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이야기
프롤로그 - 네모칸의 움직임
저녁이 다가오면 건너편 성냥갑 모양의 아파트 창문에 하나둘 불이 켜진다.
낮에는 모두 비슷해 보이던 네모난 벽들이, 밤이 되면 조금씩 제각각의 얼굴을 드러낸다. 어떤 집은 형광등처럼 희고, 어떤 집은 노란 불빛을 머금어 둥글고 따뜻하다. 어떤 집은 거실만 환하게 밝고, 어떤 집은 주인이 비어 있는 듯 베란다에만 희미한 빛이 남아 있다.
그 창문들을 가만히 세어본다.
위로 스무 층, 옆으로 여덟 칸. 어림잡아 백육십 개의 삶이 저 네모칸 안에 담겨 있다.
그중 누군가는 오늘 하루를 처절하게 버텼을 것이고,
누군가는 이제야 겨우 무거운 외투를 벗으며 숨을 돌리고 있을 것이다.
아파트의 거실 등불은 저마다의 온도로 타오른다.
낮에는 닫힌 벽에 불과하지만, 밤이 되면 조금씩 달라진다.
그 안에서 각자의 밤이 시작된다.
세상이 멈춘 것 같던 시기, 나는 일을 그만두었다.
억울하게 변명을 해보자면, 나는 뉴스를 챙겨볼 여유조차 없던 평범하고도 치열한 직장인이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마을버스를 타고, 두 개의 다른 호선 지하철을 갈아타고, 역 계단을 거의 뛰다시피 올라가야 했다.
정확히 1분 빠른 9시 출근 체크를 해야 비로소 심박수가 가라앉던 아침들.
정치도, 사회도, 경제도 들여다볼 틈이 없었다.
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빽빽한 시간 속에 갇혀 살았다.
그래서 몰랐다. 세상이 멈추고 있다는 걸.
“어쩌자고 이 시기에 사표를 내서, 에휴.”
엄마의 탄식은 회사를 그만둔 뒤에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이어졌다.
현관문이 ‘찰칵’ 닫히고 나면, 나는 다시 이불 속으로 깊숙이 몸을 묻었다. 5분만 더 자고 싶어 안달이 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이제는 알람이 없어도 정확히 출근 시간에 눈이 떠졌다.
몸은 회사를 나왔지만, 내 안의 생체 시계는 여전히 사무실 책상 앞에 묶여 있는 기분이었다.
퇴사를 하고 나서 가장 먼저 달라진 건 밤의 무게였다.
자야 할 이유가 사라지자, 아침에 일어나야 할 목적도 함께 흐려졌다.
낮에는 괜히 바쁜 척 집안을 정리하고, 의미 없는 서류를 들춰보고, TV를 켰다 껐다 하며 시간을 죽였다.
하지만 밤이 되면 도망칠 곳이 없었다.
어둠이 방 안으로 밀려올수록, 역설적으로 지나온 낮의 소음들이 더 선명하게 고개를 들었다.
캡슐 커피를 내리면 기계가 내는 짧고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향이 방 안을 채웠다.
그 익숙한 향은 나를 다시 지옥 같던 출근길로 데려다 놓곤 했다.
전철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숨을 몰아쉬던 기억,
일보다 사람이 더 무거워 자존감이 구두 밑창처럼 닳아 있던 나날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늘 되뇌던 말을 이제는 유령 같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TV 속 화려한 쇼호스트의 웃음조차 나를 비웃는 것 같아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세상과 연결된 모든 코드를 뽑아버린 것 같은 고립감. 그 정적의 끝에서 나는 창가로 다가갔다.
낮에는 그저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였던 아파트가 밤이 되자 수천 개의 삶의 조각들로 분해되어 있었다.
어떤 집은 형광등처럼 희고 차가웠으며, 어떤 집은 노란 스탠드 불빛으로 둥글고 따뜻했다.
그중 유난히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집이 하나 있었다.
특별히 눈여겨본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밤이되면 보이는 풍경 속에서 그 불빛은 이상하게 오래도록 잔상에 남았다.
어느 날 밤, 커튼 사이로 사람이 서 있는 실루엣이 잠깐 눈에 들어왔다.
통화를 하는 것 같기도, 그저 밖을 내다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짧은 장면은 마치 내 거울을 보는 듯 머릿속에 깊게 박혔다.
나도 그랬다.
불을 켜둔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던 밤들이 있었다.
끊긴 통화음을 들으며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 불빛은 낯선 타인이라기보다,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섬'처럼 느껴졌다.
그 뒤로는 밤이 깊어질수록 창밖의 불빛들이 더 또렷해졌다.
잠이 오지 않는 시간에 내 마음이 먼저 그 빛에 공명했다.
이유 없는 중압감이 밀려올 때면 나도 모르게 창문을 열어 방 안의 공기를 갈아치웠다.
마치 내 쪽의 공기를 바꾸면 건너편 그 사람의 밤도 조금은 가벼워질 것처럼.
저 불빛에도 저마다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나는 묻지 않는다.
앞으로도 묻지 않을 것이다.
서로의 이름을 모른 채 존재를 확인하는 이 거리감이 오히려 다정하고 편안했다.
나는 늘 내가 고장 나 멈춰 서 있다고만 생각했다.
일을 그만둔 이후 세상과 나 사이에 투명한 막이 하나 생긴 줄 알았다.
그런데 밤마다 켜지는 저 불빛들을 보며 깨닫게 되었다.
멈춘 것은 삶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는 호흡일 뿐이며,
우리는 저마다의 속도로 여전히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어느 날 밤, 엄마가 퇴근하며 신발을 벗다 슬쩍 말했다.
“요즘은 좀 나아 보이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나도 모르게 아주 작은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새벽 세 시.
창밖에는 여전히 깨어 있는 불도 있었고, 이미 꿈속으로 사라진 불도 있었다.
나는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깊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노트북을 켰다.
어두운 방 안에서 화면이 가장 밝게 빛났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감도는 이 공간, 밤이 되면 아파트는 조용히 움직인다.
그리고 그 밤의 흐름 속에서,
나도 비로소 나의 밤을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