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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먹다만사과수집가 Aug 25. 2020

할머니의 집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듬해 돌아본 2011년 무렵의 어느날

나는 손가락을 펴고 그것이 몇 해 전이었는가를 세어 본다.

아마도 오년 전쯤 됐을 것이다.


유난히 해가 밝았고 나는 엄마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사정동에 들르기로 했다. 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할머니댁을 찾은 적은 전에 없었다.


녹이 슨 초록색 철문을 열 땐 아마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열쇠 노릇을 했던 굽어진 못을 어렵사리 잡고 돌려야 했을 터다.


할머니는 마루에 나와 앉아 멍하니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개는 닫혀있던 방문이 '뿌드드' 하며 "왔나~" 소리와 함께 열릴 것이었는데, 할머니가 내가 올 줄 예상이나 했다는 듯이 나와계셨던 것이다.


그때 할머니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나는 좀 뒤에야 이해했다. 할머니는 그날 속이 많이 안 좋아 병원에 다녀왔다고 했다. '정상'이라는 검사 결과가 나온 것이 그날인지 그 후인지 모르겠지만 할머니는 '누구 할매가 내가 위암일 수도 있다 카더라, 지랄하고... 이래 멀쩡한데...' 같은 말로 당시의 불안을 드러냈었다.


할머니의 멍한 표정과 슬픈 눈은 그러니까, 평생을 생기 넘치게 살아온 할머니가 당신의 생에도 끝이 있음을 직감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 아니 이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할아버지를 비롯해 수많은 이들을 보내 본 할머니가 그것을 몰랐을 리는 없다. 다만 끝이 생각보다 이를 수 있음을, 어쩌면 앞에 다가왔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머니는 했을 것이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손녀가, 당신을 데리러 온 저승사자 만큼이나 생뚱맞게 느껴지셨을 것이다. '내가 죽을 줄을 알고 자가 찾아왔나' 하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른다.


그 때 할머니가 앉은 마루에는 잉어만 해져 가는 금붕어들이 사는 어항이 있었고, 마당엔 감나무가 있었다. 언제마지막으로 포도를 열었을 지 모르는 넝쿨도 초록문 위에 늘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날 할머니는 병원에 다녀왔고 검사결과가 나쁘지 않다는 식으로 얘길 했었다. 그럼에도 표정이 너무나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할머니가 혹시 무언가를 숨기고 계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해서 나는 나오는 길에 할머니 다니시는 병원이 어디인가를 물었다. 초록문을 닫고 집을 나와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고 나서야 나는 할머니의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 날 또렷한 햇빛 아래서 세 글자가 희미했었다.


나는 그날, 내가 햇빛아래 기분이 좋다는 이유로 개입 충동을 느꼈다는 결론같은 것을 내렸었다. 병원으로 뛰어들어가고, 간호사를 설득해 차트를 확인하고, 할머니가 숨기려던 그 병을 가족들에게 알리는 조그만 격정의 상황은 그날 내가 원하는, 연출하고 싶었던 연극이었을 뿐 딱히 할머니를 위한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처마 밑에는 양동이며 대야 따위가 놓여있곤 했다. 빗물을 받아 모은다는 것은 너무나 생소한 일이라 매번 유심히 보았었는데, 그걸 어디에 쓰셨는지는 모르겠다. 어릴적 내가 넘어졌던 계단, 장단지가 놓인 옥상으로 가는 너덧 개의 계단은 커서 보니 매우 낮고 작은 것이었다. 옥상에 올라가면 다른 집들의 정수리도 모두 볼 수 있어 재미있었다. 옆집 기왓지붕에 오르는 일도 가능해 보였었다. 아니, 한두 번쯤 올라 봤었던가?


할머니 댁에서 차례를 모시던 시절이 벌써 이만치 희미하다. 그땐 제기를 닦는 일이 그렇게 싫었었다. 부엌 왼쪽의 욕실에 들어가 쭈그려 앉아 찬 물에 손을 담가야 했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할머니의 부엌은 끈끈하고 찜찜했지만, 할머니가 자리에 누우신 이후론 할머니 방을 제외한 모든 구역이 죽은 곳이 돼버렸다. 동생과 할머니네에 갔을 때, 큰방 장롱을 열었는데 이불을 당기니 후두둑 소리가 났다. 옆방에 누워있던 할머니가 "열지마! 그건 건드리지 말고 빨리 닫아놔!" 하고 다급하게 소리치셨다. 알고보니 그 안에는 쥐똥이 이미 수두룩했다. 그 곳은 그들의 공간이 된 지 오래였지만 할머니는 손 쓸 방법이 없었다.


하루 두 시간 정도 요양보호사가 찾아오던 시절이었다. 이제 할머니는 무릎을 쓸 수 없어 거동을 거의 할 수 없게돼, 손 닿는 곳에 물이며 먹을 것을 두고, 가끔 몸이 아주 좋아지는 날이면 상이 있는 곳까지 몸을 끌고갈 수 있다 했었다.


