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스무 살에는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고, 서른 살엔 사람들을 바꾸고 싶어 하며, 마흔에는 결국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란 걸 깨닫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마흔은 세상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현재 내게 주어진 인생을 충실하게 살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달라진 인식의 변화를 경험한다. 지난주 오랫만에 친구를 만나 얘기를 나눴다. 친구는 지금의 상사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융통성이 없고 독단적이며, 남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고 했다. 친구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분노하고 있었지만, 나는 친구의 말에 공감은 되면서도 무조건적으로 호응해 줄 수는 없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친구의 분노에 쉽게 동조하며 함께 상사를 비난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흔을 지나며, 사람을 바꾸려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누군가를 바꾸는 데는 너무나 많은 에너지가 들고, 그 과정에서 쉽게 오해가 생긴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에 애쓰는 것이니,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더 현명한 처세라는 생각이 든다.
마흔이 되면서 나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외부를 억지로 바꾸려 하기보다, 내 안의 태도를 조절하며 스스로 허락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여전히 내 감정을 뒤흔드는 일들은 수시로 일어난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내가 어떻게 대응할지를 고민한다. 문제는 이미 벌어진 일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내가 그 일로 혼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다.
항상 가장 심각한 문제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가 무너질 때 발생한다. 나를 지키고 싶은가? 그럼, 우선 누구도 내 삶의 무게를 대신 져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 진실한 삶을 살아줄 수 없다. 지금의 나로 충분하다는 온전한 수용과 자기 긍정만이, 유혹 많은 세상에서 나 자신을 지켜준다.
결국 마흔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온전히 마주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데 있다. 불완전한 내 모습까지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은 성숙한 자기 격려다. 이는 세상을 향한 분노를 내면으로 돌려야 한다는 중요한 시그널이기도 하다.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함은 곧 괴로움이니, 이제는 현명한 마흔의 자세가 요구된다. 마흔은 그런 선택이 가능해진 나이다.
당신은 아직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애쓰고 있는가, 아니면 이제 스스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