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Make a Man Out of You - 뮬란(1998)
Let's get down to business.
훈련을 시작하자.
잔인하고 강력한 훈족이 중국의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황제의 명에 따라 훈족을 무찌를 군인들이 소집되고, 유능한 젊은 장군 리 샹이 그들의 훈련을 맡는다. 그러나 소집된 인원들의 상태는 심히 좋지 않아 보인다. 전투는 고사하고 명령도 제대로 따르지 않는 오합지졸들 뿐. 그중에서도 특히 답이 없어 보이는 건 핑이라는 이름의 비실거리는 병사다. 함께 싸울 수 없다는 샹의 처분에 따라 핑, 그러니까 핑으로 변장한 뮬란은 짐을 싸서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뮬란에게는 지켜야 할 가족과 명예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다. 입소 첫날, 누구든 가져오는 사람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고 했던 높은 장대 위의 화살이 뮬란의 눈에 들어온다.
1997년 크리스마스, 미국에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쿤둔Kundun]이 개봉했다. [쿤둔]은 티베트 저항 운동의 상징인 달라이 라마 14세의 일대기를 그린 전기 영화였다. 중국이 절대 좋아할 수 없는 영화였다. 마틴 스콜세지와 주요 스태프들은 바로 중국 입국 금지 조치를 당했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디즈니의 지분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 죄로 디즈니 또한 그날부터 13억 명의 고객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심지어 [쿤둔]의 흥행 성적 역시 시원찮았다.
디즈니의 CEO 마이클 아이스너는 민첩하게 허리를 숙였다. "나쁜 소식은 저희가 이렇게 우리의 친구를 모욕하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고, 좋은 소식은 거의 아무도 보지 않았다는 거죠." 중국은 사과를 받아들였고, 그 대가로 홍콩과 상하이에 디즈니랜드가 들어서게 됐다. 그와 함께 디즈니 내부에서는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동양의 전설을 소재로 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유명한 동화 작가 로버트 D. 산 수치가 자문 역할로 투입되었다.
사실 동아시아 시장 진출은 디즈니의 숙원 사업 중 하나였고, 10년 전부터 플로리다의 위성 스튜디오에서는 [차이나 돌China Doll](* 도자기 인형이라는 뜻)이라는 제목의 단편을 작업하고 있었다. 단편임에도 10년째 진도가 안 나간 이유는 [차이나 돌]의 줄거리를 보면 이해가 된다. 구박받으며 살고 있던 불쌍한 중국인 소녀가 영국인 왕자님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구원받는다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영락없는 중국판 [포카혼타스]였고, 스태프들은 이 프로젝트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이런 이야기로 중국 시장에 진출해봤자 결과가 좋지 않을 것임은 명약관화였다.
한편 수치는 5세기경 북위 시대에 쓰인 [목란사木蘭辭]라는 서사시를 찾아냈고, 이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목란사]는 아버지 대신 전쟁에 나가 활약했다는 화목란이라는 여성 영웅의 활약상을 기록한 시였다. 디즈니는 수치의 프로젝트와 [차이나 돌]을 합치기로 결정했고, 그것이 곧 [뮬란(Mulan, 1998)]의 시작이었다.
기획 초기 단계의 [뮬란]은 여전히 [차이나 돌] 재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이야기였다. 뮬란은 집안에서 정해준 약혼자와 결혼하기 싫어서 진정한 운명의 상대를 찾아 떠나는 캐릭터로 설정됐다. 바뀐 이야기에서도 여전히 남성과의 사랑이 플롯의 중심에 놓였던 것이다.
작가들은 이제 이런 구시대적인 공주 이야기에서 탈피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또한 원작이 된 [목란사]의 주제 역시 가족에 대한 사랑과 명예로, 이성과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디즈니는 이미 [포카혼타스] 때 해당 작품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화에 대한 무지를 드러냈다는 이유로 원주민 공동체로부터 호된 비판을 들은 전적이 있었다. 다른 문화권의 이야기를 참고할 때는 그 원전의 맥락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것이다. 결국 [뮬란]의 플롯은 대대적으로 수정되었고, 그 결과 훈족과 싸워 중국을 구해내는 영웅의 이야기가 탄생했다.
