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론가 갑자기 떠난다. 무심코 들어선 골목길을 산책한다. 기대치 않았던 사람과 시간을 보낸다’. 여행을 하면서 한 번쯤 꿈꾸는 것들이다. 가성비를 높이려 빡빡한 일정을 세울 때마다 마음 한편으로는 무작정의 여행을 기대하곤 하는데 이런 낭만적인 여행을 나는 밀라노와 볼로냐에서 했었다.
작년 이맘때쯤 한국영화 한 편을 봤다. 영화 말미에 에드워드 호퍼 그림이 나왔다. 언젠가 꼭 실제 그림을 보고 싶었다는 바람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혹시 유럽에 전시가 있지는 않을까, 검색을 했더니 마침 볼로냐에서 전시 중이었다. 그곳으로 가는 가장 저렴한 방법을 찾았다. 원하는 일정에 밀라노로 가는 값싼 비행 편이 있었다. 밀라노에서 볼로냐까지는 기차로 갈 수 있는 거리. 볼로냐만으로도 좋은데 밀라노까지 들르게 됐으니 점점 신이 났다. 그렇게 해서 3박 4일 동안 밀라노와 볼로냐를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영화 덕분에 가게 된 볼로냐. 그곳으로 가기 위해 거쳐 간 밀라노. 떠남의 이유는 우연이었다. 더욱더 특별해진 까닭은 이 여행을 계속해서 우연이 이끌어주었기 때문이다.
호스텔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 하루 동안 시간을 보냈고, 걷다가 들어선 서점에서 따뜻한 친절을 받기도 했다. 내 앞을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을 사진 찍다가 말을 걸어오는 이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우연이 만들어준 여행의 재미였다. 호스텔에서 그저 인사뿐이었다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었고, 그 골목을 지나가지 않았으면 친절을 느낄 수 없었다. 밀라노로 떠날 기차 시간이 남아 때울 요령으로 앉아있었던 광장, 그 계단이 아니었다면 대화를 나눌 수 없었을 것이다.
밀라노의 호스텔에서 만난 말레이시아 청년 Guna Seelan. 런던에서 대학을 막 졸업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유럽을 혼자 여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Guna와 함께 [최후의 만찬]을 보고 두오모 대성당을 올랐다. 서로 열심히 사진도 찍어줬다. 무엇보다 마주 앉아 앞으로의 삶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도 나눴다. 노트를 꺼내어 지금까지 메모했던 페이지를 보여주며 자신을 이야기해 준 Guna가 기억난다.
전시회로 가는 길에 우연히 들어선 서점. Buon giorno라고 인사한 뒤 나가려던 내게 지하에도 좋은 책들이 많다고 애써 영어로 설명해준 것이 고마워 발길을 멈추고 천천히 둘러보았다. 잠시 후 편히 앉아서 보라며 갖다 준 의자. 그 친절함에 마음을 전하고 나왔다.
내게 말을 걸었던 볼로냐가 고향인 Alberto. 광장 계단에 나와 책을 읽고 있을 때부터 이 도시에 살고 있지 않을까, 곁눈질을 하며 지켜보고 있던 터라 말을 걸었을 때 반가웠다. 볼로냐라는 도시는 첫 번째 대학이 설립된 도시답게 예로부터 유학생들이 많아 도시 자체가 외국인에게 관대하다고 했다. 현재도 외국인 유학생들을 지원하는 단체나 모임이 활발하다고 소개한 Alberto는 산 페르로니오 성당이 지어지게 된 유래를 설명해주기도 했다.
같은 여행지를 느끼는 감정은 모두 제각각이다. 나에겐 좋은 기억의 도시가 누군가에겐 다시는 가기 싫은 곳일 수 있다. 이탈리아의 볼로냐와 밀라노가 그렇다. 화려한 문화적 유산이 없다 보니 비교적 심심한 도시라고 생각할 수 있는 볼로냐. 걸작 [최후의 만찬]과 두오모 성당을 볼 수 있지만 도무지 매력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밀라노. 하지만 이 두 도시는 나에게 각별하다. 우연이 여행을 이끈다면 얼마나 즐거울 수 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별로였다는 사람을 데리고 가고 싶음은 물론이다.
July,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