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메의 문단속, 의 주인공 스즈메는 참 잘 뛴다. 그것이 산 중턱으로 이어진 오르막이든, 다소 흐릿하게 그려질 만큼 먼 거리든, 학생용 구두 정도를 신고선 목적지까지 정말 끊임없이 달린다. 리드미컬하게 지면을 박차는 그녀의 뜀박질을 보고 있으면, 왠지 달리기라는 것이 꽤 기분 좋은 일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평소 달리지 않는 인생을 지향하는 나로서도 오늘 저녁에는 나가서 좀 달려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스즈메가 문단속을 위해 달려온, 그리고 달려가야 할 경로가 종종 풀샷으로 비쳐질 때면, 아니 저길 달려왔다고? 아니 저기까지 달릴 거라고? 감탄하는 동시에 하마터면 깜빡 속을 뻔했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에서 저 멀리 보이는 뒷산까지 자전거로 주파 후 산등성이를 후지산 날다람쥐마냥 올라 폐허가 된 마을의 심장까지 다이렉트로 질주해내는 여고생.. 그런 여고생의 존재란, 즐거운 달리기만큼이나 영화적인 일이 아닐까. 이거야 수영만 없지 거의 트라이애슬론이 아닌가.
그건 그렇고, 나도 요즘 한창 달리고 있다. 스즈메마냥 여기저기 문단속을 하러 다니는 건 아니고, 헬스장에서 열심히 러닝머신 위를 뛰고 있는 것이다. 헬스장에 다시 등록한 건 꼭 네 달 만이다. 헬스장에 다니는 일은 요상한 게, 꽤 긴 기간 동안 습관처럼 꼬박꼬박 출석해나가다가도, 뭐 하루쯤이야, 에잇 이틀쯤이야, 라는 식으로 며칠 안 나가기 시작하면 또 아무렇지 않게 헬스와는 아득히 멀어진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몸이 좀 단단해진다 싶으면 몇 주 쉬어버리고, 또 좀 단단해진다 싶으면 몇 달 쉬어버리고.. 아무튼, 달리기 얘기를 좀 하자면.
몇 년 전이었던 것 같은데,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사람들이 너도나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묵묵히 새벽 공기를 가르는 러너도, 무리 지어 밤거리를 달리는 사람들도 자주 보였다. 나는 뭐야 왜 다들 정신 사납게 뛰어나기도 그래, 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다 달리기 예찬서를 한 권 읽고는 빌어먹을, 나는 지금껏 달리지도 않고 뭘 했던 거야, 라는 생각이 들어 급히 달리기 대열에 합류했다. 그렇게 이른 새벽 시간을 한 달 정도 달렸다. 처음엔 뛰는 내내 어우 뛰기 싫어, 라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저 아반떼가 나를 가볍게 쳐줬으면.. 누가 달리기를 법으로 금지해줬으면.. 같은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찰 만큼 달리기가 싫어졌다. 그래서 그만뒀다. 앞으로는 가능한 달리지 않는 인생을 살기로 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찾은 헬스장은 추웠다. 그것이 부쩍 쌀쌀해진 날씨 탓인지, 경기침체로 인한 난방비 절감 차원에서인지, 아니면 내가 이른 새벽 헬스장 문이 열리자마자 입장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동안 러닝머신을 이용한 적이 없었지만, 추위에 유난히 취약한 관계로 본격적인 운동에 앞서 러닝머신으로 땀을 내기로 했다.
그런데 뛰어보니 러닝머신이란 게 참 마음에 들었다. 러닝머신 위에선 딱히 신경 쓸 게 없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길거리의 신호 체계라든지, 피해 가야 할 각종 장애물, 그리고 무엇보다 저기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행인에게 어떡하면 좀 더 멋지게 보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처럼,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들에게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저 건너편 건물 옥상의 물탱크를 노려보며 무한히 생성되는 트랙 위를 퉁퉁 달리기만 하면 됐다. 나는 그런 것들을 신경 쓰기가 귀찮아서 달리기를 싫어했던 걸까. 어쩐지 남들을 달리면서 머리를 비운다는데, 나는 달릴 때마다 헛배가 부르듯 머리가 꽉 채워져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인간이 그런 것까지 귀찮아할 정도로 게을러도 되는 걸까. 어찌 됐든, 그렇게 러닝머신을 만나고 나서야 나는 달리기의 참맛을 알게 되었다.
