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해도 '써야겠다'던 다짐이 무색할 만큼 브런치에 글을 자주 발행하지 못했다. 3개월 동안 겨우 세 편. 한 달에 한 편 꼴이다. 한동안은 회사를 오가는 지하철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몇 줄씩 썼더랬다. 서랍에 잠들어 있던 글을 힘들게 수정해서 발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업무량이 많아지고 야근이 잦아지면서 '써야겠다'는 결심은 '쓰긴 써야지'하는 막연한 약속으로 바뀌었다.
자꾸만 나빠지는 시력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체력이 문제였다. 매일 6시에 일어나 8시간씩 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졌기 때문이다. 입찰 제안서 작업으로 며칠씩 야근을 하고 나면 그야말로 떡실신. 쓰는 건 고사하고, 글을 쓰기 위해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켜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저녁을 챙겨 먹고 씻는 것도 간신히 하는 처지에 자기 전 짬을 내어 글을 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떡하든 주말에 시간을 내야 했다.
주말엔 평일에 쌓인 피로와 부족한 잠을 해결하느라 일찍 일어나질 못한다. 대충 끼니를 해결하고 몇 가지 집안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오후 서너 시. 눈가에 졸음이 몰려오는 시간이다. 잠깐 누웠다가 일어나면 또 저녁 먹고 치울 시간. 그렇게 뭘 했는지도 모르게 토요일이 가고 나면 분주한 일요일이 찾아온다. 일주일 사이 엉망이 된 냉장고를 정리하고, 다가올 일주일치의 장보기와 반찬 만들기, 건조대에 걸린 빨래를 개고 수건들을 욕실로 갖다 놓고, 속옷과 양말도 각자의 자리에 둔다. 또 다른 빨래를 돌리고 넌 다음, 거실 청소도 하고, 일반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도 정리해서 버려야 한다. 세탁소도 다녀오고, 마트에 없는 것을 사기 위해 빵집이나 근처 과일가게, 정육점도 들른다.
집안일이란 게 그렇다. 해봤자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안 하면 금세 티가 난다. 일주일만 손을 놓으면 머리를 닦을 수건이 없고 냉장고에 먹을 반찬이 떨어진다. 쓰레기통마다 쓰레기가 가득 차고, 빨래도 산더미처럼 쌓이기 일쑤. 챙겨야 할 생필품은 또 왜 그리 많은지. 주방세제 통이나 화장실 손세정제 용기에 세제도 채워야 하고, 휴지와 미용티슈, 키친타월, 물티슈 같은 소모품들도 떨어지기 전에 사놓아야 한다. 치약이나 샴푸, 트리트먼트, 바디워시, 바디로션 같은 욕실용품도 살펴야 하고, 세탁세제, 청소세제, 수세미, 고무장갑 같은 온갖 소모품까지 포함하면 신경 써야 할 살림살이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쩌다 옷장정리나 베란다, 욕실 청소라도 하는 날이면 온종일 쓸고 닦고 치워도 시간이 모자란다.
5월엔 가정의 달이기도 하고 약속이 많아서 더 바빴다. 어버이날이 있던 주간에는 섬으로 출장을 다녀왔고, 연휴를 포함해 일주일 동안 35시간 초과근로를 한 탓에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지인을 만나거나 가족들과 함께 하는 순간에도 피로와 싸워야 했다. 돌멩이를 올려놓은 듯 무거운 눈꺼풀을 부릅뜬 채 몰래 하품을 해가며 자리를 지켰다.
글을 쓴다는 건, 그 모든 피로감을 이기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습관처럼 '이번 주말엔 써야지' 생각하다가도, 막상 주말이 되면 삐딱한 마음이 고개를 내밀었다.
피곤해 죽겠는데.. 글까지 써야 돼?
일 하고, 가족과 살림을 챙기고, 사람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한계인데. 글을 쓰겠다는 결심이 과한 욕심인 것만 같았다.
글 좀 안 쓴다고 인생이 망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 한동안 글을 못 쓴다고 해서 갑자기 무슨 일이야 생기겠어? 쓰지 않는 나를 꾸짖을 필요는 없잖아.