초기 [뮬란]의 음악 작업에 투입되었던 사람은 [포카혼타스], [노틀담의 꼽추]에서 디즈니와 합을 맞춘 바 있는 브로드웨이 출신의 거장 스티븐 슈와츠였다. 그러나 슈와츠는 드림웍스의 [이집트 왕자] 작업 때문에 [뮬란]에서 하차해야 했고, 매튜 윌더와 데이비드 지펠이 대신 합류했다.
[아일 메이크 어 맨 아웃 오브 유I'll Make a Man Out of You]는 슈와츠가 지휘봉을 잡고 있을 시절 작업한 [위일 메이크 어 맨 아웃 오브 유We'll Make a Man Out of You]를 대체하는 곡으로서 작업되었다. 주어가 '우리'에서 '나'로 바뀌면서 정확히 어떤 부분이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두 제목 모두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본인이 선택하지 않는 이상) 남자가 될 수 없는 뮬란을 자꾸만 남자로 만들겠다고 하는 아이러니이다. 애초에 달성될 리 없는 계획을 노래하는 곡인 셈이다.
남자로 변장하고 남자의 역할을 수행하려 하는 여자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뮬란]을 이야기하며 성별이라는 주제를 우회하기란 어렵다. 삽입곡들만 봐도 그렇다. 전통의 가치와 순종의 미덕을 노래한 도입부의 [아너 투 어스 올Honor to Us All], 부모의 기대를 실망시키는 딸의 괴로움을 표현한 [리플렉션Reflection], 남자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표현한 [어 걸 월스 파이팅 포A Girl Worth Fighting For]를 포함한 [뮬란]의 모든 넘버가 성역할이라는 주제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돼 있다.
그리고 이 [아일 메이크 어 맨 아웃 오브 유]는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로서의 남성의 역할과 자질을 표현하는 노래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부분이 강인한 전사-남성의 모습을 자연의 성질에 빗댄 다음의 가사다.
You must be swift as the coursing river, With all the force of a great typhoon, With all the strength of a raging fire, Mysterious as the dark side of the moon.
너희들은 내달리는 강물처럼 날래야 하고, 거대한 태풍의 힘을 갖춰야 할 것이며, 솟구치는 불길처럼 맹렬해야 하고, 달의 어두운 표면처럼 신비로워야 한다.
이 가사의 유래가 '풍림화산風林火山'이라는 요약으로 유명한 [손자병법]의 한 구절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샹의 교육 철학은 꽤나 과학적이고 근본을 갖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 주 간의 훈련 과정을 몽타주로 그리는 이 시퀀스의 도입부에서 훈련병들의 상태는 샹의 이상과는 백만 리 정도 떨어져 있다. 샹의 실망감은 다음과 같은 가사로 표현된다.
Did they send me daughters? When I asked for sons. You're a spineless, pale, pathetic lot.
아들을 보내랬더니 딸이 온 모양이네. 줏대 없고 창백하고 애처로운 놈들 뿐이군.
함량 미달인 남자는 여자 취급을 받으며, 그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이 기준에 따른다면 뮬란은 모든 면에서 '남자'로서는 부적격으로 보인다. 체력도 문제지만, 뮬란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 야오 패거리의 방해 때문에 교육 성적도 바닥을 기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후렴구가 깔릴 때쯤, 뮬란이 각각 '규율'과 '힘'을 상징한다는 두 무게추를 기둥에 감고 올라가는 기지를 발휘해 모두를 압도하며 분위기는 반전된다. 때마침 노래의 후렴구인 'Be a man(한국어 번안은 '대장부')'이 깔리고, 이 일을 기점으로 뮬란에 대한 동료들의 평가는 반전된다.
