전부터 나는 내가 태어난 이유를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살다 보면 티비나 책이나 전체적인 분위기 등으로 그냥 알게 돼버리는 것들이 있으니까. 나는 언젠가 엄마 아빠에게 나를 왜 낳기로 했냐고 물었다. 그들은 결혼했으니까 당연히 낳는 거지, 정도로 대답했다. 대부분 그런 식이겠거니 생각이야 하고 있었지만, 내 출생의 공공연한 비밀을 직접 들어버렸을 땐 왠지 요상한 기분이었다. 그들은 스물다섯에 결혼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내가, 그다음 해에 동생이 태어났다. 사회자가 말했다. 이것으로 결혼식을 마치겠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무언가가 사회적 당위로, 그러니까 당연히, 의 범주로 자리 잡았다는 건 이런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면 당연하게도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듯, 그 일을 감행하는 것에 대한 의심과 고민이 면제되는 일. 그런데 내 생각에는 아이를 낳는 일이야 말로 굉장한 의심과 고민이 필요한 문제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사람을 키워내는 데 쏟아부어지는 개인의 자원은 논외로 하더라도, 생각해보면 오히려 꺼리는 쪽으로 당연해지는 게 맞지 않나?


왜냐면, 일단 어떤 인간이 태어날지부터가 미지의 영역인 데다, 태어날 사람 입장에선 순간순간의 삶의 난이도가 그 미지의 결과물을 잔인할 정도로 참고해 책정될뿐더러, 어떤 난이도를 선고받든 분위기상 살아가는 것 외엔 다른 길을 택하기가 어렵고, 누군가를 태어나게 하는 선택의 당사자인 부모는 자기 선택의 결과를 온전히 책임져내는 게 원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아무리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희생과 사랑을 펼쳐내며 자녀의 삶을 돕는다 해도, 자녀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한 그것은 돕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자녀의 삶을 살아내는 건 부모가 아닌 자녀, 즉 부모의 타인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부모는 이 판이 어떤 보장도 없으며 모두가 킵고잉을 외치는 낙장불입의 세계라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원리적으로 자신의 선택을 온전히 책임져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사람을 태어나게 한다. 아마도 결혼(이나 뭐 비슷한 것들)을 했으니 당연히.


운이 좋아야 한다. 일이 곧잘 풀려나갈 때는 모두가 해피한 채 성과와 그에 대한 지분만을 얘기하니까. 하지만 일이 잘못됐을 때, 사람들은 성과와 지분이었던 것을 과실과 책임으로 바꿔 부른다. 어그러진 일의 책임 소재를 찾기 시작한다.


하여 불확실과 불가능을 동반한 이 감행에 대해 집행유예라도 확보해내기 위해선, 이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는데, 부모는 반드시 운이 좋아내야 한다. 최소한 태어나져버린 사람이 본인의 태어남을 비관하진 않도록. 그래서 태어남의 책임 소재를 따져보는 일이 없도록. 각종 확률 게임에 놀랍도록 처참한 성적을 기록해온 나로서는, 여기까지만 해도 이 판에 배팅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앞서 말한 태어남을 전제로 한 문제 외에 조금 더 근본적인 고민거리는, 세상 누구도 자신을 태어나게 해달라고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아이를 생각 중인 부부에게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태어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생일은 3월 18일 정도로 맞춰주셨으면 하는데.. 같은 요청이 도착하고, 열심히 고민해본 부부가 알겠습니다. 시기는 최대한 맞춰보도록 노력할게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정도로 대답할 수 있다면, 태어남은 완전히 합의의 문제가 된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일은 없다(불가능하다). 모든 태어남은 일방적이고 강제적으로 집행돼버린다. 태어나는 쪽에서는 전혀 손써볼 방도가 없는 것이다.


가끔 생각해본다. 내 자녀가 (어떤 사정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빌어먹을 세상에 자신을 왜 태어나게 했냐며 나를 원망해댄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미안하다?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남들 다 하는데 왜 나한테만 뭐라 그래? 이 나라를 위해서? 내가 살 이유가 필요해서? 거기다 요놈이 뭐 기후 재난 시대에 태어나게 한 죄, 짝사랑하는 다솜이가 관심도 안 주는 외모를 물려준 죄, AI 때문에 취업도 힘든 시대에 태어나게 한 죄, 아무튼 지 맘대로 태어나게 한 죄 등으로 나를 고소라도 해버린다면.. 나는 변론을 포기하고 전 재산을 빼앗긴 채 후회와 죄스러움으로 가득 찬 여생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죄책감에 취약한 관계로 그런 일은 정말이지 피하고 싶다.


