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kuna Matata - 라이온 킹(1994)
It means no worries
걱정이 없다는 뜻이야
For the rest of your days
앞으로 남은 날들 동안 말이지
It's our problem-free philosophy
이게 바로 우리의 문제없이 사는 철학이야
Hakuna Matata!
하쿠나 마타타!
아프리카의 개코원숭이는 종종 어미 사자가 사냥하러 나간 틈을 타 새끼 사자를 납치한다. 작은 새끼를 품에 안고 나무 위로 오르는 개코원숭이의 모습이 인터넷에 퍼졌을 때 사람들은 이 납치의 의도에 대해 다양한 추측성 댓글을 달았다. 개중에는 인간이 고양이를 키우듯이 사자를 애완용으로 키우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라이온 킹(The Lion King, 1994)]에서 라피키가 어린 심바를 들어올린 이후 사람들의 상상력은 밝고 귀여운 쪽으로 경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알려져 있는 진실은 꽤나 엄혹하다. 개코원숭이는 납치한 새끼 사자를 단체로 괴롭히다가 수 시간 이내에 죽음에 이르게 한다. 고기를 얻기 위해서이기도, 시간이 흘러 성체가 되면 자신들의 천적이 될 사자의 수를 미리 줄여 놓기 위함이기도 하다.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 모든 것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취급한다"는 노자의 통찰처럼, 자연은 인간의 상상이나 바람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런 이유 없이 주어진 것, 그저 그럴 뿐인 것을 천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서사를 붙여 설명하려 한다. 덕분에 문화와 예술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천성은 종종 엄연한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데 방해가 된다.
이를테면 [라이온 킹]이 그렇다. 2018년 [인크레더블 2]가 나타나기 전까지 [라이온 킹]은 명실상부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애니메이션 영화였다. 이 문화적 파급력은 엄청난 것이었기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라이온 킹]이 제시했던 꽤 많은 설정과 이미지를 무의식에 새겨 놓았다. 앞서 말했듯 개코원숭이가 새끼 사자에게 적대적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여기서 비롯됐고, 생태계에서 그저 스캐빈저(청소부) 역할을 맡았을 뿐인 하이에나가 비열함의 대명사로 소비되는 것도 그렇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사자가 동물들의 왕이라는 이미지를 확고하게 다져 놓았다.
[라이온 킹]은 이전까지의 디즈니 영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원작 동화가 존재하지 않는 오리지널 스토리라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오리지널이고 나쁘게 말하면 근본 없는 작품이라는 사실은 [라이온 킹]이 각본에서 드러내는 온갖 모순과 문제점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밤비가 아프리카에 가면 어떨까'라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는 이 프로젝트는 이야기의 구심점을 잡아줄 원작의 부재 때문에 각본의 구체화 과정에서 상당한 난항을 겪었다. 1989년에 나온 최초의 트리트먼트는 무리로부터 낙오된 심바가 '콰시'라는 개코원숭이와 '마부'라는 몽구스에게 길러진 뒤 '은도고'라는 사악한 자칼을 무찌르고 사자 무리를 다시 규합한다는 내용이었다. 디즈니의 CEO 마이클 아이스너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사장 제프리 카첸버그는 "더 셰익스피어스럽게"라는 주문을 넣었고, 몇 번의 수정 끝에 지금의 사바나 버전 [햄릿]이 만들어졌다.
흥미로운 것은 제목의 변천사이다. 맨 처음 아홉 페이지짜리 트리트먼트가 나왔을 때의 제목은 '칼라하리의 왕(King of Kalahari)'이었다. 이는 이후 '야수들의 왕(King of Beasts)'으로 바뀌고, 다시 '정글의 왕(King of the Jungle)'이 되었다가, 작품의 배경이 정글이 아니라 사바나라는 이유로 '라이온 킹'이 되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모든 제목에 집요할 정도로 '왕'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플롯과 캐릭터가 수없이 수정되는 와중에도 프라이드랜드를 사자들이 다스리는 왕국으로 묘사한다는 기획의 골자는 거의 바뀌지 않았던 셈이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사자를 '동물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가? 왕이 백성과 귀족 위에 군림하는 피라미드 형상의 계층 구조를 생각하면, 이와 비슷하게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사자를 왕에 대응시키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들의 왕은 자신의 영토와 백성에 대해 통치 행위를 한다. 즉 세금을 걷고 법을 집행하며 백성들을 보호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라이온 킹]의 사자들이 프라이드랜드를 어떤 형태로든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이 문제는 작품의 초반 무파사와 심바가 나누는 대화에 잘 드러난다.
