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키 창업자 필나이트와 카이로프랙터 미카야의 공통점
미카야는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군에 입대했습니다. 2년간 훈련을 받았지만, 군 생활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죠. 당시 만나던 여자친구의 부모님은 미국 내 상위 100명 안에 드는 유명한 변호사였습니다. 그 덕에 변호사가 되는 것이 한때 새로운 꿈이 되었지만, 그 꿈이 사라지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여자친구의 아버지는 집에서도 4시간씩 브리핑을 했고, 인사라도 하려고 하면 지금 얘기할 수 없다는 수신호만 보내셨다고 해요. 미카야가 Top 100 변호사가 되려면 훨씬 더 노력을 해야 할 텐데, 눈으로 본 변호사의 삶은 행복한 삶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그는 의료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심장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수술을 위해 심장만 빼고 몸을 다 덮고 아무와도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수술실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대요. 미카야는 아주 외향적인 사람이고, 몇 시간 동안 혼자 계속 얘기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는 사람이거든요. 7시간 대수술 이후에 환자가 돌아가신 걸 보고 미카야는 충격에 빠졌는데, 선배들이 아무 감정을 느끼지 않고 다음 수술실로 향하는 것을 보고 자신과는 맞지 않다고 느꼈대요. 말없이, 감정 없이 살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카이로프랙틱 쪽으로 진로를 변경합니다. 카이로프랙틱은 근골격계 문제를 손으로 교정해서 신체의 자연 치유 능력을 촉진하는 대체 의학이에요.
미카야는 미국 NCAA 대학 및 위스콘신 주 PGA 섹션에서 골프 선수로도 활동했습니다. 저는 골프에 대해 잘 모르지만, 위스콘신주 PGA는 주 차원에서 열리는 프로 대회로, 이 대회에서 경기를 한다는 것은 프로 골퍼로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요. 그러다 한 대회에서 태국 골프 선수를 알게 되었대요. 아주 부자였는데, 재활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돼요. 미카야는 카이로프랙틱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렇다 할 경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미카야는 그 자리에서 피치를 했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으로 재활과 회복을 도울 수 있는지, 그러면 어떻게 성과가 나아질 수 있는지요. 큰 기대 없이 크리스마스 휴일을 위해 콜로라도에 돌아왔는데, 12월 26일 태국 번호로 전화가 왔어요.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내일 비행기를 띄워드릴게요."
결국 미카야는 며칠 후 프라이빗 제트를 타고 태국에 가게 되었고, 태국 부자의 담당 카이로프랙터가 되었습니다. 그는 세인트 레지스에 머물며 프라이빗 제트를 타고 PGA 투어에 동반했어요. 이전에 상상도 못 하던 삶이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많은 것들을 누렸지만, 한 명을 맡으며 스케일을 낼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대요.
그러던 중 애플에서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애플은 회사 내부에서 직원들에게 카이로프랙틱 치료를 제공하는데, 특히 아시아 헤드쿼터가 있는 싱가포르에서 5,000여 명의 직원들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태국 부자 한 명을 치료하는 것보다 더 큰 스케일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다시 도전하기로 결심합니다.
문제는 회사도 없고, 직원도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렇지만 이 일을 따내기 위해 직원을 뽑고, 인터뷰를 진행한 끝에 애플과 계약을 맺게 됩니다. 미카야는 그렇게 싱가포르로 오게 되었어요. 지금은 애플뿐만 아니라 페이팔 등 다양한 글로벌 기업의 직원들에게 카이로프랙틱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요. 어느 회사와는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그 회사가 입주한 건물 내에 아예 카이로프랙틱 센터를 차리기도 했대요.
미카야는 끊임없이 도전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믿었습니다. 배짱을 가지고 공격적인 수를 쓰고, 결국 해냈어요. 그의 모습은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와 닮아 있습니다.