나의 달리기란 대체로 이렇게 진행된다. 새벽 일찍 헬스장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곤 바로 러닝머신에 오른다. 스타트 버튼과 속도 항목의 9단계 버튼을 차례로 누르면, 발 밑의 벨트가 스르르륵 속도를 올리며 돌아간다. 시속 9킬로의 속도다. 이 속도가 어떤 수준인지는 모르겠다. 프리셋 버튼이 9단계까지 있길래, 사나이답게 9단계로 뛰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달리기 시작하면 몸 곳곳의 근육들과 가슴 속 심장의 존재가 새삼 느껴진다. 종아리 근육아 잘 있었니. 심장아 간밤에 별일 없었니.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영어 단어들을 외우며 한참을 달린다. 그러다 타이머를 보면 4분 정도가 지나 있다. 체감상 6분 정도는 찍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잔뜩 차오른 숨에 목이 멘다. 종아리는 새벽부터 왜 난리냐며 짜증을 낸다. 심장도 성질을 부리며 팡팡팡 뛰어댄다. 나 자신 또한 끊임없이 그만 뛰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단은 모르쇠로 일관하며 팔다리를 움직인다. 이 고통의 끝에 기분 좋은 쾌감이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궤도에 오를 때까지 모든 투정과 유혹을 무시해내는 일. 나는 그런 나의 절제력에, 이제 나도 어엿한 러너가 되었음을 실감한다.
투정의 소리들은 점차 잦아든다. 잔뜩 차올랐던 숨은 적당히 편해져가고, 근육과 심장도 서서히 자신의 업무에 몰입해간다. 출근 직후의 부산함이 사라진 오전 10시의 사무실처럼, 온몸엔 차분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그만 뛰고 싶다는 생각만큼은 아직 여전해서 나는 자주 시간을 들여다본다. 러닝머신의 굼뜬 타이머는 매번 남은 시간을 슬쩍슬쩍 올려대는 세탁기의 타이머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열받게 한다.
그러나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다. 타이머는 8분대를 향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이때가 되면 몸이 달리기에 완전히 적응해 있다. 가벼워진 다리는 자신만의 자아가 생긴 듯 알아서 지면을 박차고, 심장도 그저 묵묵히 뛰며 제 할 일에 몰두하고 있다. 나는 마치 아주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팀원들과 일할 때처럼(어이 종아리 그쪽 상황은 좀 어때? 어 뇌야 이쪽은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 신뢰에 기반한 어떤 든든함을 느낀다.
그렇게 시간이 9분대에 이르면, 나는 마침내 이대로 영원히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은 상태, 에 진입한다. 이것이 책에서 말한 러너스 하이, 라는 것일까. 몸속 어딘가에서 좋은 기분이 뿜어져나온다. 초반에 느껴지던 고통은 이제 거의 사라져 있다. 어느새 영어 단어가 멈춰 선 귓가에는 일정한 리듬의 뜀박질 소리만이 퉁퉁퉁 맴돈다. 고요한 머릿속에는 특별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뭔가를 떠올려보면 그 생각만이 선명히 둥둥 떠다닌다. 옥상 위의 물탱크를 노려본다. ㅇ0ㅇ 모양의 홈이 귀엽다. 귀엽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나는 무아지경의 상태로 바람 한 점 없는 진공 속을 질주한다.
타이머에 10분이 표시된다. 10분을 확인한 나는 단호히 정지 버튼을 누른다. 몇 시간이고 더 달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실제로 그럴 능력도 충분하다. 하지만 나는 각종 중독에 취약한 타입이기 때문에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다. 곧 눈도 내릴 거고 길도 미끄러워질 텐데, 달리기에 중독되어 괜히 여기저기 뛰어다녀서야 아무래도 위험하니까. 나는 이런 나의 절제력에, 다시금 어엿한 러너가 되었음을 실감한다. 겨우 10분 달리면서 무슨 러너라는 거야, 라고 비웃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편협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고 싶진 않다. 위대한 것들은 언제나 논리 저 너머에 있는 법이니까.
러닝머신이 스르르륵 속도를 낮춘다. 러닝머신의 속도는 왜 스르르륵 줄어드는가. 알 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초기의 러닝머신은 정지 버튼을 누르면 단박에 빡 멈췄다고 한다. 하지만 무아지경의 상태로 달리던 러너의 다리는 제때 멈추지 못했고, 그대로 러닝머신의 조작부와 충돌하거나 통유리를 깨고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위험천만한 일들이 자주 발생했다. 이에 당국은 러닝머신 제조 업체에 반드시 이 스르르륵 기능을 넣게 한 것이다. 사실 이것은 어제 뛰는 중에 지어낸 말이다. 미안합니다.
나는 스르르륵 속도가 줄어드는 붉은 여왕의 지옥 위에서 폴짝 뛰어내린다. 그리곤 잠시 숨을 고른 뒤, 무거운 것들을 들어대야 하는 또 다른 지옥으로 발걸음은 옮긴다.
아, 헬스 가기 싫다. 누구든 헬스를 법으로 금지해주세요. 남들 다 하는데 혼자 안 할 수도 없고, 정말 힘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