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프롬프트가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의도 없는 아름다움과 선택하는 존재 #1

by 류임상

아트하게 보이는 것과 아트의 간극

우리는 '아트하게 작업한다'는 말을 쉽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 속에는 이미 분열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아트하게'라는 수식은 그 자체로 예술이 아닌 무언가에 예술적 외피를 입히는 행위를 암시합니다.

'아트하게 작업한다'는 것은 기능과 목적이라는 명확한 지향점 위에 미적 감각을 덧입히는 과정입니다. 디자인된 제품은 아름다워야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판매와 사용이라는 실용적 목표에 종속됩니다. 광고는 시각적 충격을 주어야 하지만, 그 충격은 메시지 전달과 행동 유도라는 분명한 의도를 향합니다. 이 창의성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것은 목표를 향해 조율된, 통제된 아름다움입니다.


반면 예술은 표현 그 자체가 존재의 이유입니다. 예술가는 상업적 성공이나 실용적 기능보다 내면의 절박함, 세계를 향한 물음, 형식에 대한 실험을 우선합니다. 예술 작품은 때로 불편하고, 이해하기 어렵고, 아름다움의 통념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예술인 이유는, 작가가 던지는 물음 그 자체가 인간 경험의 본질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백남준이 텔레비전 모니터를 쌓아 올렸을 때, 그것은 매체를 '잘' 사용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매체 자체에 대한, 시각성에 대한, 시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었습니다.


tempImageeSw4Ql.heic


AI 이미지의 공허함: 의도 없는 완벽함


인공지능이 생성한 이미지를 마주할 때, 우리는 기묘한 불편함을 경험합니다. 기술적으로는 완벽합니다. 색채는 조화롭고, 구도는 안정적이며, 디테일은 섬세합니다. 그러나 그 완벽함 속에 설명할 수 없는 공허가 자리합니다. '아트하게' 보이지만, 무언가 본질적인 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직관입니다.

이 공허함의 정체는 의도의 부재입니다. AI는 형식의 문법을 완벽하게 학습했지만, 그 형식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목소리를 갖지 못합니다. 진정한 예술 작품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작가는 왜 이 색조를 선택했는지, 왜 이 순간 균형을 깨뜨렸는지,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은폐할지를 결정합니다. 이 선택들은 단순한 미적 판단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작가가 살아온 시간, 겪어낸 상처, 세계를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 말하고자 하는 절박한 무언가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AI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수백만 장의 이미지 데이터에서 패턴을 학습해, "이런 프롬프트에는 통계적으로 이런 이미지가 도출된다"는 평균값을 생성합니다. 그 결과물은 그럴듯하지만, 필연성이 없습니다. "왜 하필 이래야만 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침묵합니다. 아름다움의 외피는 존재하되, 그것을 지탱하는 내적 긴장과 절실함은 부재합니다. 이것은 형태만 남고 혼이 빠져나간 이미지입니다.


프롬프트, 새로운 예술적 실천의 가능성


그렇다면 프롬프트로는 예술을 할 수 없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전환해야 합니다. 문제는 도구가 아니라, 도구를 다루는 존재의 의도입니다. AI를 단순히 이미지를 생산하는 기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예술적 탐구를 매개하는 대화 상대로 재설정할 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립니다.


첫째, 프롬프트 작업을 일관된 예술적 질문으로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무작위로 생성된 '아름다운 그림'들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주제를 향한 지속적 탐구로서의 시리즈 작업입니다. 상실의 시각화, 기억이 왜곡되는 방식, 디지털 시대의 정체성 혼란 같은 일관된 물음을 설정하고, AI와의 반복적 대화를 통해 그것을 구체화하는 과정 자체가 예술적 실천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결과물보다 탐구의 과정, 질문의 깊이입니다.


둘째, AI의 한계와 오류를 예술적 소재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AI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기괴하게 왜곡하는 순간에 주목하십시오. 그 실패와 균열 속에서 오히려 예상치 못한 의미가 출현합니다. 글리치, 형태의 붕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공간들을 작품의 핵심으로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체의 물질성과 한계를 탐구하는 고전적 예술 전통의 연장입니다. 회화가 캔버스의 평면성을 인정했을 때, 영화가 몽타주라는 본질적 단절을 받아들였을 때, 예술은 전진했습니다.


셋째, 생성과 선택의 과정에서 작가의 눈이 개입합니다. 수백 장을 생성한 후, 특정 이미지만을 선택하고, 배열하고, 조합하는 과정에서 당신의 내러티브가 구축됩니다. 왜 이 이미지는 보존하고 저것은 폐기했는가? 이 순서로 배치한 이유는 무엇인가? 큐레이션은 단순한 선별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미의 창조 행위이며, 작가의 시선이 가장 명확하게 각인되는 순간입니다.


마지막으로, 하이브리드 작업을 통한 매체 간 대화가 가능합니다. AI 생성 이미지를 출발점으로 삼되, 손으로 그린 선을 더하거나, 사진과 중첩시키거나, 물리적 재료와 결합하는 것입니다. 혹은 당신의 스케치를 AI로 변형하고, 그 결과를 다시 수정하며 순환적으로 작업할 수 있습니다. 이때 AI는 당신을 대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끌며, 당신 혼자서는 도달할 수 없었던 지점으로 안내하는 협력자가 됩니다.


tempImageMqBSIG.heic


결국 중요한 것은: 누가 묻는가


프롬프트가 예술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누가 프롬프트를 쓰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프롬프트를 쓰는 존재가 무엇을 묻고자 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도구는 중립적입니다. 역사는 이를 반복적으로 증명해왔습니다. 카메라가 발명되었을 때, 회화를 하던 이들은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현실을 기계적으로 복사하는 장치에 불과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사진은 단순한 복사가 아니라, 작가의 시선과 선택이 개입하는 표현 양식이라는 것을. 무엇을 프레임 안에 담고 무엇을 배제할 것인가, 어떤 순간을 포착할 것인가, 빛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 이 모든 결정 속에 작가의 세계관이 투영됩니다.


AI와 프롬프트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술의 정교함이 아니라, 당신이 그것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입니다. AI를 통해 어떤 인간 경험을 탐구하려 하는가? 어떤 질문을 세계를 향해 던지려 하는가? 어떤 내면의 풍경을 시각화하려 하는가? 그 절박함과 일관성이 존재할 때, 프롬프트는 단순한 명령어의 나열을 넘어서 예술적 언어가 됩니다.


예술은 언제나 새로운 매체와 함께 진화해왔습니다. 동굴의 벽화에서 시작해, 캔버스와 물감, 사진, 영화, 비디오, 그리고 이제 알고리즘에 이르기까지. 매체가 변할 때마다 같은 질문이 제기되었고, 매번 답은 같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매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내면입니다.


프롬프트가 예술이 될 수 있느냐는, 결국 우리가 그것을 통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기술은 도구일 뿐이고, 예술은 그 도구를 쥔 손이 향하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예술 경험을 살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