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굳이 마음을 쓰고 가슴이 아파야 하나요
영화 이퀄스를 어렵게 관람했다. 개봉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싹 다 내리냐.
내용은 비교적 예상 가능하게 뻔한 편이다(니콜라스 홀트 얼굴이 제일 재미있다). 다만 무채색과 인스타그램 필터를 씌운 듯한 연출은 플롯이나 세팅과 잘 어울렸다.
재미있었던 점이 두 가지 정도 있었는데 첫 번째는 영화에서 현실과 다른 세계관을 설정하고 관객이 그 세계관에 빠져들게 되었을 때 느끼는 생경함이다. 만지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뜨겁게 쳐다보고 싶은 마음이 defect가 되는 세계에 들어가자 그냥 쪽 하는 입맞춤, 손 잡는 것 하나도 그렇게 야하게 연출될 수가 있다는 점이 음란의 홍수 속에서 살다 보니 꽤 재미있게 느껴졌다.
두 번째는 영화의 세계관 상으로 스킨십 류의 것을 포함한 교육과정 상의 성교육이 현실 세계와는 크게 다를 수밖에 없을 텐데(의무 임신이라는 것이 존재할 정도, 이 공간에서 성역할이나 성별이 가지는 의미가 번식 이상이 되지 않는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배우지 않아도 잘... 하더라는... 점. 이것이 본성이고 인간 본능이라는 것이 이 영화의 주요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일전에 마광수 교수님께서도 가자, 장미여관으로! 에서 '러브 이즈 터치, 러브 이즈 휠링'이라 하시었으니.
한편으로는 인간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효율을 만드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감정을 제거하면서까지 효율과 생산성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다가도, 동시에 감정이라는 것이 없으면 이토록 효율적이구나 싶었던 것.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면 편한데, 왜 굳이 울고 웃고 가슴이 뻐렁쳐야 하나!
영화 속 아포칼립틱 세계에서 종말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인류는 자신을 '이퀄'이라고 부른다. 이 세상은 '선진국'과 '반도국'으로 양분되어 있는데 반도국은 과거의 흔적이 남은 미개한 폐허로서 unequal, 혹은 defective 한, 이퀄이 되기를 포기한 사람들의 탈출구로서 존재한다. 반면 선진국에서는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생활양식을 지니며 이 모든 것이 중앙 통제를 받는다. 최후의 생존자라는 절박한 상황에서 추구하게 된 이 극단의 효율, 공산주의가 이상대로 발달했다면 비슷한 모습을 하지 않았을까.
이 극단적으로 효율적인 인류의 명칭이 이퀄이라는 점은, 교육과정, 교복, 군대와 같이 획일을 통한 효율을 추구하는 현생 인류의 양태에서도 어렵지 않게 납득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강요된 획일로부터 나의 차별점을 만드는 것은, 이 영화에 따르면, 바로 미칠 듯이, 때로는 불쾌하고 성가실 만큼 나를 폭주시키는 감정이다.
영화에서도 재미있는 부분인데, 감정조절장애를 겪지 않는 이퀄들과 감정을 느끼는 이퀄들은 그 눈빛과 행동부터 다르게 느껴진다. 그림체부터 다르게 그려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감정을 전달하고자 하는 연기와 감정을 배제하고자 하는 연기까지도 역시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것인가 보다.
영화를 보고 나서 가만히 숨을 고르고 나에게 입력되는 감각으로부터 내가 무엇을 느끼는가를 가다듬고 있자니 과연 그것에서 나의 표정과 행동을 비롯한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하는구나 하고 새삼스러웠다, 그래서 아마, 사람들이 굳이, 비효율적으로, 마음을 쓰고 가슴이 아파가며 울고 웃는갑다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