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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다니 Feb 04. 2022

필사적인 필사

feat. 필사 책상


새해를 맞아 시작한 모닝 루틴에서 '모닝'은 잘 못 지켜도 '루틴'은 잘 지키고 있는 일이 하나 있다. 바로 필사. 언젠가 필사를 해보겠다고 만년필에 원고지 노트까지 사둔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계속 첫발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올해 갑자기 계획에도 없던 필사를 시작하게 된 데에는 꽤나 낭만적이고 운명적인 사연이 있다.


올해 첫 여행으로 떠난 제주도에서의 첫날. 나는 오래전부터 가고 싶어 위시리스트에 넣어두었던 숙소 타오하우스에서 하루를 묵었다. 책으로 둘러싸인 방에서의 낭만적인 하룻밤을 꿈꾸며 도착한 타오하우스는 마치 우리 집 같았다. 카메라부터 놋그릇, 수많은 책과 고요히 흘러나오는 라디오까지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분위기였다.




잠에 들기 직전까지 방과 거실에 놓인 책을 몇 권 들춰보며 북 스테이를 만끽하고,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숙소 사장님께서 고소하고 향이 좋은 드립 커피를 한잔 내려주셔서 부엌에 함께 앉아 사장님 부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서점과 1인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내 이야기에 반워하시는 두 분과의 대화는 점점 길어져 체크아웃 시간을 훌쩍 넘겼다.


같은 고민을 나누며 한참 이야기를 나눈 끝에 사장님께서 내게 책 한 권을 선물해주셨다. 책의 정원이라는 이름의 출판사를 운영하고 계신 사장님이 직접 기획하여 만드신 책 <케이의 만년필 필사>라는 책이었다. 노란 노트 무늬의 표지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예쁜 일러스트로 그려진 책이었다.


그 책을 감사히 받아 들고 본격적인 제주 여행을 시작했다. 미처 책은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부지런히 여행을 하다가 여행의 막바지쯤 공연을 보기 위해 종달리에 들렀다. 공연 시간까지 애매하게 시간이 남아 공연장 근처에 있는 카페로 향했는데, 그곳 역시 취향저격의 공간으로 아주 마음에 쏙 들었다.





은은한 커피 향과 책으로 가득한 분위기에 더해 내가 사랑하는 선인장까지. 완벽하게 나를 매료시키는 따뜻한 공간이었다. 책자국이라는 고운 이름을 가진 이 북카페에는 릴레이로 손님들이 필사를 할 수 있도록 마련해둔 필사의 책상이 있었는데, 이때까지도 나는 몰랐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 당근마켓을 켜고 필사 책상을 사게 되리라고는.


제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마치 제주도가 온몸으로 내게 "어서 필사해!"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무언가에 홀린 듯 당근마켓에서 우연히 마음에 드는 원목 책상을 하나 얻게 됐는데, 그땐 딱히 용도를 생각하지 않고 덜컥 구매하고 말았다. 막상 가져오니 크기가 애매해 어찌 사용할까 고민하다가 무심코 그 위에 올려둔 책이 썩 잘 어울려 필사 책상으로 써보기로 했다.





첫 필사 책은 역시 인생 책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집에 있는 어린왕자 책을 모아 보니 무려 여덟 권이나 되었는데 그중에 문장이 제일 간결한 책을 골라 들었다. 오래전 사둔 원고지 노트가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잉크가 굳어버린 만년필에 잉크 새로 넣고, 엄마가 아끼는 만년필도 몇 개 지원받았다. 그런데 원고지 표기법을 다 잊어버려 계속 버벅 대다 보니 속도가 쉬이 나지 않았다.


긴 호흡으로 하는 걸 어려워하는 내겐 조금 더 자주 성취감을 줄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문득 제주도의 귀여운 가게 여름문구사에서 구매한 원고지 노트도 펼쳐 보았는데, 조금 더 작은 크기의 원고지여서 부담이 적었다. 원고지 칸에 얽매이지 말고 글자를 써보면 어떨까 해서 좋아하는 다른 책을 더 꺼내와 밑줄을 그었던 문장들을 찾았다.


그리고 원고지 위에 만년필로 짧은 문장적고, 그 글을 사진 찍어 책 리뷰와 함께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기록의 습작이라는 이름으로 전에 만들어두었던 부계정의 콘셉트도 점점 확실해졌다. 일주일에 서너 문장을 적는 정도는 부담 없이 할 수 있을 거라 느껴졌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책아카이빙까지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나만의 고요한 필사 책상이 생기고, 그곳에선 오직 책과 글만 생각할 수 있으니 퍽 좋았다. 거실에 두었다가 영 집중이 되지 않아 내 방에 있던 커다란 책장을 버리고 내방으로 필사 책상을 옮겨왔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컴퓨터를 두드리는 책상 앞에 있다가 머리가 복잡해질 때마다 필사 책상으로 자리를 옮겨와 만년필을 들었다. 그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글자를 적는 순간만큼은 모든 번뇌가 일시 정지했다.


설 연휴에 책장을 버리면서 엄마 작업실의 서재와 무질서하게 섞여있던 책들도 깔끔히 정리했는데, 그러다 아빠의 오래된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아빠가 꾹꾹 눌러 적으신 필사 종이가 담겨있었다. 만년필을 사랑하는 엄마와 필사를 친구 삼았던 아빠의 피를 물려받아 내가 지금 이러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버리려 하셨던 그 필사 종이는 내가 잘 간직하기로 했다.


필사.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필사적으로 이어가야지.



기록의 습작 @etude.or.rec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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