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란한 결혼에 답하다 (2) 2021. ?.
88년생 2021년. 33세.
50년생 1984년. 34세.
아버지와 내가 연결되었다고 느낍니다.
아버지는 평생 결혼을 안 하려고 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20대 초반의 내게도 결혼은 선택이고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고 했어요. 자식에게 할 말로는 좀 그렇다, 싶으면서도 아버지가 우리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하는구나 하고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습니다.
인생의 무용담 혹은 죽을 고비를 넘긴 얘기를 할 때는 이렇게도 덧붙였습니다. "(그때 잘못됐으면) 너희를 못 만났을 테고."
낳았다, 이런 말보다, '만났다'는 말이 참 좋아 잊히지 않습니다.
이런 아버지와의 관계는 엄마외의 그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엄마는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데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심성에 대한 표현이란 다 상대적인 것이지만, 말하자면 아버지는 무딘 쪽, 엄마는 예민한 쪽입니다. 엄마는 우리의 안위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일을 걱정하느라 자기의 빛남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사람입니다.
두 사람에겐 언제가 가장 힘들 때였을까. 다행히도 지금이 아닌 것만은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이 사람들이 젊은 시절 그 사람들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잘 지내십니다. (물론 내가 안 보는 시간엔 알 수 없죠!)
아버지의 30대는 내가 기억하지 못합니다. 30대 후반에야 제가 세상에 나왔으니까요. 유년기의 기억에 남은 아버지는 대개 40대일 것입니다.
40대의 아버지는 이루지 못한 꿈에 눌려버린 것 같았습니다. 우리 집은 망한 적도 없었지만 넉넉한 적도 없었고, 아버지는 이렇게 40대가 흘러간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니, 돌이켜보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무표정한 얼굴들을 생각하면요. (물론 이것들은 전부, 어른이 된 내가 머릿속에서 재구성한 것일 겁니다)
술에 취하면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일송정-푸른솔은-"하면서 동네 시끄럽게 노래를 부르며 아파트 엘레베이터를 타고와 현관에 쓰러져 그대로 거실에 자던 날이 많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어떤 일에도 간섭하지 않았지만, 집 밖을 나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습니다. 집안 사정으로 학업의 꿈을 이루지 못한 그는 '사람은 서울로 가야한다'는 명제를 신봉하는 사람이었거든요.
집안에 머물기보다 바깥으로 돌기를 좋아하고 꿈꾸듯 먼 데를 바라보는 마음을 가진 사람. 결혼 전에는 금요일 밤이면 배낭을 싸두었다가 토요 근무(당시는 토요일에 오전까지 이하는 주 5.5일제의 시대였습니다)를 마치자마자 어느 버스를 집어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여행했다는 젊은이.
나는 결혼에 도통 생각이 없는 채로 30대 초반이 된 내가 아버지를 닮은 게 아닐까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만 34세. 내년이면 엄마와 결혼을 결심한 아버지의 나이가 됩니다.
스물아홉에 결혼한 엄마는 서른셋에 나를 낳았습니다. 지금의 내 나이.
그동안, 그래도 아직 우리 엄마 아부지보다는 이르다 생각하며 지내왔는데, 이제 곧 그 때를 넘어서게 됩니다.
2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