한편 극의 후반부에서는 샨유가 점령한 궁으로 잠입하기 위해 뮬란이 묘안을 내는데, 동료 삼인방을 궁녀로 변장시키는 작전이다. 수염도 밀지 않은 채 화장을 떡칠한 삼인방의 어설픈 여장을 보여주는 대목에서 또다시 리프라이즈 버전으로 코러스가 부르는 후렴구 'Be a man'이 깔린다. 우연의 일치일 리는 없고, 당연히 남성성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에서 'Be a man'이 울려 퍼질 때마다 극 중에서 말하는 '제대로 된 남자'는 등장하질 않는다. 남자가 되라는 말을 집요하게 반복하는 이 노래를 통해 [뮬란]은 반대로 '남자'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그 안팎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뮬란]은 디즈니 여자 캐릭터의 새로운 상을 제시한 중요한 변곡점으로 평가받는다. 그와 함께 전 세계 30억 달러에 이르는 성적을 거둔 흥행작이면서, 디즈니 최초로 동양인 주인공이 출연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렇다 보니 이 작품을 소비하는 관점에도 매우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
우선 성역할과 관련된 레이어를 걷어내면 [뮬란]은 부모의 기대를 실망시키고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자식의 이야기로 읽힌다. 이것은 다름 아닌 동양인 및 아시아계 이민자 관객들과 공명하는 지점인데, Asian dad라는 밈이 있을 정도로 아시아계 가정의 높은 교육열과 학대에 가까운 훈육 방침은 서구권에서 악명이 높다. 이와 관련해 나는 이 영화에서 뮬란이 입대를 결심한 밤에 머리카락을 자르고 아버지의 갑옷을 챙겨 입고 나서는 장면을 제일 좋아하는데, 그 와중에 조상들에게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 같은 동양인으로서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한편 뮬란이 성별을 속이고 있다가 진실을 드러내는 과정은 트랜스젠더나 게이의 커밍아웃 서사로 소비되기도 한다. 뮬란과 로맨스를 형성하는 샹은 사실 남자일 때의 뮬란에게 반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물론 우스갯소리지만, 이 관점에서 보면 뮬란을 남자로 만들겠다는 노래 가사는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본래 성소수자를 뜻하는 약어 LGBT가 이 노래의 도입부 가사인 "Let's Get down to Business To defeat the Huns"의 줄임말이라는 밈도 유명하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뮬란]이 선취한 가장 중요한 지점이자 이 작품을 해석하는 데 빠질 수 없는 관점 중 하나는 새로운 '디즈니 공주'의 상을 세웠다는 것이다. [뮬란]은 하마터면 [차이나 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중국 스킨을 뒤집어 씌운 그저 그런 스테레오타입의 공주 이야기가 될 뻔했지만, 제작진의 반성을 거쳐 디즈니가 한 번도 보여준 적 없었던 새로운 이야기로 거듭났다. [뮬란]을 기점으로 더 이상 왕자를 기다리거나 꿈꾸는 수동적인 디즈니 공주의 전통은 재생산되지 않는다.
사실 뮬란을 '디즈니 공주'라고 불러야 할지도 의문이긴 하다. 일단 디즈니 팬덤 위키에 따르면 디즈니 프린세스라는 프랜차이즈가 존재하는데, 90년대 이후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주연급 여자 캐릭터는 거의 '디즈니 프린세스'의 자격을 얻는다. 이 애매한 기준 덕분에 왕족이 아닌데도 공주 취급을 받는 캐릭터들이 생겼고, 뮬란도 여기에 들어간다. 이런 혼란스러움을 디즈니 역시 인식하고 있는지, [주먹왕 랄프 2]의 다음 장면은 그래서 대관절 공주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조적인 농담을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라푼젤은 바넬로피가 '공주'의 조건에 해당되는지 알아보려고 이렇게 묻는다. "다음으로 백만 불짜리 질문. 사람들이 크고 강한 남자가 나타난 것만으로 네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처럼 말하니?" 바넬로피는 랄프를 떠올리며 그렇다고 대답하고, 다들 입을 모아 공주가 맞는다고 인정한다. 그런데 이 기준을 적용한다면 뮬란은 단언컨대 공주가 아니다. 반대로 남자들의 문제를 해결해준 영웅이면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