심바: 왕은 뭐든 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무파사: 왕에겐 권력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단다.
심바: 더 중요한 것?
무파사: 세상 모든 것은 미묘한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다. 왕은 이 균형을 이해하고 모든 생명을 존중해야 해. 기어다니는 개미부터 뛰어다니는 영양까지.
심바: 하지만 우리는 영양을 잡아먹잖아요?
무파사: 그래. 하지만 우리는 죽어서 풀이 되고 영양은 그 풀을 먹지.
이 장면은 세상을 잘 모르는 어린 심바에게 무파사가 부왕으로서 심오한 가르침을 전달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그러나 심바의 '우리는 영양을 먹지 않냐'라는 반문이야말로 사자가 왕이라는 설정의 모순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언제든 잡아먹을 수 있는 대상과 어떤 식으로든 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 사자가 언제든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을 수 있는 포식자라는 점 때문에, [라이온 킹]에서 사자들이 다른 동물들과 맺는 관계들은 하나같이 기만적으로 보인다.
2016년작 [주토피아]는 이 지점을 정확히 파고들어 포식자와 피식자가 사회 계약을 맺고 함께 살아간다는 설정으로 모순을 해결했지만, 무파사는 포식자도 언젠가 죽어서 흙이 된다는 하나마나한 말로 이 모순을 대충 덮고 넘어간다. 이건 그냥 생태계의 작동 방식을 설명한 것일 뿐, 왕의 의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시 말하면 무파사는 이 왕국에서 왕으로서 특별히 하는 일이 없다.
나중에 스카가 왕이 됐을 때 프라이드랜드가 황폐화되는 것을 보면 반대급부로 무파사가 좋은 왕이었던 것처럼 보이긴 한다. 그러나 스카가 정권을 잡으면서 바뀐 것은 기껏해야 포식자들이 사냥을 더 마음껏 할 수 있게 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사자들이 만물 위에 군림하는 대가로 지켜야 하는 의무는 다른 동물들을 조금 덜 죽이는 것인가? 우두머리 사자의 결정으로 생태계 전체의 균형이 변화한다는 설정도 이해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다. 그건 자연의 회복탄력성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심지어 여기서 이어지는 장면은 방금까지 왕의 의무 운운했던 것들과 배치된다. 무파사는 보고를 하러 온 코뿔새 보좌관 자주에게 뒤를 돌아보라고 한 뒤 심바에게 그를 사냥하는 연습을 시킨다. 다행히도 불쌍한 자주는 작품의 결말까지 살아남긴 하지만, 이 장면에서 묘사된 '직장 내 갑질'은 왕이 그의 최측근마저 언제든지 잡아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장난이라고 보기엔 너무 폭력적이고, 바로 직전에 균형을 이해하고 모든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 것치고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없어 보인다.
무파사가 죽은 뒤 심바는 저 의문부호 투성이인 왕좌로부터 멀어져 미어캣 티몬과 흑멧돼지 품바의 곁에서 자란다. 티몬과 품바가 살고 있는 세계는 사자들이 통치하는 세계와 비교했을 때 모든 부분에서 반대이다. 우선 공간부터 대조적이다. 사자들의 궁전 프라이드 락은 남근처럼 높이 솟아 있는 데 반해 티몬과 품바가 다이빙을 하는 폭포는 중력에 의해 아래로 흐른다. 사자들의 세계는 사냥과 포식이 일상이고, 누가 왕위에 올라 암컷들을 거느릴 것인가를 두고 다툼과 찬탈이 수시로 일어나는 곳이다. 그러나 심바는 투쟁하는 대신 벌레를 잡아먹고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물론 벌레를 죽이는 것도 엄연하게는 살생이지만).