나는 모르겠다. 세상에 먼저 태어나(져) 살아왔다는 자격만으로 누군가에게 태어남을 강제하는 게 과연 맞는 일인지. 그것이 결혼(이나 뭐 비슷한 것들)의 너무도 당연한 다음 스텝으로 여겨져도 괜찮은 일인지. 태어남은 정말 감사해야 하는 일인지. 세상에 없던 인간이 굳이 태어나져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혹시 그것은 그저 기존 인간들의 필요 때문은 아닌지. 그렇다면 인간은 필요하다면 다른 인간에게 태어남을 강제해도 되는지. 남의 삶까지 걸고서 감행하는 배팅은 정당한지. 왜 사람들은 책임을 회피하거나 책임질 수도 없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쉽게 비난하면서, 애초에 완전한 책임이 불가능한 일을 권장하며 축복이라 부르는지. 이것은 흡사 인류적 가스라이팅이 아닌지. 이런 것들을 그저 당연히, 라는 괄호 안에 묶어 그냥 좋게 좋게 넘어가버려도 될 일인지.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아이를 낳지 말자는 내용의 1인 시위라도 하려는 건 전혀 아니구요.. 그냥 개인적으로 그런 당연함에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뭐 남들이야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든, 아이를 낳든 말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니까. 다만 나는 누군가를 태어나게 하진 않고 싶다. 앞선 의문도 그렇고, 솔직히 무섭기도 하고. 나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생각해보면, 아마 나는 좋은 부모가 되진 못할 것 같다. 이건 상관관계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부모에게 괜찮은 자식이 되어내지도 못하고 있다. 우리 엄마 아빠가 걱정이 많다.  


그치만 나는 한 번 한다면 반드시 해버리는 올곧은 인간은 전혀 못 되는 관계로, 훗날 2남 2녀를 둔 가장으로서 AI와의 밥그릇 싸움에 고군분투 중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렇게 뱉어놓은 말이 있으니) 개인적으로는 참 난감해지겠지만.. 뭐 이제까지의 파급력으로 볼 때 내가 보이는 사람마다 붙잡고 떠들어대지만 않는다면 별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사실 죄다 쓸데없는 걱정인 게, 솔직히 이대로 가다간 결혼이나 자식은 고사하고 내 생존부터가 위험하다. 내 주제에 무슨 이딴 고민을..


이건 여담인데, 대학생 시절 죽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원서로 진행됐던 소규모 철학 전공 수업에서 앞선 내용을 좀 요약해 말한 적이 있었다. 당시 거의 빵점이던 발표 점수나 올려보려고 수업 중에 간단히 손을 든 것이었는데, 교수님은 내 말에 뭔가 흥미가 동하셨는지 갑작스레 열 명 남짓의 수강생들에게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고, 취업에 도움이 안 되면 안 될수록 눈을 반짝이는 철학도들의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나는 이런 건 어때요. 나라에서 40살쯤에 한 번 안락사 기회를 주는 거예요. 한 10년간 범죄 기록 없는 사람들로만 제한해서, 정도로 한두 마디 거들다, 토론의 열기가 점점 뜨거워지자 평소처럼 냅다 죽은 척이나 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과목에서 A+가 나왔다. 그러니까 뭐.. 이런 생각도 해두면 아주 쓸모없진 않을 수도 있단 얘기다. 물론 철학과가 아니었다면 곧장 건물 밖으로 내동댕이쳐졌을 수도 있겠지만.. 특히 경영학과는 따라 하지 마세요.


