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 반 스푼, 감성 메다꽂기
남편은 취미가 없다. 학창시절 축구하기를 좋아했더라는 내가 확인할 수 없는 과거를 빼면 제대로 된 취미생활 여가 갖는 걸 본 적이 없다. 유행에도 관심 없고 게임도 안한다. 가끔 핸드폰으로 축구 하이라이트 보는 것만 빼면 TV도 잘 안본다. 진짜 책만 본다. 고3 때도 잠 안자고 책 보고 공부만 해서 시어머니가 건강 해칠까 염려하셨는데, 그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을 어디 하소연도 못하셨단다. 배부른 수험생 엄마의 잘난 척 같은 푸념으로 여겨질테니. 이 쯤 되면 어디 내놔도 신경 안 쓰이는 세상 반듯한 남자 같지만 그가 책 말고도 좋아하는 게 있긴 있다.
술.
술 엄청 좋아한다. 소주 맥주 양주 가리지 않고 안주도 따지지 않고 그냥 알콜이면 다아 땡큐인 애주가시다. 혼자서도 잘 먹고 가끔 집 앞에 친구 하나, 많으면 둘, 소탈하게 모여 대탈하게 마신다. 술은 참 빠른 시간에 빨리, 많이 먹는다.
술.
나도 좋아한다. 20대 때부터 친구들한테 말했다.
"난 술 잘 먹는 사람이 좋아. 미래의 내 남편은 하루를 마감하며 캔맥주 몇 개 정도는 같이 딸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
남편과 소개팅 전 주선자 친구가 말했다.
"오빠 술 완전 좋아해. 2,000cc를 200cc처럼 먹는 남자니 네 맘에 들거야."
그래 잘먹더라 정말 술. 근데 결혼하고 남편이 너무 먹으니 나는 좀 싫어졌다 술. 내가 질릴 정도로 그는 그렇게나 좋아한다 술.
남편은 음악도 잘 듣지 않았다. 음악을 들으면 상념에 빠지는 기분이 싫단다. 로맨스 사랑 슬픈얘기 영화 드라마도 안본다. 필요없는 곳에 감정 쓰는 건 소모적인 일이란다. 패션에도 관심이 없는 그는 옷장에 채워 넣은 새옷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거의 단벌신사로 지내며 매일 책을 보고, 공부를 하고, 가끔 술을 마셨다. 이 것 좀 입어보라 해도 관심이 없고 (원하지 않는 변화가 싫단다) 이 프로 좀 보라고 해도 보는둥 마는둥 TV 앞에 책을 들고 나오거나, 얼척없는 드라마 설정에 일침을 가하며 내 몰입까지 망쳤다. 이런식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 치료를 받다 안타깝게 죽은 환자 영정사진이 나온다.
"죽은 사람 영정 얼굴로 한 번 등장하는 저 배우는 무슨 죄니."
- 소아과 의사 정원이 학대받은 아이의 진료를 보는 장면
"저렇게 어린 애들이 아픈 연기 해야하는 거 좀 그렇다."
요즘 내가 정주행 중인 <응답하라 1988>
- 보라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선우를 보며
"쟤 이제 고삼 아냐? 정말 큰~일 날 얘기다~~"
-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보라, 선우에게 이별을 고하자
"이제야 속이 좀 편하다. 둘 다 고시생에 고삼인데 저게 맞지."
정말이지 드라마를 다큐로 보는 자... 이 자와 함께면 아름다운 멜로와 감성 말랑한 연애스토리도 급작스럽게 끼얹는 현실 물벼락 찬바람 맞고 어안이 벙벙해진다. 미국에 오고 나는 넷플릭스며 유튜브 시청이 늘었다. 같이 TV 좀 재밌게 보고 웃긴 것도 슬픈 것도 감동적인 것도 함께 보고 싶은데 내 맘처럼 안되자 심심해졌다. 그를 TV세계에 끌어들이기 위해 소소한 작전을 짰다.
