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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an 13. 2024

올해도 ‘써야겠다’는 다짐

진심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기 위하여

며칠 전, 무엇이든 쓰고야 말겠다는 다짐으로 노트북을 켰다. 하루종일 이어지지 않는 문장들을 붙잡고 씨름을 했다. 떠오르는 소재와 단상은 많은데 하나의 글로 엮이지가 않았다. 상관없는 주제들이 같은 문단 안에서 얽히고설켰다. 정말 쓰고 싶은 게 무엇인지 나조차 알 수가 없었다. 맥락 없는 활자들이 태풍에 휩쓸려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다. 엉망진창이었다. 쓰던 글을 모두 지우고 글쓰기 창을 닫았다.




한때 글쓰기는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음식처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살려면 써야 했다. 그때 쓴다는 것은 소재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는 행위라기보단 내 안에 겹겹이 쌓인 독을 정화하는 일에 가까웠다.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는 기억과 감정을 토해내기 위해 활자가 필요했다.


6년간 잘 썼던 30만 원짜리 넷북.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글이었는데도 얼마나 많이 지우며 썼던지, 백스페이스 키가 고장 나버렸다. / ⓒ2024. 안녕(Photograph)


글이 절박함에서 취미로 옮겨간 것은, 감정을 쌓아두고 스스로를 갉아먹던 나쁜 습관이 글쓰기를 통해 치유되고 난 이후부터였다. 그렇게 쓰기는 필수가 아닌 선택의 영역이 되었다.


‘쓰고 싶은 글’은 ‘써야 하는 글’결도, 모양도, 방향도 달랐다.  ‘써야 하는 글’이 절망으로부터의 구원이자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글이었다면 ‘쓰고 싶은 글’은 누군가에게 읽히고 공감받길 원했다. 물론 그 후에도 쓰고 싶은 게 아니라 ‘써야 한다’는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든다는 건. 비워야 할 무언가가, 혹은 반드시 알아내야 할 무언가가 내 안에 있다는 뜻이었다.


그럴 때마다 쓴다는 것은 무섭도록 떨리는 일이었다. 마음속에 숨겨두고 싶은 것들은 대개 아름답지 않은 법이니까. 글 속에서 자기기만을 마주치는 것만큼이나 두렵고 불쾌한 일은 없다. 그것들은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활자의 무덤이 되어 깊숙한 곳에 버려졌다. 대신 누가 읽어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정제된 텍스트만이 사람들 앞에 선보일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삶과 사회가 기대하는 삶이 다를 때. 숨기고 싶은 민낯과 내보이는 가면의 간극이 클 때. 마음은 말할 수 없이 복잡해진다. 그럴 때면 정신을 산만하게 만드는 잡다한 일상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늦잠을 자고, 사람들과 수다를 떨고, 맛집을 검색하고, 드라마를 보고, 관심도 없는 연예인 기사를 읽고, 눈꺼풀이 감길 때까지 유튜브를 시청했다. 고요히 내면을 들여다볼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 불편한 진실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진실과 현실세계의 선택은 대개 어긋나기 마련이어서 둘 사이에 주어진 선택지는 그리 많지가 않다. 진실을 눈 감고 현실을 살아가던가. 현실세계와 투쟁하며 진실을 좇아야 한다.


진실, 혹은 진심을 좇기 위한 투쟁에는 엄청난 용기와 에너지가 필요하다. 자신뿐 아니라 연결된 사람들의 일상을 뒤흔들고,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원하는 삶이라는 진실은 묻어두고, 사회가 가르쳐 준 의무와 역할을 해내려고 애쓰는 어른들이 많은  그 때문일 것이다. 가족과 사회를 위해 헌신하고 기여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모두에게 필요한 존재이자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 나다움이라고 생각했던 일부를 버려서라도 말이다.


나는 오랫동안 그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왔다. 더 믿음직한 가족의 구성원이 되는 것과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여정 사이에서.


가족에게 더 많은 돌봄과 사랑을 베풀려면 내가 가진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곤 했다.  ‘나다움’과 ‘좋은 엄마’ 사이에서 무언가를 선택해야만 할 때, 나는 언제나 패배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다움을 선택하면 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하는 것 같아 미안했고, 좋은 엄마가 되려고 애쓰면 나를 잃어가는 것 같아 괴로웠다. 어떤 쪽을 선택해도 나는 승리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어렸던 시절. 나는 사랑을 듬뿍 주는 좋은 엄마도 되지 못했으면서 나를 잃어간다는 느낌 때문에 힘들어했다. / ⓒ2024. 안녕(Drawing)



지금처럼 마음이 혼란으로 가득한 것은 내가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신호라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맥락 없는 글뭉치를 헤매다 돌아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심연으로 향하는 길이 어지럽도록 일상의 부스러기들을 내면에 뿌려두고, 장애물 앞에서 돌아서도록 자신을 기만한 이유.


나에겐 ‘나조차 내 마음을 모르겠다.’는 결론이 필요했다. 나를 위해 그 어떤 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진심이, 함부로 드러나면 안 되겠기에.




지금 내게는 두 개의 길이 놓여 있다.


