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과 블록체인 그 드라마틱한 역사에 관하여
분량이 만만치 않았지만 시간과 정성을 들여 읽은 책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과 정성이 아깝지 않을 만큼 많은 것을 배운 좋은 책이었습니다.
Digital Gold by Nathaniel Popper (2015)
이 책의 부제목은 Bitcoin and the Inside Story of the Misfits and Millionaires Trying to Reinvent Money입니다. 부제목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책은 2008-9년에 나카모토 사토시라고 하는 가명의 어느 한 해커이자 개발자가 발표한 비트코인 백서Bitcoin White Paper에서 출발한 비트코인의 출발과 전개, 수 많은 실패와 실리콘밸리의 환호, 여러 위기상황...2014년에 이르기까지의 짧은 기간동안의 드라마틱한 역사를 재밌게 서사적으로 풀어나간 책입니다.
그리고, 비트코인의 기반이 된 분산저장형 원장기술인 블록체인도 함께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이 타겟으로 잡은 독자층은 암호학과 코딩에 관심이 많은 IT전문가 계층이라기 보다는 기술사/경제사적인 관심이 많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해하기 힘든 기술적인 설명은 거의 없어, 저 같은 문송한 사람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참고로, 책 마지막에 Technical Appendix를 간단히 두고 있어, 기초적인 블록체인 프로세스와 용어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이 또한 별로 어렵지 않아 그대로 습득할 수 있습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소수의 해커 내지 IT덕후 집단에서는 암호기술을 이용한 익명 화폐를 개발하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CypherPunks라고 하는 해커집단이 중심이었는데, hashcash, Bit Gold 등이 나타났으나 대중성을 얻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2009년에 나카모토 사토시라는 가명을 쓰는 어느 한 개발자에 의하여 블록체인 기반에 기한 분산형decentralized 암호화 화폐인 비트코인이 개발됩니다. 중앙집중형 정부관리기관 내지 공적인 통제나 관리가 없고, nod로 참여한 모든 컴퓨터연산장치에 의해 거래기록이 블록으로 생성되어 모든 nod에 저장되어 관리되는 형태 (문외한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 ㅠ)로 안정성이 보장되는 이 가상화폐는 근본적으로 반정부/자유주의적 이상 내지 운동movement와 관련이 깊습니다. 익명성이 보장되므로 정부의 자금세탁규제나 과세등으로부터 자유로운 구조라는 측면에서 국가의 통제와 일부 기득권 계층 (중앙은행과 전통적 금융권)에 대한 저항의 한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으리라 기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화폐가 가져야 할 덕목 내지 요건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튼튼durable해야 하고, 물리적인 소지가능성portable이 보장되어야 하며, 분할가능divisible해야 하고, 통일적uniform이어야 하며, 희소성scarce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그 화폐 이용자의 신뢰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 16면) 미 달러화를 보면 위의 내용이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 같이 전통적인 경제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특히 금본위 화폐제도의 아우라에 갇혀 있는 사람으로서는 단순히 해쉬함수의 계산을 통하여 블록을 가장 먼저 생성한 사람에게 부여되는 가상 숫자단위가 도대체 어떻게 화폐로서 기능할 수 있을지 와닿지 않습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화폐는 그 가치저장기능과 안정성, 유통가능성 및 지불가치를 신뢰하는 시장참여자들에 의하여 화폐가 되는 것이지, 어떠한 실물가치가 그 뒤에 숨어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금이 아주 비싸고 가치가 높기 때문에 화폐가 된 것이 아니라, 화폐로 기능했기 때문에 비싸고 가치가 높아진 것이지요 (157면). 달러도 결국 튼튼하게 인쇄된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니까요.