말하자면 심바는 아버지를 잃은 뒤 일종의 대안 가족에게 입양된 것처럼 묘사된다. 이 새로운 커뮤니티에서 '걱정 없다'는 스와힐리어 '하쿠나 마타타'를 노래하며 자라나는 심바의 표정은 진심으로 행복해 보인다. 사실 나는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꼭 현실을 바꾸지 않고도 지금 여기서 행복할 수 있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앞에서 짚었듯 스카가 무파사보다 특별히 더 나쁜 왕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왕위를 되찾을 필요성은 더더욱 느껴지지 않는다. 굳이 돌아가서 삼촌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어두운 진실을 마주하고 복수를 해야 할까? 어떤 진실은 모르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그러나 심바의 소꿉친구 날라의 등장으로 이야기는 급선회한다. 심바가 프라이드 락으로 돌아가서 삼촌과 싸워야 한다고 집요하게 주장하는 날라는 심바가 이곳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그들 덕분에 얻었던 위안 같은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군다. 방황은 그만하면 많이 했으니 이제 본가로 돌아오라고 말하는 한국 드라마의 재벌가 모친이 이런 재질일까? 왜 돌아가야 하냐는 질문에 날라는 그리 납득될 만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왕위를 뒤찾아야 해. 왜냐면 너의 의무이니까'라는 자가발전 같은 말과, 누가 봐도 노골적인 교미 장면인 [캔 유 필 더 러브 투나이트Can You Feel the Love Tonight] 씬이 날라가 내놓는 대답의 전부이다. 그리고 이 대책 없는 공세는 결국 심바를 움직인다.
심바가 아버지를 잃고 시련을 겪지만 결국 정해진 운명에 따라 왕이 된다는 [라이온 킹]의 서사 구조는, 은연중에 '하쿠나 마타타'가 그 자체로 목적지가 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깔고 있다. 소중한 사람들과 현재를 즐기며 살아간다는 삶의 자세는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지만, 마땅히 성취되어야 하는 어떤 정상성-이를테면 찬탈자를 몰아내고 정당한 왕위의 부계 계승을 완성하는 것-을 향해 깔린 궤도에서 탈선한 것처럼 그려진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정상성인가? 하쿠나 마타타 정신으로 아무 문제 없이 양부모와 살고 있다가, 소꿉친구와 뜨거운 밤을 보낸 뒤 갑자기 아버지의 환영을 보고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다며 사지로 뛰어드는 심바는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뭔가에 씌인 것처럼 보인다. 전제정치와 가부장제에 과몰입한 사자들의 광기가 극을 갑자기 절정으로 몰고 가는 와중에, 이성적인 현대인인 우리가 그나마 이입할 수 있는 대상은 티몬과 품바이다. 이를테면 날라는 성체로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 품바를 잡아먹을 뻔했다가 심바의 제지로 곧바로 친구가 되는데, 여기서 티몬만이 불편함을 느끼고 이렇게 말한다. "잠깐, 타임. 너는 이 아가씨를 알고, 이 아가씨는 너를 알아. 그리고 이 아가씨는 얘를 먹으려고 했는데, 모두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본편 [라이온 킹]의 자조적인 코멘터리 버전으로 만들어진 [라이온 킹 3]를 보면 이런 특징이 더욱 도드라지는데, 이 작품은 티몬과 품바가 극장에 앉아 [라이온 킹] 시간대의 일을 자신들의 시선에서 재구성한 영상을 보며 코멘트를 남기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을 보면 디즈니 역시 [라이온 킹]의 각본상 모순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작품의 첫 시퀀스에서 프라이드 랜드의 온갖 동물들이 미래에 자신을 잡아먹을 새끼 사자에게 절을 하는 기괴한 장면은 그 곁을 지나가던 품바가 방귀를 뀌는 바람에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냄새를 맡고 기절해버린 동물들은 멀리서 보면 절을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윽고 다른 동물들도 슬슬 눈치를 보며 절을 하기 시작했다는 식이다.
물론 때로 투쟁심은 삶에 필요하다. 티몬과 품바도 종막에는 심바를 따라 전쟁터로 나선다. 그러나 이들은 끝끝내 심바가 왜 왕위를 되찾아야 하는지에 대해선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친구인 심바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싸움의 각오를 다질 뿐이다. 그들에겐 그것만이 이해할 수 있는 진실인 것이다. [라이온 킹]의 두 친구는 진정한 '하쿠나 마타타'는 패배주의와 무력함에 물든 도피 같은 것이 아니라, 때로는 소중한 사람을 위해 용기를 내는 것까지도 포함하는 뭉클한 것임을 행동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