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소리 Mar 10. 2023

베이지 치노와 골든 리트리버



     

   폴로 랄프 로렌 치노 팬츠(면바지)가 있다. 전역하고서 샀다. 빼어나진 않더라도 괜찮은 치노 한 장은 있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5년간 입어 왔다. 색상은 밝은 샌드 베이지. 원단이 얇아 포근한 날에 입기 좋다. 여러 번 세탁해서 물이 꽤 빠졌지만, 밑단에 얼룩이 있다. 자전거 체인 기름때. 후배 녀석이 자전거를 샀다고 보여준 봄날에 생겼다. 얼룩은 봄바람 맞으며 동네 한 바퀴 도는 일과 맞바꾸기에 싼값이었다. 녀석은 자전거 하나 사서 같이 타자고 졸랐다. 녀석은 골든 리트리버다. 남몰래 속으로 애칭을 붙여줬다. 키 크고 덩치 좋은데 얼굴은 멀겋게 생겨서. 리트리버는 처음 본 날 내가 쓴 시 한 편이 정말 좋다고 말해주었으며, 멀찍이서 보면 한창 봄날인 스물다섯에 세상을 떠났다.



   학교에서는 술 마실 일이 꽤 있었다. 소주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몸이 받아내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술잔이 몇 번 오간다 싶으면 다음 날 숙취로 고생했다. 웬만하면 술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몸이 고생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별것 없이 만나기 때문이었다. 마땅한 주제 없이 실없는 소리만 하며 앉아 있는 게 답답했다. 속으로 ‘이 시간에 책이나 더 읽지’ 싶었다. 냉혈한 같지만, 실은 서로에게 충실할 수 있을 때 대면하길 원해서였다. 그 증거로 누군가 좋은 일이나 슬픈 일이 있으면 주량을 개의치 않고 술잔을 기울였다.



   그런 내게 리트리버는 한밤중에 ‘,  하며  마시자고 곧잘 물어왔다. 예외 없이 죽치고 앉아 술만 마시는 자리는 빼려고 했다. 모두 거절하진 못했다. 사람을 대하는 성미가 독하지 못한 탓이다. 목소리가 어두운 날이면 되레 물었다. ‘ 마시고 싶은 거야, 얼굴 보고 싶은 거야’. 그렇게 자리를 털고 나가거나  자취방에서 기다렸다. 리트리버는 사람들 속에서 멀겋게 있다가 한두 마디 했다. 심심하게 있던 녀석. 속으로 생각했다. 너도 입보다는 귀를 달고 살구나. 귀만 있는 사람끼리 모여서 무슨 얘기를 하겠니.


 

   리트리버는 그런 녀석이었다. 한밤중에 술 마시자고 문자 넣던 녀석. 막상 만나면 조용히 있던 녀석. 술 종류를 바텐더처럼 잘 알고 또 만들 줄 알던 녀석. 좋아하는 사람을 제 방에 초대해서 술을 만들어주던 녀석. 농구공을 한 손으로 감싸 쥘 만큼 손이 컸던 녀석. 록 음악을 무척 좋아한 녀석. 쏜애플의 로마네스크라는 노래가 좋다고 들어보라던 녀석. 안경 쓴 모습이 약간 성시경 같기도 했던 녀석. MMA를 배웠다며 암바를 걸려고 하던 녀석. 점잖게 있다가 내뱉는 농담을 보면 저놈도 나사 하나 빠졌구나 싶은 녀석. 내가 타지에서 혼자 생활 중인데 한날 나를 찍어준 사진을 보내던 녀석. 사람을 싫어한 만큼 좋아했을 녀석.



   봄날에 이 바지를 꺼내 입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나는 것이다. 리트리버야. 밖으로 나오니 그렇더라. 대부분 능력과 필요에 따라 사람을 찾아. 순리이고 옳은 일이지. 푸념은 아니지만 그 일이 가끔은 애석하다. 별 이유 없이 나를 찾아주는 사람은 적어. 내가 한 작업을 진심으로 바라봐주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날 찾아준 만큼 네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어땠을까. 더운 김이 오르는 밥 한술 더 먹었어야 했는데. 유들유들하게 한 번씩 안아주어야 했는데. 너나 나나 밋밋한 탓에 심심하게 앉아 있던 모습이 보인다. 그렇게 네가 떠오르면 앞으로 불러야 할 이름이 봄바람처럼 불어온다. 계절이 문턱을 밟고 넘어가면, 꽃이 폈다고 실없이 술 한잔 나눠도 되지 않은가.




매거진의 이전글 값싸지만 비싼 물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