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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욱 Aug 22. 2023

요추천자

키에르케고르를 좋아하는 소녀 

전공이 뭐죠? 

        

요추천자 검사를 받으려고 새우등 자세로 누워 잔뜩 긴장하고 있는 여학생에게 물었다.

 

사회철학요 


어려운 과목이군요. 


등에 베타딘을 잔뜩 바르고 마르기를 기다렸다. 그동안은 아무런 이야기가 없다.

 

바늘 들어갑니다. 참 누가 홀렸어요?

 

예?, 홀리다뇨? 

       

왜 누군가가 멋있다고 생각되어서 그런 쪽으로 발길 옮기는 경우가 많던데 

        

아얏, 

        

바늘이 살갗을 뚫고 피하를 통과하여 지금 근육을 관통하고 있다. 아주 부드럽게 들어간다. 이제 등 쪽의 힘줄에 닿았는지 약간의 저항이 온다. 

        

아,  선생님 아프군요 

        

그렇죠, 마취하고 하면 좀 덜 아프긴 한데 마취할 때가 좀 아프거든요, 마취하면 또 한 번 더 아프니 그냥 한 번에 다 해버립시다. 

        

네, 그렇군요 

        

그래, 누군지 생각했나요? 홀린 사람 


너무 아파서 집중이 안되는군요. 선생님 일부러 말 걸어서 제가 아픈 것에 집중 못하게 하려는 거 다 알아요. 그걸 聲東擊西라고 하죠. 


어이쿠 속셈이 다 들통났네. 어떻게 알았죠? 

        

제가 이 검사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 근데 선생님들마다 스타일이 다 달라요. 그중에서 선생님이 제일 말이 많네요. 


제가 좀 수다스러운 편이거든요.


순간 바늘이 척수강에 안착했다는 느낌이 손끝으로 전해왔다. 단단한 저항을 받고 있던 바늘이 종이장을 팡-하고 찢는 듯한 탄력감과 동시에 아무런 저항이 없는 자유로운 공간에 도달한 것이다. 이 느낌이 정말 좋다. 구속과 자유 그렇게 표현해도 될까? 스타일렛을 조심조심 빼낸 후 뇌척수액(CSF)이 흘러나오길 기다린다.

 

키에르케고르 

   

네? 

        

키에르케고르요. 그가 저를 홀렸죠. 

        

아~네, 아주 어려운 이름이네요. 

        

동시에 스타일렛이 빠져나온 비좁은 공간으로 척수액이 비치기 시작한다. 노란색이다. 끈적끈적한 액체가 나오기 싫다는 듯 엉금엉금 기어 나오며 바늘 끝에 당도하여 시험관으로 떨어진다. 한 방울만큼의 양이 되면 아래로 자유낙하한다. 다시 한 방울, 방울...

 

정상적이라면 눈물 같은 색에 그 정도의 점도여야 하는데 이건 분명 비정상이다. 환자가 앓고 있는 결핵이 분명 그녀의 머릿속까지 침투한 것이 틀림없다. 최근의 두통은 분명 결핵성 뇌막염의 두려운 징조일 것이다. 이제부터 키에르케고르를 좋아하는 이 여학생의 운명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선생님, 죽음에 이르는 병 아세요? 

        

검사가 다끝나고 환자는 반듯이 누우면서 뒷정리를 하는 나에게 불쑥 한마디 던졌다.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네?  

        

아니 왜 그렇게 놀라세요? 

        

아니 그냥, 갑자기 말을 시키니까... 

        

선생님, 책 좀 읽으세요. 키에르케고르가 쓴 책 이름이에요. 

        

아, 그렇군요. 

       

그는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 바로 자기 소외라고 했어요. 제가 말이 좀 많아졌네요. 수고 많으셨어요, 수다쟁이 선생님.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자기 소외 말고도 너무 많을 것이다. 악성 종양, 패혈증, 출혈,... 하지만 가엾은 이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할 가장 유력한 병은 바로 저 세 개의 튜브 속에 나란히 담겨 있는 노란색의 끈적이는 액체이다. 정상적인 뇌수를 저렇게 곪게 만든 무서운 결핵이다. 이제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 그 모습을 드디어 드러냈다.  


환자가 병실로 옮겨 간 후 나 혼자 남은 처치실에 인간소외, 인간소외, 인간소외,...라는 말이 허공을 맴돈다. 자꾸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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