우선 <비밀의 숲> <미생> 같이 러브라인 없고 깔끔한 국내 드라마 명작 몇개를 골라 일단 튼다. 중요한 설정과 등장인물 특징 소개는 1화에 다 나온다. 남편은 낯선 새 프로그램에 시선을 주지 않고 스쳐 간다. 줄거리 이해에 필수적인 장면이 나오면 나는 몰래 뒤로가기 버튼을 눌러 15초씩 자꾸 장면을 돌린다. 관심없는 남편은 화면이 되감겼는지도 모른다. 헌데 어쩐지 같은 대사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듯 하자,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TV를 한 번 쳐다본다. 휴 다행. 꼭 봐야 되는 부분 하나 봤다... 나는 안도하며 처음보는 척 "아~ 조승우가 감정을 못느끼는 검사로 나오나봐" 한마디 더해 내용 파악에 자연스럽게 숟갈을 올리고 쐐기를 박는다. 남편 본인은 TV를 안보고 있다 여기지만 어느샌가 드라마 줄거리를 조금씩 이해하고 있다.
무심하게 틀어놓은 척 했으나, 사실 그가 화장실을 가거나 거실을 지나 갈 때 재빨리 최고로 흥미진진한 (부부의세계 이경영 집 식탁신 같은) 장면을 돌려놓고 몰입하는 척 했다. 배우들의 내공이 폭발하는 열연 가득한 TV소리에 남편은 어느새 엉덩이를 붙이고 소파 귀퉁이에 자리를 잡는다.
"헐. 이제 이경영도 여다경이 유부남이랑 바람피는 줄 안거야?"
"헐. 영은수가 박무성을 죽인 범인인거야?"
고렇지 고렇지. 나는 이미 뒷부분 먼저 다아 봤지만 "몰라몰라. 대박. 이게 무슨 상황이래" 외치며 남편의 몰입을 유도하고 그는 그렇게 점점 TV에 빠져든다. 움하하 미션 석세스! 이제 쉴 때면 나보다 먼저 TV 보자고 말한다.
그렇게 미국 있는 8개월 간 <비밀의숲> <미생> <미스터션샤인> <슬기로운감빵생활> 등 웰메이드 드라마 몇 개 주행을 함께 마쳤다. 여전히 중간중간 메일 확인도 하고, TV 옆에서 책장도 자주 뒤적거리는 남편이기에 나는 15초 감기 버튼을 몰래몰래 눌러가며 "장그래만 계약직으로 뽑힌건가봐!", "애기씨가 위험해!!!" 소리치고 연기해 그의 환기를 유도하고 있는데, 남편도 한 번 발을 들인 후라 요런 작전은 아주 잘 먹히고 있다. 책을 뒤적이다가 호다닥 시선을 돌리며 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됐다고?"
유투브 처럼 짧은 호흡 영상은 내가 먼저 재밌게 본 것 모아 클립처리 해두고, 남편 앞에 처음 보는 척 틀어두면 그는 금세 또 몰입한다. 그리곤 묻는다. "왜 너랑 볼 때만 재밌는게 나와?" 푸하하. TV는 나랑 봐야 재밌다는데 당연하지. 나는 저 땜에 똑같은 부분만 세 번을 보는데.
TV 함께보기 순기능
- 말 그대로 맥주 2,000cc 를 200cc처럼 먹던 남편의 술이 줄었고 (예전에는 쉴 때면 맥주 생각이 먼저 났던 듯 한데 요즘엔 소파에 앉아 리모콘을 찾는다)
- 빡빡한 남편 정신에 웰메이드 프로그램이 말랑한 환기가 좀 되는 듯 하며
- 집 밖에 못나가는 시국에 드라마 보고 둘이 평론하고 흉내내고 꽁냥거리는 수다도 늘었고!
- 화면 속 각 종 유행어를 밥 먹고 잠 잘 때 우리만의 애드립으로 진화해 둘 사이 각종 황당무계한 개그도 늘었다. 난 이 개그가 너무 좋다.
이제 좀 알겠다. 어떻게 남편을 대해야 하는지. 내 남편을 위한 사용자경험 설계법을.
TV는 흥미로운 부분 위주로 틀어놓고 계속 리액션하며 주변에서 얼쩡대면 줄거리 쫓아온다. 오래 된 신발 계속 신는게 싫으면 잔소리 할 것이 아니라 신발장에 감춰두고 깔끔한 것 눈 앞에 꺼내놓으면 보이는 거 신는다. 멋부리는 것에 돈 쓰는 취미에 큰 관심이 없으니 정말 훌륭한 남편이다. 노래 듣는 것도 시끄럽고 싫다더니 요즘 튼 척 안튼 척 거실에 은은하게 클래식을 틀어놓으면 안자던 낮잠도 스르륵 갑자기 꿀잠 잘잔다. 그럴 땐 좀 귀엽다. 남자들이 이렇게 쉽다. 우리 남편이 이렇게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