결국 가상화폐가 실제 화폐로서 기능하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일반 대중의 신뢰, 그 신뢰를 받치는 기술적인 안전성과 사용의 편이성이라고 하는 명제가 현실화되어야 합니다. 분명 블록체인 기술은 기술적인 안전성의 측면에서는 기존의 상식을 깨뜨리는 정도의 혁신을 가져왔습니다만, 아직 해결하지 못한 난제 또는 예상치 못한 문제점이 종종 드러나고 있고, 여러 문제들 때문에 사회적인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책은 크게 3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장은 블록체인 기술의 발명 및 언더그라운드에서의 여러 기술개발과 상용화 시도에 관한 에피소드를 주요 등장인물별로 나누어 재밌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실 비트코인과 지하경제는 사실 본질적으로 큰 연관성을 가질 수 밖에 없었는데요, Ross Ulbright이라고 하는 청년의 온라인 지하시장 - 마약과 각종 불법 물건이 유통되던 - Silk Road를 둘러싼 이야기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나중에 FBI와 쫒고 쫓기다가 체포되어 법정에 서게 되는 3장의 이야기까지...사실 제가 재일 재미있게 본 스토리이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Mt.Gox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두번째 장은 수면 아래 언더그라운드에서 발전되던 이 기술이 2011년 이후 본격적으로 메인스트림의 조명을 받으면서 뉴욕과 팔로알토의 VC로부터 투자가 이루어지고 새로운 대안화폐로서 각광받기 시작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무명시절부터 비트코인을 모아왔던 자들은 억만장자가 되었지만, 그 와중에 Mt.Gox가 해킹을 당하기도 하고, 거래소를 운영하던 자들이 고객의 돈을 다 가지고 잠적해버리기도 하고...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 중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아르헨티나 출신 사업가인 웬스 카사레스Wence Casares의 이야기입니다. 아르헨티나 국가경제파탄 및 살인적인 인플레, 페소화 가치의 실시간 폭락으로 이미 통화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상황에서, 비트코인은 아르헨티나의 일반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중요한 통화수단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엿보입니다. 엄청나게 복잡하고 다액의 수수료와 시간이 소요되는 달러 기반 외환거래의 대체 기술로서의 기능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은 사실 대안통화로서의 가상화폐의 순기능에 관하여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세번째 장에서는 2013년 이후, 미국, 중국 등 각 국가에서 본격적으로 규제대상이 되고 양성화되면서 미국 상원, FinCen 등에서 이루어진 여러 토론과 제도권화의 흐름의 에피소드를 많이 다룹니다. 직업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었기도 합니다. 미국의 정부규제의 관점에서도, 분명 부작용과 문제점을 통제는 해야 하지만, 뉴욕과 팔로알토가 혁신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비즈니스적인 개념은 무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실제 비트코인 사업자들이 예상한 것보다 더 친화적인 규제 정책의 흐름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 가장 큰 거래소인 Mt.Gox가 기술적인 결함에 따른 고객보유분 비트코인의 도난으로 인하여 파산하는 사고도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도 규모의 사고도 비트코인의 거래 시세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는 못한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이 책은 드라마틱한 이벤트 내지 결론으로 끝을 내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사실 이 모든 것이 아직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마지막 챕터는, 어느 컨퍼런스에서 웬스 카사레스가 빌 게이츠Bill Gates에게 비트코인에 대한 그의 태도를 비판하다가 빌 게이츠가 예상 외의 친화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에피소드로 끝을 맺습니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습니다만, 2015년 여름에 결국 위와 같은 양성화의 흐름 속에서 뉴욕주 Bitlicense 규제를 도입합니다. 그리고 G7의 여러 국가들도 이와 유사한 형태로 비트코인 거래소 등 관련 업자들에 대하여 자금이체업 등록규제 및 자금세탁규제를 신설하고, 이용자보호를 위한 여러 구체적인 규제를 도입합니다. 그리고 올해 2월, 일본 금융청이 유사한 규제를 내용으로 하는 자금결제법 개정안을 발의하였습니다.
비트코인과 같은 가상화폐가 결국 화폐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기 위하여는 대중의 신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신뢰는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엄격한 규제를 통하여 확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보다 자기의 "돈"을 보는 사람들의 관점은 그다지 기술친화적, 진보적이지 않습니다. 아직 비트코인은 갈 길이 멉니다. 하지만, 엄격하지만 합리적인 규제의 틀 속에서 거래안전성, 가치(환율)변동의 안정성, 이용자편의성 등의 여러 목표가 조금씩 달성되어 나간다면, 생각하지 못한 빠른 시간 내에 범용성을 획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비트코인과 같은 가상화폐의 발전은 더디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예측하는 것처럼, 그 근간이 되는 블록체인 기술은 오히려 지급결제거래, 증권거래 등 여러 금융거래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엄청난 혁신의 기술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참 좋은 책입니다. 아직 한국에 번역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올지 잘 모르겠지만, 저라도 언제 시간 나면 한번 번역해보고 싶다는 - 쓸데없는, 일시적인, 비현실적인 -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책을 오래간만에 찾았습니다. 관심있는 분들 한번 읽어보시면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