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신작 [승리호] 리뷰
헐리우드 영화로 너댓 본 정도 본 듯한 스페이스 오페라 영웅 활극이 있다. 우주선이 날아다니고, 사람과 분간하기 힘든 사이보그가 있고, 악당이 만들어 놓은 계급사회가 있으며, 주인공들은 거기에 엿을 먹이는 아웃사이더이다. 여러 모로 기시감이 들지만 이 장르는 한국 영화로는 만들어진 적 없다. 이걸 굳이 한국 영화로 만드는 것은 의미가 있을까? 당연히 많은 의미가 있다.
[승리호]는 작품 자체도 클리셰들의 집합이긴 하지만, 이를 둘러싼 비평의 지형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익숙하다. 우선 기술적 성취와 별개로 소위 'K-신파'는 지겹다는 의견이 한 축을 이룬다. 그 반대편에는 그래도 볼거리와 즐길거리는 확실하며 그것이 오락영화의 본질이라는 옹호가 있다. 최근 들어 외세(?)를 등에 업은 제3 세력은 신파 자체가 나쁜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시각을 던진다. [부산행] 때도 우리가 신파라며 싫어했던 부분이 외국 평론가들에게는 호평을 받은 걸 보면 여태까지 우리가 이 Korean-Humanism에 너무 가혹했던 건 아닐까? (그렇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여기서 몇 가지 더 추가되면 [승리호 비평으로 보는 조선 붕당 정치의 이해] 짤방이 탄생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문득 이런 논쟁 자체가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더 나은 영화가 나올 수 있도록 돕는 담금질로서의 비평은 언제나 필요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내게 [승리호]는 꽤 괜찮은 오락이었다. 앞에서 소개한 의견들 중에는 두번째에 가깝겠다. 또한 작품 자체가 주는 오락도 오락이지만, 스페이스 오페라가 '한국 버전'으로 컨버팅되어 넷플릭스에서 히트를 쳤다는 사실이 주는 묘한 흥분도 있다. 어려운 말로 설명해봤자 그게 그냥 국뽕이라고 일축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서 이 글에서는 영화의 전체적인 작품성, 특수효과와 미술의 완성도를 따지는 건 비평가들의 몫으로 넘기고, 개인적으로 좋았던 포인트를 세 가지 정도 적어보려 한다.
다문화는 미래 사회를 상상할 때 빠질 수 없는 키워드이다. 지금도 이미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가 점점 가속화되어 종국에는 전통적인 국경과 민족의 의미가 희미해질 것이라는 예측이다. 그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은 서로 어떻게 소통할까? 이 의문에 대한 많은 SF 영화들의 대답은 결국 영어가 공용어가 됐다는, 간편하지만 현실적인 설정이었다. 영어가 아니면 중국어.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초강대국의 언어만이 살아남고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화가 사라져버린 미래는 그 자체로 암울하고 비정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승리호]는 만능 통역기라는 장치를 등장시켜 이 문제를 우회했다. 영화 속에는 다양한 국가와 인종의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모든 언어를 완벽하게 통역하는 기계가 보편화된 덕에 누구 하나 영어를 쓰지 않고 자기 나라 말로 이야기하고 또 상대의 말을 자연스럽게 알아 듣는다. 그 결과 덴마크어로 검문을 하는 경찰에게 천연덕스럽게 한국어로 "선생님, 실례지만 어쩐 일로…"라고 묻는 장면이 탄생한다. 주요 조연 중 하나가 나이지리아 피진(Nigerian pidgin)이라는 생소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비 영어권 배우에게 영어 연기를 시키는 것의 어려움도 해결하고, 많은 언어와 문화가 존재감을 잃지 않는 미래를 그려냈다는 점에서 이 설정은 좋은 선택이었다고 본다.
업동이는 승리호의 승무원 중 유일한 사이보그이다. 유해진의 목소리를 가졌고, 피부 이식을 하고 싶어서 돈을 모으며, 전투가 벌어지면 우주선 사이를 뛰어다니며 작살을 던져 적함들을 격추시킨다. 그리고 여자다. 사이보그가 어떻게 성별이 있지? 그건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자다.
나는 이런 캐릭터는 본 적이 없다. 어떻게 이런 조합을 할 생각을 했을까. 우주 공간에서 쓰이는 무기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건 끽해야 레이저 건, 거기서 더 상상력을 발휘하면 스타워즈의 광선검이나 건담의 빔 세이버 정도였다. 그런데 작살은 정말 처음 본다. 중력이 없는 우주 공간에서 어떻게 우주선 사이를 폴짝 폴짝 뛰어다니냐는 의문이 의미가 있을까? 작살을 던져 우주선을 작살내는 사이보그 유해진이 나오는데 그게 중요한가? 이건 쉽게 볼 수 있는 구경거리가 아니다.
이 조합은 참신할 뿐만 아니라 절묘하다. 유해진은 좋은 배우이고 그에 대해 별 유감은 없지만, 그가 출연하면 어떤 소재의 영화든—그리고 어떤 의미로든—그냥 '한국 영화'가 돼버린다는 느낌이 있다. 향이 너무 강해서 다른 재료들의 맛을 다 가려버리는 향신료랄까. 그런데 목소리만 나오니까 그 향이 적당히 통제되면서 밸런스가 얼추 맞는다. 이런 유해진은 언제든 환영이다. 다음에는 컴버배치의 스마우그처럼 드래곤 유해진도 나왔으면 좋겠다.
[승리호]에는 김태리가 나온다. 나는 김태리가 좋다. 특히 김태리가 말하는 방식과 목소리가 좋다. 예고편에서도 나오는 "비켜라, 이 무능한 것들아. 저건 내 거다"는 영화를 다 보고 난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찾아서 듣는다. 물론 그가 분한 장 선장이라는 캐릭터는 조금 밋밋하다. 대책 없이 오늘만 살며 시도 때도 없이 정의 타령을 하는 사고뭉치지만 사실은 우주선과 사이보그를 뚝딱 만들어내는 천재 엔지니어. 전형적인 '나사 빠진 천재' 캐릭터다. 그러나 그 캐릭터가 김태리처럼 생기고 김태리의 목소리로 말한다면 무죄다. 김태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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