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면세점에서 가장 긴 줄을 자랑하는 곳은 입생로랑 뷰티 매장이 되었습니다. 2018년 입생로랑은 우리나라 모든 면세점을 통틀어 5번째로 매출이 높은 브랜드였죠. 지금은 입생로랑이 화장품으로 더 유명하지만, 사실 입생로랑은 화장품이 아니라 패션에서 시작된 브랜드입니다.
입생로랑의 창업주 이브 생 로랑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디자이너 중 하나입니다. 1983년 생존하는 디자이너로는 세계 최초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아트 뮤지엄에서 25년 회고전을 가졌고, 그를 기리는 박물관까지 있을 정도이죠.
이브 생로랑은 천재입니다. 무려 2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실력만으로 프랑스 국보급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가 됐죠. 하지만 우울증, 신경쇠약, 알코올 중독 등으로 점철되었던 그의 삶은 행복하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웠죠. 고흐, 이상 같은 천재 예술가들의 인생처럼 말이에요.
그는 프랑스인이지만,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던 아프리카 알제리에서 1936년에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두 여동생 그리고 어머니와 패션 잡지를 보고 인형놀이 등을 즐겼던 그는 유년 시절에 호모라며 괴롭힘을 당했죠. 그의 우울증은 아마 그때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의 어머니는 그런 그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죠. 이브 생로랑이 여성 옷들을 스케치한 걸 눈여겨보고는, 프랑스 패션 매거진 보그 편집장 미셸 브뤼노프(Michel Brunhoff)에게 그를 데려가 그의 스케치를 보여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브 생로랑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렸어요. 편집장의 눈에도 그는 천재였거든요. 브뤼노프의 권유에 따라 그는 파리에서 패션 디자인을 공부했고, 세계적인 대회에서 칼 라거펠트를 제치고 1위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브뤼노프에게 다시 찾아가 자신의 스케치를 한번 더 보여줬죠.
브뤼노프는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그의 스케치가 크리스찬 디올이 그 날 아침 브뤼노프에게 비공개로 보여줬던 스케치와 똑같았거든요. 당시 크리스찬 디올은 프랑스에서 국보급 패션 하우스였습니다. 프랑스 패션 매출의 절반 이상이 크리스찬 디올에서 나왔죠. 브뤼 높은 당장 이브 생로랑을 크리스찬 디올에게 데려갔고, 디올은 그 자리에서 이브 생 로랑을 채용했습니다.
이브 생로랑은 크리스찬 디올을 진심으로 존경했고, 크리스찬 디올도 이브 생로랑을 많이 아꼈다고 해요. 그렇게 디올과 일한 지 채 3년이 되지 않은 1957년 어느 날, 디올은 급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브 생로랑이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가 됐어요. 불과 21살에 말이죠.
1958년 1월 이브 생로랑은 크리스찬 디올을 위한 첫 컬렉션을 선보였는데 이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쇼가 끝나자 파리 시민들이 '이브 생로랑이 프랑스를 구했다!'며 그의 이름을 연호할 정도였어요.
이렇게 되자 크리스찬 디올의 수장이었던 마르셀 부삭은 그를 교체하고 싶어 졌어요. 마침 알제리 독립전쟁이 있었고, 알제리 태생의 이브 생 로랑은 징병되어 군입대를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마르셀 부삭은 이브 생로랑이 군대에 있는 동안 계약 기간이 남아있음에도 그를 해고했죠.
섬세하고 병약했던 이브 생로랑은 군생활 3주 만에 신경쇠약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거기서 무단 해고 소식까지 들었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이 위기를 기회로 바꿨는데요. 사랑의 힘 덕분이었습니다. 그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연인이었던 피에르 베르제가 그를 대신해 디올에 소송해 48,000 파운드를 받아냈고, 후원자까지 데려온 겁니다. "당신은 천재니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브 생로랑은 아마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거예요. '프랑스 패션의 정수나 다름없는 생로랑이, 상업적인 미국 디자이너 손에 맡겨졌다니'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실제로 톰 포드는 가장 존경하는 디자이너로 이브 생로랑을 꼽았지만, 이브 생로랑은 톰 포드의 생로랑 데뷔 컬렉션에도 참가하지 않았다고 해요.
톰 포드는 이브 생로랑처럼 세계적인 디자이너였지만 그와는 결이 달랐어요. 이브 생로랑이 내성적인 천재 예술가 스타일이었다면, 톰 포드는 천재인 동시에 마케터 기질이 다분한 소위 '인싸'였달까요. 이브 생로랑 눈에 톰 포드와 그가 이끄는 생로랑은 돈에 미친, 영혼 없는 패션 디자인처럼 보였을 거예요.
결국 이브 생로랑은 2002년 1월 마지막 패션쇼를 끝으로 패션계에서 은퇴했고, 2008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죠. 이브 생로랑이 영면에 들기 며칠 전 피에르 베르제와는 공식적인 부부가 되었고요.
특히 마라케시의 마조렐 정원(Jardin Majorelle)에서는, '모로코의 색을 통해 색이라는 것이 내게로 왔다'라고 말한 이브 생로랑의 이야기에 완벽히 공감할 수 있을 거예요. 또렷하고 아름다운 색상의 건물들과 전 세계에서 온 이국적인 식물들이 어우러진 마조렐 정원은 마치 예술 작품을 현실로 옮겨놓은 것만 같죠.
마조렐 정원은 프랑스 화가 자크 마조렐(Jacques Majorelle)이 1919년 마라케시의 구시가지에 만든 정원인데, 마조렐 사후에 폐허가 될 위기에 놓였던 이 곳을 이브 생로랑과 피에르 베르제가 매입해 본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어요. 예술을 사랑하는 이브 생로랑과 피에르 베르제다운 선택이었죠.
이브 생로랑이 영원히 잠든 곳이기도 한 이 마조렐 정원에서, 이브 생로랑의 발자취를 한번 느껴보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