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술과 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lemoon Jun 09. 2021

좋아하는 데 큰마음은 필요 없으니까요.

 "사랑에 무슨 이유가 있나요?" 감성 글귀의 한 문장이 어느 순간 내 삶에 녹아들어 있었다. 전통주 정기구독 서비스의 마케터로 일하고 있지만 사실 내가 가장 먼저 좋아하게 됐던 주(酒) 종은 맥주다. 유럽 교환학생 시절 방방곡곡 양조장을 돌아다니며 술의 신세계를 경험했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휴학하고 맥주 양조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식품영양학과 마지막 학기에는 영양사 자격증 대신 맥주 자격증(BJCP)를 취득할 만큼 술에 미쳐있었고, 복수 전공 졸업장 대신 소믈리에이자 '전통주 마케터'로서 사회에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꿈은 목표를 성취한 뒤에 좇는 거 아닌가요?

© timothycdykes, 출처 Unsplash


 '남부럽지 않은 성공'을 꿈꾸던 20살의 나에게 꿈이란 맥주 거품처럼 밍밍한 맛에 금방 꺼지는 허상이라 생각했다. 대학 학과는 성적에 맞춰 지원했고 원하는 학과와 가고 싶었던 학교 중에서는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선택했다. 신분 상승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19년 동안 기다려온 20살의 첫 방학을 강남역 학원에서 약학대학 편입 준비를 시작했다. 욕심과 목표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수험생활은 체질적으로 나와 맞지 않았다. 1년이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재수할 용기까지 깔끔하게 포기하고 실패자라는 셀프 낙인과 함께 복학을 신청했다.



무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을 땐 환경을 바꿔보자.

© TeeFarm, 출처 Pixabay


 약대 편입에 떨어졌을 땐 이 세상 모두가 나를 비웃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내가 합격했으리라는 가정 하에 축하 문자를 받기도 했을 정도로 과대평가를 받고 있었다. 무한 지원과 격려를 보내주신 부모님의 얼굴을 볼 면목도 없었고, 남은 학기 동안 동기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는 걱정도 앞섰다. 무기력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서류 광탈 직후 공공기관에 인턴 자리를 구했다. 지난 학기에 수업을 들었던 강사님에게 아무 자리라도 식품영양학과와 관련 있는 곳에서 실무를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서울특별시 식생활 종합지원센터를 소개해 주셨다. 개강하기까지 남은 2달 동안 인턴 생활을 하며 각종 서류 작업과 검색을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학교 웹사이트에서 교환학생 신청 링크를 발견하고 별생각 없이 지원했다. 약대 지원을 위해 받아두었던 TEPS 성적으로 스위스 베른대학교에 원서를 넣었고 덜컥 합격해버렸다.



심심한 감정이 이렇게 반갑게 느껴질 수도 있구나.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에서 6개월간의 스위스 교환학생 생활이 시작됐다. 학업에는 큰 뜻이 없었기에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학교 수업은 주 2회만 등교하게끔 딱 3과목 신청하고 한 달에 2~3번씩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새로운 도시로 떠나는 여행은 좋았지만 아무도 없는 기숙사 방안에 돌아와서는 짐가방처럼 내팽개쳐 있기 일쑤였다.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대던 어느 날 길을 걷다가 문득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찼던 머릿속 한편에 드디어 빈 여유 공간이 생긴 것이다. 그제서야 혼자 있는 시간에 에너지를 충전하며 차근차근 관심사를 탐색해나가기 시작했다.





 게임 중독, 알코올 중독, 계획 중독처럼 성공 중독도 있다고 생각하는 1인이다. 작은 목표를 세워서 큰일을 해내기 위한 과정에 필요한 요소가 동기부여와 자극이라고 생각한다.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요소로 중독만큼 즉각적이고 본능적인 호르몬 작용이 있을까. 눈웃음 피는 얼굴에 반하는 부정의 생각 굴레를 꽤 오랜 기간 동안 벗어나지 못했었다. 세상 걱정 다 짊어지던 20대 초반의 내가 때로는 안쓰럽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이제는 랍스터처럼 단단한 껍질을 깎아내리며 성장하는 중이다. 오히려 관심에 기반한 말들로 자존감에 영향을 주는 분들에게 웃으며 대처할 수 있는 작은 용기도 생겼다.




매거진의 이전글 넌 무슨 여자애가 술을 그렇게 마시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