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에서 부산찍고 뉴욕까지
"제 짐 오고 있나요?"
한 달이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던 이삿짐이 40일이 넘어가도 소식이 없어 업체에 메일을 보냈다. 정상적으로 이동 중인지 문의하자 부산항에서 10일이상 출발이 지연되어 50일을 넘길 것 같단다. 이런. 미국 통관 절차에 추가로 2주는 더 걸린다니 초조해졌다. 한국에서 가져온 수분크림이 바닥을 보이고, 밑반찬이 늘어 그릇 수가 모자라고, 급 추워진 날씨에 가진 중 제일 길고 두꺼운 옷을 골라 두겹 씩 입고 지내는 요즘이었다.
"통관 마치는 대로 가능한 빨리 보내주세요 흑흑 너무 추워요"
"네 고객님 입항하는 이삿짐 중 제일 빨리 보내드릴게요!"
말 뿐이든 아니든 역시 한국 서비스는 최고. 그치만 이렇게 오래 걸리다니 겨울옷과 가재도구 위주로 보냈기에 망정이지 가구는 안보내길 정말 잘했다. 한국에서 욕심부려 식탁에 매트리스, 소파, 책상까지 싹 다 보냈으면 여태껏 아무것도 못 사고 오매불망 짐만 기다리다 한달 반을 너무 피곤하게 살 뻔! 이라고 곱씹지만 월요일 아침부터 집으로 쳐들어오는? 거대한 이삿짐 박스들을 보고 있자니 그렇게 조금 보낸 것도 아니었구만 싶다. 반가운 마음 절반, 이걸 또 언제 다 정리하나 머리 아픔 반. 사실 웬만한 가구는 미국에 오자마자 다 새로 샀기에 옷 빼고는 이미 그럭저럭 살만하게 갖춰진 상태였던지라 더.
여기까지 집 채우는데도 별 일 다 있었지
미국 도착 5일 만에 인터넷으로 Wayfair에서 Sealy 매트리스를 주문했다. 상품설명에 프로모션으로 box spring을 포함하고 있다길래 그게 뭔데? 대강 매트리스 바닥에 까는거겠거니 생각했다. 침대 프레임 대용인 줄은 전혀 몰랐지. 남편이 box가 같이 오면 카펫 위에 매트리스를 바로 올려 써도 된다기에 "잉? 난 카펫 위엔 아무것도 직접 올리지 않을거야" 청결 어쩌구 요란을 떨며 콧방귀를 날렸다.
침대 프레임을 따로 주문해 조립을 마쳐놓고 얌전히 매트리스를 기다렸다. 마침내 3주 뒤, 건장한 흑인 두명이 매트리스를 들고 집에 오긴 했는데 그런데..
아니 좀. 너무 높았다. 당황스러웠다. 친구들한테 사진을 보내주자 비웃음이 돌아왔다. "리타, 나 원래 저런 높은 침대 좋아하는데 저건 좀 심각하게 높네" 내가 만들어 둔 작품 앞에 할 말이 없다. 나 정말 프레임 왜 산거니? 이미 충분히 튼튼하고 견고한 box spring인데 허접한 철제 프레임 위에 올라가 있으니 괴상하기 짝이없다. 자다 떨어지면 리얼 부상 각. 급 안데르센 동화집 속 <공주와 완두콩> 얘기가 떠올랐다. 본인이 공주임을 증명하기 위해 자면서 완두콩 한 알도 놓치지 않는 예민함과 섬세함을 보여준 공주 이야기.
침대 위에 올린 완두콩 위로 두꺼운 담요 열장, 솜이불 아홉장, 깃털이불 여덟장, 다시 담요 일곱장을 깔아 재워도 밤새 허리가 배겨 한숨도 못잤다며 긴 하품을 내뱉었다던 공주 이야기. 그 반응에 저 아이는 진짜 공주구나 여왕이 테스트 통과 시켜줬다고. 내 앞에 놓여진 매트리스와 박스스프링, 침대프레임 3박자 조합은 동화 속 공주의 고층침대나 다름없었다. 근데 난 완두콩 같은 거 없어도 그냥 무서워서 자다 깨겠어.