하나는 취업을 하고 고정적인 월급을 받으면서 남편이 짊어진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나누는 것이다. 무엇보다 남편이 원하는 일이고, 나도 각오했던 바다.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 아마 지금보다 더 가족에게 책임감 있는 부모이자 배우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에 진학한 두 아이와 집 한 채 없는 우리 형편을 생각하면 여전히 빠듯한 살림이겠지만 분명 더 나은 조건에서 아이들 뒷바라지와 노후 준비가 가능할 것이다.


대신 작년처럼 대학원 공부를 병행하면서 작업실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경기도 외곽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면서 대학원까지 다닌다는 건 그렇잖아도 체력이 약한 내 몸을 너무 혹사시키는 일일테니. 직장을 다니느라 머물 시간도 많지 않은 작업실을 유지하느라 비용을 지출하는 것도 낭비에 가깝다. 만약 작업실을 본가와 분리된 개인 공간으로서 유지한다면 그곳에서 먹고 자며 직장을 다니느라 주말 부부처럼 지내야 할 것이고, 이건 결코 남편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또 다른 길은 지금처럼 4대 보험과 경력이 인정되지 않는 불규칙적이고 적은 소득의 프리랜서 일을 지속하는 것이다.  읽고, 쓰고, 공부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원하는 일을 하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적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 언제 일이 들어올지 알 수 없는 막막함과 불안을 견뎌야 한다. 고정수입을 포기한다는 건 미래를 위한 경제적 준비 또한 녹록지 않으며 아이들을 지원할 수 있는 기회도 줄어든다는 걸 의미한다. 경제적으로 든든한 엄마이자 배우자는 되지 못할 테지만, 내가 원하는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데 유리한 환경을 유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어디를 향해 걸어가야 할까. 이럴 때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지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acs), 『소설의 이론』(Die Theorie Des Romans, 1916) 중에서/ ⓒ2024. 안녕(Photopraph)


두 개의 갈래길 앞. 나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는 듯 말한다.


“이제 4대 보험 되는 일자리 알아봐야죠.”


철든 인간은 무엇을 해서라도 가족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니까. 배운 것 없고 가난했던 우리 부모님이 여섯이나 되는 자식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평생 노동했듯이, 나도 그렇게 살아야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막상 그런 선택의 순간이 다가올 때마다 나는 뒷걸음질치곤 했다. 같이 일해보고 싶다는 스카우트 제의를 뿌리치고, 매일같이 채용공고 사이트를 살피면서도 이력서는 쓰지 않았다. 말로는 취업을 이야기하면서 매번 이런저런 핑계를 늘어놓았다. 아이들이 어려서, 마을카페를 운영해야 해서, 대학원 과정이 끝나지 않아서, 건강이 좋지 않아서, 거리가 멀어서, 월급이 많지 않아서, 경력이 없어서, 나이가 많아서.


나도 안다. 그 많은 핑계들은 취업을 피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 아이들은 다 컸고, 마을카페는 문을 닫았다. 거리가 멀어도 출퇴근하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으며 요즘같은 취업난과 불경기에 월급의 많고 적음을 따지는 건 사치에 가깝다. 그럼에도 책임감 있는 부모이자 배우자가 되고 싶은 욕망과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고 싶은 욕망이 충돌할 때마다 나는 외줄을 탄 듯 허공에서 휘청거린다. 안정적인 월급을 부러워하면서도 자유를 빼앗긴 대가에 길들여질까 두려워하고, 아이들에게 더 많은 교육의 기회를 주지 못한 것을 경쟁으로 내몰고 싶지 않았던 가치관으로 합리화한다. 제대로 된 보험이나 예금통장 하나 없는 것을 무능이 아닌 자본의 노예로 살지 않았다는 증명처럼 여기면서. 나는 의심한다. 이런 성찰이 진심을 숨긴 것에 대해 면죄부를 주려는 또 다른 자기기만은 아닐까 하고.


이렇게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는 건, 비겁하게 숨어 있는 나를 끄집어내기 위해서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덜 비겁해질 수 있으니까.


Hermann Hesse, 『데미안』(Demian: Die Geschichte von Emil Sinclairs Jugend, 1919)중에서/ ⓒ2024. 안녕(Drawing)




어디로 걸음을 향해야 좋은 선택인지 혼란스러울 때. 나는 써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쓴다는 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자신만이 구할 수 있는 답이니까. 내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누가 알려줄 수 있겠는가. 존재의 서사를 거름 삼아 지도를 그려갈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다.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써야만 하는 것이다.


 ‘쓰고 싶다’는 바람대신, 올해도 ‘써야겠다’고 다짐하는 건 그 때문이다.



다짐     


숨을 들이마시고 뱉을 때 더 이상 숫자는 세지 말 것

구름이 없는 날에는 자신과의 논쟁을 금지할 것

흐릿해진 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울의 증발

태양이 뜨면 커튼을 젖히고 별이 다가올 땐 창문을 열어 둘 것

싹이 난 감자는 잎을 피울 때까지 기다려줄 것

등이 시린 밤에는 아이를 그러안고 머리가 뜨거운 주말에는 외투를 벗어버릴 것

눈물이 날 때는 찻물을 끓이고 바람을 관찰할 것

상상은 기록으로 남기되 손가락에 굳은 기억은 칼끝으로 도려낼 것

사랑하는 단어들을 재배열하는 시간

담요를 덮고 창백한 커서를 두드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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