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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Apr 01. 2024

책상 없는 방이면 어떠한가

아무래도 괜찮다

출장을 오가는 4주 동안 세 곳의 숙소에 머물렀다. 초반에는 현장사무소에서 근무하는 여직원의 투룸 빌라에서 일주일 넘게 신세를 졌고, 중간에 이틀은 읍내 모텔에 투숙했다. 그리고 마지막 2주는 읍내에서 멀지 않은 오래된 아파트에서 지냈다.


아파트는 다음 달부터 일을 시작하는 현장사무소 직원이 미리 계약한 숙소였는데,  임차인이 이사를 나가는 날과 직원이 입주하는 날 사이에 발생한 공실 기간이 길어 머물게 되었다. 우리 회사 숙소를 내어준 직원에상품권을 지급하는데, 회사는 출장비를 아끼고 직원은 상품권을 받으니 둘 다 윈윈 하는 거래인 셈이다. 이런 방식이 가능한 것은 우리 회사가 사회적 가치를 지향하는 협동조합이기 때문이다. 직원 대부분이 조합원인 데다 활동가 정체성을 기반으로 일하다 보니 서로의 자원을 공유하고 협력하는 일이 익숙한 편이다. 


물론 내 입장에선 모텔을 이용하는 편이 좋았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아파트에 비하면 넓은 침대와 작은 테이블, 의자, 큰 거울이 붙은 화장대, 간식을 넣어둘 수 있는 냉장고와 전기포트까지. 필요한 건 다 있는 데다 외출 후 방을 청소해 주는 서비스까지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바닥에 보일러도 들어오고 침대에 전기장판도 구비되어 있는 보기 드문 숙소라 집에서보다 더 따뜻하게 잠들 수 있었다. 


게다가 냉장고에 생수 들어있지. 로비에 내려가면 커피머신이랑 얼음정수기도 있지. 전자레인지 있지. 혼자 지내니까 욕실에서 대충 입고 나와도 되지. 비용만 아니라면 숙소로서 최적의 조건이었다. 이렇게 좋은 숙소에서 이틀밖에 못 지낸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깔끔하기로 소문난 고흥 읍내 모텔. 당일 저녁엔 거의 만실이라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전날 늦은 밤에 전화로 예약해서 머물 수 있었다.


출장 3주 차부터 머문 아파트는 1990년대 후반에 지어진 10평대의 주공아파트였다. 주말에 세입자가 이사를 나간 직후여서 잠을 자려면 청소부터 해야 했다. 마스터플랜 수립을 위해 함께 출장을 내려온 총괄기술자와 선임연구원이 청소를 돕기로 해서 퇴근 후 함께 청소도구와 쓰레기봉투를 사들고 아파트로 향했다.


오래된 아파트라 걱정했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예상보다는 깔끔했다. 현관 입구의 작은 방은 붙박이장이 달려 있어 짐을 부리거나 손님용으로 쓰기 좋아 보였고, 거실에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는 큰방은 넓고 훤했다. 근처에 편의점도 두 개나 있고 현장사무소로 들어갈 때 버스를 타는 정류장이 가까워 위치도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구역을 나누어 청소를 시작했다. 총괄기술자인 P선생님은 거실과 작은방을 담당하고, 선임연구원인 H박사님은 큰방 청소를, 나는 욕실을 맡았다. 비용을 아끼자고 이삿짐 빠진 아파트를 직접 청소하고 자는 것이 썩 내키진 않았는데, 프로젝트의 총지휘를 맡은 총괄기술자 선생님을 비롯해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H박사님이 걸레로 열심히 방을 닦는 모습을 보니 청소솔을 쥔 내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나는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렸다. 맨발로 슬리퍼를 신고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세제를 뿌렸다. 솔로 있는 힘껏 문지른 다음 샤워기로 물을 뿌렸다. 쏴아아 아 뿜어져 나오는 물소리가 상쾌했다. 세면대와 바닥, 변기도 솔로 청소한 다음 거울과 수납장에 묻은 먼지와 얼룩도 깨끗이 닦아냈다. 다른 직원이 마련해 준 수건 세 장을 개어 수납장에 정리하고 마트에서 사 온 휴지까지 욕실에 비치하니 청소가 끝났다. 여럿이 손을 보태어 청소를 했더니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직접 청소를 해서일까. 처음과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  집과 조금 익숙해진 기분이 들었다. 겨우 욕실 청소를 했을 뿐이지만 내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 공간이니까.  당분간 잘 부탁한다는 악수를 힘차게 건넨 느낌이었다.




다른 직원이 챙겨 준 분홍색 이불과 집에서 갖고 내려간 베개가 전부인 방. 옷걸이가 없어서 베란다 에 점퍼를 걸어야 하고, 테이블대신 캐리어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아야 하는 휑한 공간에서 여러 밤을 보냈다. 이상했다. 숙소가 열악하다는 생각이 날이 갈수록 희미해졌다. 관리하고 유지하는데 신경 쓸 것이 없는 방에 들어설 때마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사는데 그렇게 많은 물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현장사무소 소장님이 작은 찻상과 방석을 갖다 주었을 땐 호사를 누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작은 찻상과 방석만으로도 한결 삶이 풍요로워진 느낌


이곳에서 가끔 작업실을 떠올리곤 했다.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실 때면 하얀 커튼 너머로 들어오던 햇볕과 노란색 체크무늬 커튼이 달린 아늑한 침실, 다 읽지 못한 책들이 가득한 책장과 귓가에 울리던 음악. 기다란 테이블에 사람들과 둘러앉아 함께 차를 마시거나 담소를 나누던 순간들. 때론 내게 그런 공간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도. 그럴 때면 나는 텅 빈 공간에 있으면서도 꽉  느낌이 들었다.


작업실을 얻은 후론 자주 그랬다. 여행을 가지 않아도. 굳이 맛집을 가지 않아도. 아무래도 괜찮았다. 딱히 가고 싶은 곳도, 사고 싶은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랫동안 꿈꾸었던 공간을 얻어서인지 다른 욕심이 생겨나지 않았다. 소유에 대해서도 얼마간 초연해진 것 같았다. 이미 충분히 가졌고 누렸으니까. 그러니 밥상 대신 캐리어 위에 음식을 올려두고 먹어도 괜찮았다. 어차피 내겐 책상이 있고, 언제든 나를 기다리는 공간이 있으니까.


만약 이곳에 테이블이 있었다면 캐리어를 이렇게 사용할 수도 있다는 걸 몰랐겠지.
더 이상 무언가가 들어찰 틈이 없을 만큼 꽉 찬 작업실 책상. 별다른 가구나 짐이 없던 아파트 숙소와 비교하면 극과 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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