남편이 고것봐라 너 내가 몇번을 말했니 라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아내는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니까 내 말이 안들렸겠지" 나였으면 고집은 다 부려놓고 침대를 저렇게 만들었다고 볼멘소리 폭탄이 나갔을텐데, 정말 딱 한마디만 하고 끝내는 천사같은 나의 그.. 그래서 더 민망했다. "아니 나는 진짜 이런 건 줄 모르고.." 중언부언 말을 늘어놓으며 어쨋든 재빠르게 환불했다는 (이 때 익힌 온라인 환불절차를 매우 잘써먹고 있다) 우리집 침대의 슬픈 전설. 새로 장만한 모든 가구에 사연이 하나씩 있다. TV거치대 조립하다가 앓아 누운 남편, 식탁 주문해놓고 하루에 열번 씩 환불고민 했던 나의 진상행위 (아마존에 환불 신청해놓고 철회하고 또 환불 신청하고 다시 철회하고.. 판매자가 어서 마음의 결정을 내려달라고 두번이나 메일을 보냈다), DIY의 천국답게 엄청난 패키지 기술을 선보인 소파 포장을 풀다가 여기저기서 조립부품이 튀어나와 놀라 자빠졌던 요상한 경험기까지.
한국에서 짐이 오니 집이 더 친숙하네!
어쨋든 이제 혹한도 두렵지 않을 코트와 패딩, 좋아하는 책과 가방, 아끼는 주방살림과 그릇들, 미국에서도 결혼한 증거는 필요할 것 같아(왜?) 챙겨온 결혼사진까지 집이 아주 빵빵하게 채워졌다. 하루종일 짐만 풀은 것 같아! 옷 정리는 아직도 할 일이 태산. 그래도 22개 박스를 뜯어내는 과정에서 살짝 성가셨던 첫 마음은 사라지고 반가움에 연신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이 것도 챙겼었다니 난 천재얌"
신혼집 물건 자체가 연식이 얼마 안됏거니와 그 중에서도 쓸만하고 예쁜 아이들을 고르고 골라 엄선해 데려왔기 때문에 박스 하나하나를 뜯고 종이 포장을 벗길 때마다 선물을 끄르는 기분이었다. 열어 젖힐 때 마다 탄성을 질렀다. 햐 이 그릇! 이 액자! 이 사진! 이 스탠드! 새 수건세트와 부드러운 면기모의 도톰한 겨울잠옷들, 아끼는 그릇 냄비와 집기세트, 생선 뒤집개, 감자칼과 생강필러까지. 팍팍한 타향살이에 한국에서 양껏 돈을 써재끼며 사모았던 갖은 용품들이, 한국에선 정작 집안에 쌓여만 있던 물건들이 미국에 와서 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요리도 자주 안하면서 뭘 이렇게 열심히 사다 모았을까..
게다가 한국에서 산 물건들은 하나같이 어쩜 이렇게 너끈하고 튼튼하고 완성도가 높은지. 월마트에서 집어온 것들과 비교하면 철제 선반이나 책꽂이 하나도 퀄리티가 다르다. 이 와중에 화장품은 앞으로도 2년은 족히 쓰겠네! 대체 유통기한도 짧은 것들을 뭐이리 바리바리 싸온건지, 그 한 켠에 같이 쌓여 날아온 각종 영양제는 또 무진장 반갑고 아니 내가 이것도 챙겼었나 저것도 챙겼었나 산타가 한꾸러미 보물을 주고 간 듯 하루종일 몹시 흥분상태였다.
깨끗이 세탁 된 여름겨울 이불세트, 독일에서 직구한 내사랑 전기요, 밤새 가동되는 히터에 목이 부어있던 차 만난 가습기, 커피매니아인 남편이 꽁꽁 챙겨둔 원두그라인더와 모카포트, 챙긴 기억이 전혀 없던 보온물주머니 파쉬까지! 신혼집에서 쓰던 방석도 모조리 태평양을 건너와 소파에 세개, 식탁에 두개 올리니 나이스~! 드드득 버튼을 돌려키는 미국식 전등이 불편하던 찰나, 한국에서 쓰던 led스탠드까지 자리를 잡고 빛을 발하니 익숙한 조도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상자 꽉꽉 채워 도착한 남편 전공서적들도 반갑다. 해외이사는 무게보다 부피 기준으로 볼륨을 매기기에 대형 가구를 포기한 대신 무거운 책들을 넉넉히 가져왔더니 (심지어 아령까지) 아주 든든하다. 유용하..겠지? 유용해야 해. 거실을 한가득 채운 뜯어버린 포장재와 튼튼한 빈 박스들은 언젠가 또 요긴하게 쓸 날이 올 것 같아 지하창고에 모두 쟁여두었다. 이 곳에선 작은 물건 하나도 너무 소중하고 호옥시~를 대비해 정말 아무 것도 버릴 수가 없다.
이렇게, 미국에서만큼은, 반드시, 꼬옥
미니멀라이프를 하겠다는 내 다짐은 입성 한달 반만한게 아주 무색해졌고.. 나는 또 맥시멀라이프에 도달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