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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먹다만사과수집가 Aug 25. 2020

황리단길에서

2020년 7월22일, 고향집에서의 마지막 밤.

아버지는 1950년생이다. 경주에서 태어나 군복무 기간과 내가 잘 알지 못하는 20대 시절을 제외하고 거의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다. 은퇴를 선언한 2017년부터 서울로 이주해오셨고, 벌초나 모임같은 행사가 있을 때만 경주를 왔다갔다하셨다. 


이제 엄마까지 서울로 완전히 이주하게 되면서 우리 가족은 집을 세놓기로 했다. 나는 휴가를 내서 고향집을 정리하러 가족들과 함께 내려오게 되었다. 엄마와 아버지, 나는 1991년 11월8일에 황성동의 아파트에 입주해 한 번도 이사하지 않았다. 동생은 여기서 났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기와집과 초가집이 모여있던 구도심에서 자라서 자신의 첫 집을 논밭에 아파트가 우후죽순 생겨나던 신도심에 산 것이었다.


집을 정리하는 틈틈이 월성과 계림 일대를 둘러보았다. 내게는 어릴적 소풍 때마다 가던 곳, 그리고 20대가 되어 고향 친구들을 만나면 가끔 가던 곳으로 기억된 곳들이다. 아버지에게 이곳은 유년기의 앞마당이었나 보다. 함께 걸으니 온갖 옛 이야기가 나왔다.


구릉이 없는 경주시내 어디서나 무덤의 곡선과 낮은 산의 능선을 볼 수 있다.


'황리단길'의 명성을 들은 지 좀 되었지만, 이곳에 살아온 우리 모두는 한 번도 이 새 번화가의 구석구석을 본 적이 없었다. 경주에서의 마지막 밤에 안압지(월지와동궁)의 야경을 감상하고 이곳을 들러보기로 했다.


할머니댁이 터미널 근처 사정동에 있었다. 황리단길 바로 근처 공고 뒤편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집은 게스트하우스로 바뀌었다. 사연 많은 집인지라 경주를 떠나기 전에 들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미 그럴 생각이었고, 아버지가 동생에게 차를 이리로 몰라 할 때 그런가보다 했다.


옥상은 없어졌고 내가 나던 해 심었다던 감나무도 베어졌다. 녹색 철문은 낮은 나무문으로 바뀌었는데 영업을 하지 않는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거길 뭣하러 가 보느냐 지청구를 하던 엄마는, 우리들 중 가장 열심히, 그러니까 시멘트 블록을 딛고 올라가 '깨끔발(까치발)'을 하고 닫힌 문 너머로 마당을 들여다보는 열성을 보였다.   


우리는 서라벌문화회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걷기로 했다. 황리단길에 들어서자 엄마는 "진짜 별천지네, 진짜 별천지네" "골목골목에가 예쁘네" 한다. 우리들은 요즘 그런 게 유행이라고, 망원동도 그렇게 유명해졌다고 말을 해 준다.


엄마와 아버지는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잘 기억한다. 유리집, 이발소, 세탁소, 큰아버지네가 세 살던 집, 내가 한 살 반 때 할머니 등에 업혀 미군들이 친 텐트에 피난왔던 장소, 우리집 두 번째 집, 일곱살 때 이사왔던 곳, 할아버지가 감포로 발령을 받자 부부가 두 동생만 데리고 갔던 때 아버지와 아버지와 할머니가 살던 집, 이런 말들이 나온다. 전부 이 일대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어린시절 대여섯 번 이사를 했다고 한다.


집을 허문 자리에 빨강 파랑의 플라스틱 테이블을 깔아둔 맥줏집이 몹시 붐볐다. 생맥주 세 잔과 소주 한 병('빨간소주'는 없었다), 집까지 운전할 동생의 스프라이트를 주문하고 한치도 한 접시 시켰다. 안주를 준비하는 데 40분이나 걸릴 거라고 했다. 문을 연지 얼마 안 돼 준비가 부족한 모양이라고, 나를 뺀 모두가 너그러웠다. 


취기가 오르기 시작할 때 술이 떨어졌다. 자그만 접시의 한치 세 마리는 너무 "아치라와"(아치랍다:애처롭다)서, 우리는 집에 가서 엄마가 어제 사둔 싱싱한 오징어를 데쳐 한 잔 더 하기로 했다. 


황리단길을 빠져나가는 골목에서 엄마와 동생.


나는 전날도 이곳을 방문했었다. 월요일 밤이라 문 닫은 가게가 많았다. 인적이 드문 골목 골목을 S와 둘이 걷다가, 아무 집에 들어가 파스타를 한 그릇씩 먹었다. 손님은 우리와 다른 한 테이블 뿐이었다. 


우리는 족히 5년은 밀렸을 이야기들을 최근 근황을 중심으로 순식간에 풀어냈다. 나는 띄엄띄엄 쉬어가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어느정도 정리가 끝난 문제들이라서 무엇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 지 알 수가 있었다. S에게도 최근 많은 일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입장을 뒤바꾸어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밥집을 찾던 길에 본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아주 작은 건물만 살려두고 마당을 전부 헐어 테이블을 놓았다. 탁자마다 노란 등을 놓고 벽에는 빔을 쏘아 이럭저럭 분위기가 났다. 매실차는 의외로 간이 딱 맞았다. 우리는 서로를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다. "잘 될거야!" 하고 말해주는 S의 표정이 너무나 환하고 아름다워서, 나는 정말 그렇게 될 거라고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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