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리뷰하는 마케터,쏠문의 전통주 여행기
전통주를 마시다 보면 이름에서 한문을 자주 접하게 되고, 덕질을 시작하면 고문헌을 공부해야만 한다. 석탄주(너무 맛있어서 삼키기 애석한 술), 부의주(개미가 동동 떠있는 모양의 술, 동동주를 지칭한다) 등의 뜻을 살펴보면 우리 조상들의 귀여운 상상력과 술에 대한 진심을 느낄 수 있다.
대구의 유일한 무형문화재 전통주 양조장에 방문하기 위해 그 덥다는 여름날 SRT에 몸을 실었다. 하향주 양조장의 위치는 도심에서 차를 타고 거진 40분을 더 들어가야 도착할 수 있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이런 자연 안에서 술을 만들면 맛있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청정지역이다. 양조장에 도착하여 김환희 기능보유자 님과 그의 아내분과 인사를 나눈 뒤, 명인님께서 제일 좋아하는 일제 하드바를 먹으며 인생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던 명인님은 하향주 가업을 계승하기 위해 외국 생활을 정리한 뒤 1995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각종 자금을 모아 양조장을 증설하기도 하고, 부동산 문제로 터를 2번이나 옮겨 다니다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고 하셨다. 누룩이 첫 번째 양조장 위치에서 가장 잘 만들어졌다며 툴툴 아쉬움을 표현하셨다. 현재 하향주가는 약주와 소주 2가지 주종의 술을 만들고 있다. 쌀로 만든 발효주의 모태인 탁주는 앞으로도 만들 계획이 없다고 하셨다.
하향주라는 이름은 연꽃 향이 나는 술이라는 뜻이다. 희석식 소주 16.9도 보다 높은 17도임에도 알코올 느낌 없이, 은은하고 그윽한 꽃 향이 특징이었다. 혹시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채셨는가? 과거형을 사용한 건 결코 실수가 아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하향주를 둘러싼 주변 환경도 변화를 맞이하고 있던 것이었다.
4대째 꾸준하게 술을 빚어왔지만 최근 몇 년 간 자금난이라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올해 초에는 양조장에 전화하면 술을 더 이상 빚지 않는다는 씁쓸한 말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신라시대 때부터 1,100년이 넘는 역사적인 술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은 외신에 먼저 알려졌다. 중국의 한 사업가가 67억이라는 구체적인 인수 금액을 제시했지만 바로 거절했다고 한다. 오히려 이 에피소드가 언론에 알려지면서 하향주의 경영 악화가 역조명 받게 되었다. 이후 클라우드 펀딩 업체인 CROWDY에서 프로젝트 진행을 제안하여 올여름 1,000만 원 이상의 후원금으로 다시 술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술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술이 마시고 싶어졌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명인님께서 얼른 양조장을 구경하고, 슬슬 술을 마시자는 말씀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쌀을 불리고 씻는 통부터 누룩을 법제하는 곳까지 비어있는 공간을 하나하나 둘러보니 하향주의 민낯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이번 술은 날씨가 좋지 않아 누룩을 직접 띄우지 못하고 경상도 시판 누룩을 사용한 탓에 신맛과 과일향이 두드러진다고 설명해주셨다. 일반적으로 경상도 지역의 누룩에서는 신맛이 난다고 알려져 있지만, 명인님께서 하향주 누룩은 신맛이 없다는 점이 독특한 특징이라고 하셨다. '하향주' 특유의 연꽃 향은 명인님이 직접 빚은 누룩에서 오던 것이었다.
하향주는 이양주로 구멍떡(멥쌀)으로 밑술을 빚고, 고두밥(찹쌀)으로 덧술을 한다. 구멍떡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면 가운데가 쏙 파인 도넛 모양으로 만든 반죽이 나온다. 명인님께서 고문헌을 살펴본 바에 의하면 동그랗게 빚은 누룩을 끓일 때 거품이 뽀글뽀글 올라오는 모양을 보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즉 구멍떡은 도넛 모양이 아닌 이화곡이나 백수환동곡처럼 동그란 모양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해주셨다.
살면서 이렇게나 영광스러운 날이 또 있을까. 양조장 바로 아래에 있는 계곡 천막에 앉아 바비큐와 명인님께서 직접 따라 주시는 하향주를 함께 마셨다. 작년에 마셨던 하향주와 달리 달콤한 복숭아와 새콤한 사과를 한 입 베어 먹은 느낌이었다. 증류주는 숙성을 하지 않고 바로 출시하며 떫고 거친 그 느낌을 가지고 있었지만 숯불고기의 불향과 잘 어우러졌다.
<동의보감>에 의하면 하향주는 ‘숙취가 없는 술'이라고 한다. 명인님 역시 하향주의 장점으로 머리가 아프지 않다고 말씀해 주셨다. 소비자에게 소구점이 될 요소는 아니지만 그만큼 좋은 술임을 자부하는 당신만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일흔이 넘은 연세에도 끊임없이 더 좋은 술을 위해 고민하고, 올해는 날씨가 안 맞아서 시판 누룩을 사용했지만 내년부터는 누룩도 다시 빚을 예정이라고 하셨다. 그날이 온다면 연꽃 향이 나는 진정한 하향주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유난히 더웠던 이번 여름을 떠올리면 대구가 가장 먼저 생각날 거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약간 졸면서 명인님의 말씀을 듣고, 술 주신다는 말씀에 눈이 번쩍 뜨여 그때부터 다시 집중했던 하향주가. 펀딩으로 다시 술을 빚을 수 있었던 명인님의 여름도 이만큼 특별하게 기억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