견고한 정체성의 부재가 불러온 혼란을 다독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고, 글쓰기가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몸부림 같은 거라면. 더더욱 글쓰기에 애면글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명함과 급여명세서가 나의 가치를 증명해 줄 테니까.
집을 어지럽게 내버려 둔 채 피곤과 싸워가며 글을 쓰는 것도 행복과 멀게 느껴졌다. 행복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다던 시인의 말처럼, 글을 쓰지 못하더라도 행복하다면 괜찮은 것 아닌가?
나는 행복하다는 확신도 없으면서 '안 써도 괜찮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글쓰기'를 잠자고, 밥 먹고, 일 하고, 사람을 만나고, 밥 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쓰레기를 버리는 일의 맨 뒤에 두고 지냈다.
의문이 생기면 그것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글을 쓰곤 했다. 스스로도 정리되지 않는 것들을 쓰면서 가다듬기 위해서였다. '피곤함을 무릅쓰고 글을 써야 할까?'라는 질문은 깊이 고민하지도, 쓰지도 않았다. 쓸 수가 없었다. 너무나 피곤했기에. 사유하고 써야 한다는 이성의 명령보다 고단한 육체의 본능을 의심없이 따랐다.
최근엔 또 다른 질문이 머릿속을 자꾸 맴돌았다.
정해진 시간에 주어진 일을 하고 월급을 받는 것이 과연 내가 꿈꾸던 삶인가?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 내가 원하던 삶인지 묻는, 마주하고 싶지않은 질문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 실려갈 때마다 의심 가득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것은 내가 좀 더 책임감 있는 어른이 되기 위해 유폐시킨 영혼이 외치는 항변이었다. 내가 아직 여기 있다고, 그러니 나를 외면하지 말라고. 그 서늘한 목소리가 깊은 곳에서 들려올 때마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런 말에 휘둘릴 필요 없어. 괜히 자유에 대한 욕망만 꿈틀거리게 하고, 일을 그만두려는 핑계만 늘게 되겠지.
나는 미래를 지켜줄 4대 보험과 퇴직연금을 되뇌며 의심에 찬 목소리를 쫓아내곤 했다.
어떤 설렘이나 기대 없이 매일 같은 길을 오가는 것이 누군들 내킬까. 마음이 가리키는 곳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성큼성큼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어깨를 부딪히며 서 있는 사람들의 심연 속에도 한때 자유로이 유영하던 작은 영혼들이 웅크리고 있겠지만. 어쩌면 자기 안에 그런 보드라운 존재가 있었는지 잊어버린 사람들도 무수하겠지.
어제 인파로 가득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가 고개를 흔들어 쫓아내는 그 목소리마저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순간을 떠올려보았다. 가슴이 찌르르 아파왔다. 나를 외면하지 말라던 목소리는 분노에 찬 항의가 아니라 벼랑 끝에서 내지르는 비명이었을까.
사람들은 휴대폰을 보거나 눈을 감고 있어서 보지 못했을 것이다. 지하철 안에서 두꺼운 뿔테 안경을 낀 중년의 여자가 눈물을 훔치는 것을.
나는 문득 깨달았다.
안 쓰면 더 슬퍼지겠구나. 일하고, 먹고, 잠드느라 내가 왜 슬픈지조차 알 수 없는 날이 오겠구나.
무서운 일이었다. 햇살같은 여린 영혼이 숨을 토해낼 수 있는 틈을 찾지 못하고 마음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자꾸 쫓아낸다면. 언젠가는 슬픔조차 자각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사실이 두렵고 무서웠다. 아마도 나는 책임감 있는 좋은 어른이라고 스스로를 추켜세우고, 그동안 애썼다는 위안으로 공허함을 달래려 하겠지. 내가 왜 공허한지조차 모르는 채.
'안 써도 괜찮겠다'는 결국 처음의 자리로 돌아와 '써야겠다'가 되었다. 그리 쉽게 죽지 않을 테니 피곤해도 쓰라는 또 다른 목소리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 본능과 생활의 정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기나긴 글쓰기가 눈앞에 선하다.
출근길의 중간 즈음에 그냥 멈추고 싶을 때가 있다. 대학생 땐 수업을 밥 먹듯이 빼먹었는데.. 직장은 그럴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