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숲이지영 Jan 23. 2021

제주 눈은 옆으로 내린다.

2021년 1월의 일기. 가는쇠고사리

숲에서 만난 사람들 : 눈길을 뚫고 온 손님 이야기


 1월 7일.
어린이집이 오랜 시간 휴원이라 늘 아홉 시 넘어서야 부스스 일어나던 아이들이다. 하얀 눈이 폭 쌓인 날 웬일인지 일곱 시 반부터 일어나서 부지런을 떤다. 엄마는 춥고 졸리다. 눈보라에 얼굴이 따갑지만 너무 예뻐진 숲 풍경에 추운지도 모른 채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하루를 보냈다.


1월 8일.
제법 눈이 쌓였다. 길가도 꽁꽁 얼었다. 손님이 하루 종일 네 명이었다. 손님이 오지 않는 매표소를 지키다 주차장 눈을 끌어다가 토토로 눈사람을 만들었다. 돌담 위를 가득 덮은 다육식물들이 살짝 걱정된다. 숲 야외 화장실 수도가 얼었다. 그럭저럭 둘째 날이 지났다.


1월  9일.
 뜯어진 한라봉 비닐하우스 틈 사이로 눈이 들이쳤다. 잠자다 일어나 무겁게 눈덩이를 짊어진 한라봉 나무들을 털어주었다. 장작을 가져다가 불을 피우며 새벽을 보냈다.
1월 10일.
 드디어 결항으로 멈추었던 택배업무가 시작되었다.  눈은 여전히 계속 내린다. 영상 1도로 올라가서 다행히도 얕은 눈은 녹기 시작했다. 무릎까지 쌓은 곳들은 완전히 녹으려면 며칠이 걸릴 듯하다.


  무엇이든 적당히가 좋은 법이다. 아이들도 셋째 날부터는 춥다며 밖에 나가지도 않았다. 눈이 가득 덮인 그 신기한 세상이 3일 만에 익숙한 풍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거기다 조금 더 맛이 들면 따겠다고 미뤄두었던 노지 귤을 생각하니 속상함이 더해진다. 곱이 곱이 넘겼 던 한 해 농사가 막바지에 이르러 하루 만에 망하기도 한다는 것이 허망하다. 자연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제주 폴폴 내리는 눈을 보기 힘들다. 하늘에서 차분하게 천천히 일직선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옆에서, 앞에서 바람 따라 뒤죽박죽 얼굴을 마구 때리며 그러게 휘몰아다고 할까? 따뜻한 남쪽나라라 서울처럼 손과 귀가 아린 차가움은 없다. 그러나 바람이 거센 날 눈이 오는 날은 다르다. 고요하고 따뜻하게 내리는 함박눈과 달리 어정쩡하게 녹았다가 우박처럼 꽁꽁 언 채로 내리는 눈 마주하면 제주의 겨울도 만만치 않음을 실감한다. 눈보라가 동반된 혹독한 겨울바람을 처음 겪는 이웃은 ‘블리자드’가 이런 건가 보다 느꼈다고 말했다.


  눈이 쌓이고 셋째 날의 이야기다. 이런 날 숲을 찾는 사람도 참 대단하다. 눈이 제법 많이 쌓여  길가에 오고 가는 차량도 없다. 지난 연말부터 5인 이상 집합 금지가 내려져서  구구절절 설명이 적힌 안내지와 귤을 선물하며 숲해설을 대체하고 있는 참이다. 숲해설도 진행되지 않고 코로나도 제법 심각한 상황이라 이달은 손님 자체가 뜸한데 눈까지 사정없이 내리니 오늘 같은 날 사람이 온다는 것 자체가 상상이 되지 않던 차였다.


  어기적 어기적 차량이 느릿하게 들어왔다. 젊은 청년 한 명이 카메라를 들고 내렸다. 눈보라가 세차고 숲해설도 없으니 다음에 오시길 추천드렸다. 하지만 그 청년은 눈 풍경이 궁금하여 일부러 찾아왔단다. 다행히 이전에 방문한 적이 있어서 눈 속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단다.


  '지금 같은 눈보라에는 숲도 컴컴하고 안 예쁠 텐데 이 추위에 사서 고생하려고 오셨구나'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럼에도 그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도 걷지 않는 눈길 속으로 저벅저벅 홀로 들어갔다. 두 시간쯤 흐른 후에야 청년은 아주 맑은 표정으로 나왔다. 숲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세 바퀴를 돌았단다. 그 말을 듣고 나도 숲 안으로 들어서 보았다. 눈꽃이 만발한 숲도 아름답지만 하얀 눈길이 햇살에 비춰 반짝거려서 눈이 부셨다. 그러고 보니 어느샌가 하늘도 파랗게 개어있었다.