나는 어느 날 살아 있게 됐다. 아마 결혼에 패키지로 묶인 어떤 당연함에 의해서. 그리고 한동안 별생각 없이 그냥 잘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그냥 산다기보다는, 뭐랄까.. 살아내고 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분명 다른 선택지와 그것을 선택하지 않으려는 노력 같은 것이 동반되어 있다는 실감으로 추측컨대 산다, 외에 그만둔다, 라는 옵션을 챙겨놓기 시작했을 때 즈음부터가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살아낸다, 는 건 그만두지 않기 위해 애써댄다, 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경험상 살아내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 번째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잊어버리는 건데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냥 좀 행복하면 된다. 행복이란 건 삶으로 향하지 않는 모든 생각들을 까먹게 만들어버리니까. 사는 게 너무너무 좋고 내일이 못 견디게 기다려질 정도로 행복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그저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가까스로 까먹어낼 정도로만, 살아 있고 싶다는 본능을 손상시키지 않을 정도로만, 좀 행복해내면 되는 것이다.


근데 그게 안 된 지가 꽤 됐다. 나는 정말 조금씩이라도 성장하고 있다는, 어쨌든 간에 앞으로 나아가고는 있다는 실감 정도면 충분한데, 빌어먹게도 그 쉬운 걸 못 해내고 있는 것이다. 눈을 정말 크게 뜨고 있어야 겨우 희미한 희망이 보인다. 아예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이렇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있다면 어차피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싶다.


그만두면 편할 텐데, 라는 푸념이 상념으로 비옥한 멘탈에 뿌리를 박고 점점 확신으로 자라난다. 여기서 더 나아지지 못할 거라는, 나는 결국 아무것도 되어내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든다. 남들은 다 잘해내는 것만 같다는, 근데 난 씨발 왜 그 평범함을 못 해내고 이 모양이냐는 생각들을 해댄다. 반지하 자취방이 너무 낮다. 그리고 너무 좁다. 가끔은 내 상황이 너무 답답해 터져버릴 것만 같다. 그렇게 펑 터져버려도 누군가 눈치채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나는 분명 달리고 있는데 왜 자꾸 뒤로 밀려나는 것만 같을까. 침대 밑에 붉은 여왕이라도 살고 있는 걸까.


최근에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냥 심심해서였다. 엄마는 퇴근 후에 혼자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고 했다. 나는 평소처럼 시루(개)는 뭐 하고 있냐고 물었다. 엄마는 오늘 같이 일하는 동료가 아들 자랑을 엄청 했다고 대답했다. 그 아주머니의 아들이 이번에 삼성에 들어갔다고 했다. 예전엔 다들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아들을 둔 당신을 부러워했는데 이젠 자랑할 게 없어서 속상하다고 했다. 나는 걱정 말라고 허허 웃곤 괜히 농담을 좀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시루가 뭘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궁금해서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음.. 이래서야 까먹어내기가 곤란한 것이다.


사실 쉽다고야 했지만 살아내는 첫 번째 방식은 안전성 면에서 다소 불안한 부분이 있다. 그만두고 싶단 생각을 잘 까먹어버리고 있다가도 언젠가는 망각의 공백이 생길 수도 있을 텐데, 그 공백에서 어떤 일이 감행될지는 모르는 거니까. 나처럼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그만두는 일을 차일피일 미뤄대며 뜻밖의 생존력을 보일 수도 있겠지만, 냉철한 판단력과 신속한 실행력의 소유자라면 공백이 발생하는 그 즉시 방아쇠를 당겨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내는 두 번째 방식은 그 공백에서 생기는 안전사고를 최대한 줄이는 방식인데, 죽어도 그만둬버리지 못할 이유를 지니는 것이다. 뭔가를 하지 않아내는 데는 아무래도 의지보단 협박이 좀 더 촘촘한 억제기가 되어줄 테니까. 그렇게 그만두지 못할 이유를 닻마냥 삶에 콱 박아놓고 기어코 살아내는 것이다.


자신을 삶으로 끌어당겨내는 이름들이 있다. 살다 보면 그런 것들이 잔뜩 생겨난다. 채 쓰지 못한 통장 잔고나, 아직 이루지 못한 꿈, 처리해야 할 업무, 갚아야 할 죄책감, 돌보는 동물, 사랑하는 연인 등등. 자식, 이라는 이름은 뭐 말할 것도 없겠고. 그중 죽어도 지켜내고 싶은 것들, 내가 없으면 정말 안 되는 것들을 닻으로 삼아 삶의 해저로 내려보낸다. 그러면 닻의 주인은 그만두고 싶단 생각이 들 때마다 이불 속에서 썰려 있는 말 머리를 발견하게 될 테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단 하나의 선택지만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만둬선 안 된다는. 다시 말해, 죽어도 살아내야 한다는. 