필 나이트는 우연히 일본 신발가게에서 오니츠카 타이거 신발을 보게 됩니다. 이 신발에 매료된 24세의 젊은 청년은 오니츠카 타이거에 연락을 해서 미팅을 하게 되었어요. 그의 목적은 미국 판매권을 따내는 것이었습니다. 콘퍼런스 룸에 들어가는데, 20명의 일본 직원들이 인사를 했대요. 아마 매우 큰 회사라고 생각했던 것이겠죠. 필이 발표를 시작했고,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당신은 어느 회사에서 근무하십니까?"
필 나이트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던 데다가, 회사 이름이 없었거든요. 순간적으로 육상선수 시절 받았던 블루리본이 떠올랐고, 얼떨결에 대답했습니다.
"블루리본입니다. 저는 오리건 주 포틀랜드의 블루리본 스포츠를 대표합니다."
그렇게 나이키의 전신, 블루리본 스포츠가 탄생했고 블루리본은 오니츠카 타이거의 판매권을 따냈습니다.
몇몇 스포츠용품점에서 거절을 당한 이후, 블루리본은 판매 전략을 바꿉니다. 북서 태평양 연안에서 육상 대회가 열리는 경기장을 모조리 찾아다닌 거예요.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코치, 선수, 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신발을 보여주었고, 오니츠카의 신발은 날개 돋친 듯 팔렸었습니다. 한 때 백과사전을 하나도 팔지 못했던 필은 신발이 왜 이렇게나 잘 팔리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대요.
"나는 백과사전을 제대로 팔지 못했다. 게다가 그 일을 싫어했다. 그나마 뮤추얼펀드는 좀 더 많이 팔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 일도 싫었다. 그런데 신발을 파는 일은 왜 좋아하는 것일까? 그 일은 단순히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달리기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매일 밖에 나가 몇 킬로미터씩 달리면, 세상은 더 좋은 곳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사람들은 내 말을 듣고 나의 믿음에 공감했다. 믿음, 무엇보다도 믿음이 중요했다." - 필 나이트
필의 믿음을 기반으로 블루리본은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블루리본은 13개 주에서만 오니츠카를 판매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어요. 게다가 오니츠카 측에서 다른 판매업자들을 눈독 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블루리본은 미국 전역에서 오니츠카 타이거를 독점 판매하기를 원했고, 오니츠카를 안심시키려면 미 동부 지역에 사무소가 있어야 했어요. 오니츠카와의 미팅 자리에서 필 나이트가 말했습니다.
"저, 저희 블루리본도 동부 지역에 사무소가 있습니다. 우리는 동부, 서부에 사무실이 있고, 곧 중서부에도 사무소를 열 계획입니다. 우리는 미국 전역을 대상으로 판매할 역량이 됩니다."
필 나이트는 3년 계약을 따냈고 5,000켤레를 주문하는 주문서에 사인을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5,000켤레 대금을 지불할 2만 달러도, 동부 지역 사무소도 없는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그는 주문한 신발이 도착하기 전에 동부 지역에 사무소를 만들고, 2만 달러도 마련해 냅니다.
필 나이트가 '믿음'을 바탕으로 나이키의 전신을 만들어낸 것처럼, 미카야도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거대 기업을 고객으로 만들어냈습니다. 필 나이트가 백과사전 판매와 회계사를 그만두고 더 나은 길을 찾았듯, 미카야도 군대와 심장 전문의 길이 자신과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과감히 멈추어 더 큰 기회를 찾아 나아갔습니다.
미카야의 이야기를 듣고 필 나이트의 블루리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카이로프랙틱 치료 1시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치료실을 떠나기 전, 제 고민을 듣던 미카야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Comfort kills people. 안주하는 순간 기회를 놓치게 돼. 그러기에 너는 너무 똑똑하고, 아름답고, 의욕적이야. 그냥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무에타이 하는 걸로 만족할 거야? 리스크를 감수하고 도전하는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어. 그리고 난 네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미카야의 말은 마치 경종과도 같았습니다. 그의 말이 며칠째 저를 깊이 울리고 있어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히 도전하는 삶만이 진정한 성장을 이끌어내며, 기회를 잡는 것은 '믿음'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