  날씨가 화창해진 틈에 두 번째 손님이 들어왔다.


  스타킹에 단화를 신고 온 아가씨였다. 눈길에 발이 너무 추워 보여 여분으로 가져다 놓았던 내 털부츠를 빌려드렸다. 야무지게 삼각대를 옆구리에 끼면서 사진 찍을 때는 패션을 포기할 수 없다며 신고 온 단화까지 담아 들고 들어갔다.


   '잘 오셨답니다. 오늘은 사람들이 없어서 눈도 깨끗하고 숲 풍경도 너무 아름다워요. 사진이 무척 잘 나올 거예요.'라고 마음속으로 말하며 그 풍경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분이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먹구름이 몰려들고 다시 그 세찬 바람과 함께 딱딱한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30분쯤 지나서 아가씨가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숲에서 나왔다. 룰루랄라 들어가서는 겁먹은 표정으로 나왔다. 눈보라 헤치며 뚫고 나오느라 들고 간 단화는 신어보지도 못한 듯하다.



  똑같은 날, 같은 장소를 방문했는데도 이렇게 다른 숲을 느끼고 가는 둘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당연히 매서울 줄 알았던 길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산책코스가 되었고, 아름다울 줄만 알았던 길은 험난한 여정이 되었으니 말이다. 계절에 따라서, 날씨에 따라서, 방문한 시간대에 따라서도 숲의 모습은 시시각각 달라진다. 10년 동안 같은 장소를 매일  걷다 보니 이는 몸에 와 닿는 말이 되었다. 거기에 하나가 더 더해진 느낌이다. 10년 동안 같은 장소를 바라보아도 여전히 숲을 안다고 단정할 수 없구나.

   유난히도 추운 겨울이다. 코로나 때문에 지난 한 해 유독 특별히 이룬 것 없이 지나간 한 해였다. 무사히 넘기면 다행이었던 날들이다. 그렇게 우리는 또 한 살의 나이가 더해졌다.


  람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손을 잡고 게임을 하며 숲해설을 하던 때가 그리워진다. 앱을 활용한 숲해설도, 동영상으로 전달하는 숲해설도, 종이 소책자로 안내하는 숲해설도 준비는 해 두었지만 뭔가 아쉽다. 비대면으로 수업을 듣고, 회의를 나누고, 예배를 드리는 시대가 되었지만 직접 얼굴을 맞대고 나누는 대화를 오롯이 대체할 수 없듯이 말이다.


   작년 초에는 모두들 코로나라는 게 이러다 말겠지로 시작했는데 해가 넘어가도 답답한 상황이 이어졌다. 올해는 연초부터 암울한 전망들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닥치지 않고서는 모르는 법이지 않는가? 일상과 사람들과의 관계의 소중함을 더욱 느끼는 한 해로 다 같이 성장하며 회복하고 나아가는 2021년을 바라본다.



숲에서 만난 생명 : 가는쇠고사리


  곶자왈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고사리이다. 눈 속에서도 유난히 반질반질한 진초록 잎을 뽐내어 곶자왈 겨울 숲을 더욱 푸르게 느끼게끔 해주는 식물이다.


  고사리들은 참 비슷비슷하게 생겼는데 그 종류도 다양해서 어렵다. 바소꼴이다 깃꼴이다, 인편은 어떻고 엽병과 엽신은 어떻고, 삼회 우상 복엽으로 갈라지고 등등 그 모양새를 설명하는 말은 더욱 어렵다.


  식물의 학술적인 분류에 크게 중점을 두지 않는다면 곶자왈 숲에서 큰 삼각형 모양새에 신사들이 입는 연미복처럼 밑으로 꼬랑지 두 개가 툭 튀어나와 있는 모습의 고사리가 보인다면 가는쇠고사리겠구나 생각하면 얼추 맞을 것이다.

  옹기종기 모여서 군락을 이루며 살아가기에 사실 가는쇠고사리는 따로 찾을 필요도 없다. 곶자왈 숲에서만큼은 가는쇠고사리를 보는 일보다 보지 않는 일이 더욱 어려울 만큼이나 많은 면적을 차지하며 자라고 있으니 말이다.


  이 친구는 속명이 아라크니오데스이다. '거미줄 같은'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땅 속에서 줄기 뿌리가 거미줄처럼 뻗어나가 한 잎씩 땅 위로 낸 형상이다. 그렇기에 촘촘하게 얽혀있는 그물 같은 뿌리에서 나온 잎들이 지표면을 가득 덮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모습이 완전한 한 개체인 듯 하지만 알고 보면 한 잎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표본채집을 위해 하나를 잡고 조심조심 죽 당겨보았다가 다른 잎들과 끝도 없이 연결되어있어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작가의 이전글 96세 멋쟁이 할머니를 만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