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이 아니라 지식이다
18세기 파리의 와인 상인들은 포도주 한 모금만 맛보고 산지, 연도, 포도 품종을 정확히 맞춰냈다. 마치 초능력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능력은 신비로운 재능이 아니었다. 수천 번의 비교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보르도와 부르고뉴를 나란히 놓고 맛보며 차이를 분석했고, 연도별 특성을 익혔다. 안목은 타고난 감각이 아니라 비교의 축적이었다.
르네상스 시대 로렌초 데 메디치는 열다섯 살에 이미 고대 조각과 현대 회화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었다. 천재성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가문의 방대한 컬렉션 속에서 자라며 그리스 조각과 로마 조각의 차이, 화가들의 선 처리 방식을 매일 관찰하고 비교하며 안목을 키웠다. 안목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는 것이다.
말콤 글래드웰은 1만 시간의 법칙을 제시했지만, 안목 형성에서 중요한 것은 투입 시간의 양이 아니라 선택 행위의 횟수다. 베를린 필하모닉 수석 지휘자 선발 과정을 보면 이것이 명확해진다. 심사위원들이 수백 명의 연주를 듣는 동안, 처음 50명을 들을 때는 모두 훌륭해 보이지만 200명을 듣고 나면 진정한 천재와 단순히 뛰어난 연주자의 차이가 명확하게 구분된다. 비교의 규모가 판단의 해상도를 결정한다.
첫째, 대량 노출이다. 걸작만 보면 안목이 생기지 않는다. 평범한 작품, 실패작까지 경험해야 왜 이것은 작동하지 않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빛의 아름다움을 알려면 어둠도 경험해야 하는 것처럼, 탁월함을 판단하려면 평범함의 스펙트럼을 알아야 한다.
둘째, 의도적 비교다. 단순히 많이 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대상들을 나란히 놓고 차이를 분석하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 AI 시대 창작자도 동일한 방법을 적용할 수 있다. AI가 생성한 열 개의 이미지를 나란히 배치하고 분석하라. 같은 프롬프트인데 왜 어떤 것은 긴장감을 만들고 다른 것은 평범한가? 이런 질문을 반복하면 선택의 근거가 명확해진다.
셋째, 맥락 공부다. 대상 자체만 보지 말고, 그것이 놓인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의 작품은 고립된 사물이 아니라 시대와 대화하는 존재다. 그 대화를 읽어내는 능력이 전문적 안목을 구성한다.
넷째, 자기 기준의 정립이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따라 고르는 게 아니라, 내가 왜 이것이 좋다고 판단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기준이 명확하면 선택이 일관되고, 일관된 선택이 축적되면 그것이 개인의 스타일이 되며, 결국 정체성을 형성한다.
안목의 또 다른 절반은 무엇을 배제할 것인가에 있다. 1960년대 「뉴요커」 매거진의 전설적 편집자 윌리엄 숀은 기고된 원고의 절반을 삭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작가들은 처음에는 분노했지만, 삭제된 버전을 보면 오히려 더 강력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안목의 절반은 선택이고, 나머지 절반은 배제다.
애플의 조너선 아이브가 아이폰에서 거의 모든 물리 버튼을 제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무엇을 추가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뺄 것인가가 디자인이다. 이것은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잡음인지 구분하는 능력의 발현이다.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 가문의 안목이 피렌체를 예술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어떤 예술가를 후원할 것인가, 어떤 작품을 수집할 것인가, 어떤 작품을 어디에 전시할 것인가. 그 선택들이 모여 문화를 창조했다.
21세기, 우리 모두가 메디치가 되었다. AI는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 가능성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배치하며, 어떤 맥락을 부여하느냐가 개인의 창작이 되고, 그 개인들의 선택이 모여 시대의 문화를 형성한다.
안목은 더 이상 소수 전문가의 특권이 아니다. 안목은 AI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의 필수 능력이 되었다. 무한한 선택지 앞에서 올바른 하나를 고르는 능력, 혼돈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능력, 과잉 속에서 본질을 추출하는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개별 요소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 의미를 창조하는 능력. 이것이 안목이고, 이것이야말로 AI 시대 인간에게 남겨진 가장 중요한 창조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