그즈음 나는 할머니댁 가서 뜨뜻한 바닥에 '한 숨' 자고 오는 걸 좋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사람이 서로 정을 붙이려면 함께 머무는 공간에 적어도 한 가지는 '좋은' 일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늘 할머니 댁 가면 어쩔 줄 몰라했던 내게 나름 그곳에서의 '할 일'이 생긴 셈이었다.


영국에서 돌아와 처음 집에 내려갔을 때 나는 기타를 챙겨가지고 갔다. 아버지에게 'Green green grass of home'을 불러드릴 요량이었는데 할머니께도 노래를 불러드리면 좋을 것 같았다.


막상 가보니 할머니는 기타가 필요 없었다. 박자도 필요 없었다. 같이 '칠갑산'을 부르는데 할머니만의 박자감각이 매우 흥미로웠다. 그 추석을 쇠고 곧이어 떠난 제주도 여행에서 나는 애인에게 몇 번이고 할머니 박자의 칠갑산을 불러줬다. 취업 준비를 하던 그해 겨울의 어느날, 도서관 앞에서 전화기를 붙들고 한 번, 할머니랑 같이 그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좀 더 일찍 할머니와 친해질 수는 없었을까. 거리를 좁혀볼 순 없었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할머니란 우주를 백만 분의 일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보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와 고모는 평생 내게 '악인'의 프레임 속에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나는 두 분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목소리가 크고 풍채가 좋던 할머니. 어디서나 스스로 주인공이 되던 할머니. 우리 부모님이 장사를 시작하고 몇 년 간은 제숫장도 혼자 보셨고, 음식도 다 직접 하셨다. 어느날 명절을 앞두고 내가 혼자 할머니댁에 가 있었을 때, 전을 '홱' 뒤집는 할머니 솜씨에 박수치며 꺄르르 좋아했더니 할머니도 환하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 순간, 그런 순간은 어떻게 만들어 내는 것인지 모르겠다.


취업준비를 할 때 나는 매우 가난했다. 수중에 돈이 있을 수가 없었다. 옷도 제대로 사입지 않은 탓에 밖에 나갈 땐 늘 좀 주눅이 들었다. 어느 날은 천 원이 없었으니, 친구를 만나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K를 만난 날이었다. 할머니댁에 다녀온 지 얼마 안 된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밥을 먹고 신촌의 어느 카페에 차를 마시러 갔는데, 그곳에는 마치 기쁨과 즐거움만 있는 것 같았다. 젊은이들의 공간, 소비의 공간, 돈을 주면 예쁘고 아기자기한 인형과 함께 맛난 음료를 내어주는 곳. 그날 K와 나눴던 얘기들은 결코 가볍지가 않았던 것 같은데 그 공간만큼은 참 완벽한 곳이었다. K가 카드를 꺼내 계산을 했었다.


이후 오래도록 나는 그 카페와 우리 할머니댁을 대조적인 공간으로 인식했다. 이따금씩 그 둘을 떠울릴 계기가 생기면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정녕 둘은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란 말인가. 없앨 수도 지워낼 수도 없는 생의 무게가 한 쪽에 분명 존재하는데, 다른 쪽에서 마치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할머니댁 문을 열면 보이는, 경주공고를 둘러쌓던 높은 담벼락은 이젠 없어졌다. 그 담은 어찌나 높고 무시무시했던지 나는 어렸을 때 그 곳을 감옥이나 적어도 무언가를 되게 잘못한 이들이 가는 데라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을 할 수가 없었다.


이제 그 자리에는 초록색 철로 된 펜스가 생겼다. 나는 혼자 그곳에 가서, 그 펜스를 손으로 잡고 올라가 이제는 초록색 문이 없어진, 조야한 나무문이 대신 붙어있는 집의 안쪽을 관찰했다. 계단도 감나무도 간 데 없었다. 옥상도 없었다. 생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한옥의 느낌을 주려 애썼으나, 그곳에 할머니의, 할아버지의, 때때로 우리의 모습이 있었으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양이 돼 있었다.


할머니의 죽음을 알려온 건 동생이었다. 새해 첫날 새벽 두 시쯤 전화를 받으니 동생이 엉엉 울었던 것 같다. 장례식장에서 동생과 돈을 셌던 기억이 난다. 내 손님은 한 명도 없었고, 관을 들러멘 것은 '허사장님'과 당시 가게에서 아버지와 함께 일하던 아저씨였다.


할머니의 얼굴에 곱게 분칠해주던 아저씨의 일이 숭고해보였다고 말할 수 있다. 평소에는 낮술을 즐기는 껄렁한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해 보았다. 할아버지의 부음을 야영이 끝나고서야 전해 들었던 2002년에, 나는 장례식장을 생각하면서 '짜장면 시켜먹는 건가' 했었다. 20대 중반이 되니, 할머니 돌아가시면 장례식장에 누가 올까 하는 생각을 하는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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