굳이 닻을 생각해볼 필요가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부럽다. 반면 아무리 애써봐도 세찬 파도를 견딜 만한 닻을 가져내지 못한 채 결국 본능을 역행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겐 다행히도 엄마 아빠라는 닻이 있다. 아마 이것이면 충분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이미 너무 많은 걸 빼앗아버렸으니까.


나는 잘 모르겠다. 엄마 아빠는 어떻게 결혼했으니 당연히 나를 낳은 건지. 그런데 그것보다 더 모르겠는 건, 당신들의 전부를 대체 어떻게 낳았으니 당연히 나에게 줘버릴 수 있었는지 하는 것이다. 나를 당신들의 등 뒤로 감춘 채 내게 달려드는 불행들을 막아내는 일을, 나를 위해 본인들이 누릴 수 있었던 것들을 포기해내는 일을, 어떻게 그렇게 오래, 어쩌면 지금까지도, 기꺼이 해낼 수 있는 건지. 한번은 정말 궁금해서 아빠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나한테 쓰는 돈 안 아깝냐고. 아빠는 하나도 안 아깝고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런 거 물어보지도 말라고 엄청 혼났다. 심지어 학사 경고 통지서가 날아온 날이었는데도.. 내게 일말의 염치가 남아 있는 한, 그들이 그토록 소중히 지켜온 것까지 빼앗으려 들 순 없을 것이다. 그러니 충분하다.


막걸리를 마시며 직장 동료의 아들이 삼성에 들어갔단 소식을 전해줬던 엄마는, 다음 날 내게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곤 어제 괜히 이상한 소리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걱정 말라고 허허 웃곤 괜히 농담을 좀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이번엔 시루의 소식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사실 쪼끔 울었다. 아주 쪼끔.


내가 아빠에게 전화를 걸면 아빠의 핸드폰 화면엔 내 이름 대신 아빠의 희망, 이라는 글자가 빛난다. 나도 모르게 필살 계책이 담긴 비단 주머니를 만지작대고 있다 보면, 문득 내게 어울리지 않는 그 이름이 떠오르곤 한다. 지금의 나도 겪고 있지만, 변변치 않은 희망을 갖고 산다는 건 꽤나 힘든 일이다. 누군가의 희망이 되기엔 지금의 나는 너무 희미하다. 아빠의 희망, 이라기보단 아빠의 희망 고문, 이 어울릴 정도로.


이대로 쭉 그와 그녀의 속상함이나 희망 고문으로 남아 있을 바에는, 내가 없어져버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종종 한다. 적어도 이런 식으론 그들을 더 이상 힘들게 하지 못하도록. 내가 헤르미온느가 아니라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간단한 마법 한 번이면 그들에게서 나를 깔끔하게 도려내드릴 수도 있을 텐데.


누군가는 굳이 닻을 생각해볼 필요가 없는 삶을 산다. 누군가는 적당한 닻을 찾지 못하고 어느 날 본능을 역행해낸다. 누군가는 묵직한 닻을 내린 채 어떻게든 살아낸다. 그리고 누군가는 자신의 닻만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스스로 닻과 이어진 밧줄을 끊어낸다. 구명줄을 끊어낸 채 홀로 떠내려가거나, 자신을 살게 하던 것만이라도 지켜내 삶에 머물게 하고자 어쩌면 목숨을 건 한 판을 감행한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좋아한다. 읽다가 막 엉엉 운다.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읽었다. 주인공이 로봇이긴 했지만.


분명 나는 자주 그만둬버리고 싶다. 하지만 아직까진 그보다 더 자주, 살고 싶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눈앞을 가린 이 어스름이 낙조 끝이 아닌 일출 전의 것이라고 믿겨진다면, 나는 살고 싶어져버릴 거다. 그렇게 조금씩 나아져 결국엔 엄마의 자랑거리가, 그리고 아빠의 희망이 되어낼 수도 있을 테니까. 아마도 내 희망이 완전히 꺼져버렸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그만둬버리고 싶다는 생각보단 제발 살고 싶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더 자주 하게 될 것 같다. 그 뒤로는 뭐.. 나도 잘 모르겠다.


이거야 피자가 필요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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