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를 읽다
두 작가 가운데 페터 한트케의 작품을 먼저 선택하게 된 것은, ‘전위적인 문제 작가’로 불리는 페터 한트케가 써내려 갔을 그 ‘전위적’ 문장이 궁금했기 때문이에요. 스웨덴 한림원이 꼽은 페터 한트케의 수상 이유도 “독창적인 언어로 인간 경험의 주변부와 그 특수성을 탐구한 영향력 있는 작품세계를 보여 주었다”는 점이었다는 것도 한몫을 했습니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선정 이유가 “백과사전적 열정으로 삶의 한 형태로서의 경계 넘나들기를 묘사하는 데 있어 서사적 상상력을 보여줬다”였던 점과 비교했을 때, 서사적 상상력보다는 독창적인 언어에 대한 호기심이 좀 더 컸다고 할까요
페터 한트케는 세계 제2차 대전 중이었던 1942년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이민자였고, 페터 한트케는 그 어머니와 오스트리아에 주둔 중이던 유부남인 독일 병사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죠. 게다가 페터 한트케의 어머니와 결혼하여 한트케라는 성을 붙여 준 것은 생부가 아닌 다른 독일 병사였습니다. 훗날, 페터 한트케의 어머니는 노년의 건강 악화와 불행한 결혼생활을 비관하여 51세의 나이로 자살합니다. 그리고 페터 한트케는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벽촌에서 보냈습니다.
전쟁 통에 태어나 안정적이지 못한 가정에서 외로움과 가난을 겪으며 아무런 인프라 없는 고립된 작은 마을에서 한창 호기심 많고 감각적으로 예민할 시기인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면, 결국,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주관에 깊은 관심을 가지다 보면, 현실에 존재하는 지금의 나 자신만으로는 관심의 떡밥이 부족하게 되고, 결국 과거 회상과 허구의 공간 속에서의 나 자신으로까지 자아를 다층위로 바라보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러한 페커 한트케의 삶을 떠올리며 이 책을 표현론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페터 한트케라는 작가가 탄생하게 된 배경, 그리고 그 배경에서 탄생한 작품 가운데 하나인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를 읽기가 좀 더 쉬워질 것 같습니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주인공은 페터 한트케와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가이기도 합니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의 ‘이별’은 이 책의 서사 측면에서 우선, 주인공의 아내 ‘유디트’와의 이별을 뜻합니다. 이 책의 주인공이 뉴욕으로 떠나버린 유디트를 찾아 나서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죠. 그리고 이후 주인공이 유디트와 다시 만나 결국 평화적으로 이별하기로 하는 과정이 주인공의 시점에서 그려집니다. 책을 읽고 나서 가장 곱씹게 되었던 부분은 주인공이 책의 끝 무렵 만난 영화감독 존 포드가 했던 말인데요. “선생님은 왜 항상 ‘나’라는 말 대신에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세요?”라는 유디트의 질문에 존 포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함께하는 공적인 행동의 한 부분으로 작용하기 때문일 겁니다. 일인칭은 한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을 대표할 때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아라는 것은 으레 외부와 접촉하는 행동 주체로서의 ‘나 자신’만을 뜻한다고 여겨집니다. 반면 페터 한트케는 존 포드를 통해 행동 주체로서 어느 ‘집단’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 나아가 ‘나 자신’의 범주를 넘는 자아 개념을 제시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으레 집단의 평균점이 오히려 그 집단 내에서 달성되기 어려운 현상을 종종 발견하고는 하지요, 즉, 개별적 자아가 하는 행동이 곧바로 집단의 자아를 구성할 수 있다는 의견으로 읽혀져서,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