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리 Jun 29. 2022

'슬픔'이라는 단어보다 더 슬픈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얼마 전 언니 장례식이 있었다. 


2년 전 희귀병에 걸린 언니는,, 발병한 지 한 달 만에 식물인간이 되었다.

잘 웃고 여행 가는 거 좋아하던 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침대에 누워 콧줄을 통해 음식물을 먹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 병은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없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다는 그 병원에서는 길어야 6개월 살 수 있다며 해줄 게 없다면서 퇴원하라고 했다.

그 후 언니는 요양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다 코로나가 터졌다. 

언니를 가까이에서 볼 수도 없었고, 언니 손을 잡아줄 수도 없었다.

엄마와 우리 자매들은 간병인을 통해 영상통화를 하면서 언니에게 말을 걸었고 노래도 불러주었다. 

평소에 언니가 노래를 좋아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눈을 감고 있다가도 전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엄마의 노랫소리를 들으면 언니는 눈을 번쩍 떴다. 

간병인 말에 의하면, 언니가 많이 힘들 텐데도 엄마와 자매들이 전화를 하면 아픈 것도 참고 잘 듣고 있다고 했다. 

언니의 병은 뇌가 점점 파괴되는 질병이므로 의학적으로는 이미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상태여야 했다. 

하지만 영상통화를 하면 언니가 내 말을 듣고 있다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언니가 느닷없이 우리 곁을 떠나버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막상 언니가 되돌아오지 못하는 먼 길을 떠나버리자,, 뭐랄까,, 내 존재도 같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언니의 죽음은,,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느꼈던 감정과는 또 달랐다.

슬프다는 표현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슬픔보다 더 깊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찾을 수 없다는 게 화날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다.


여든 넘은 엄마는 언니 장례식장에 오지 못하셨다. 

언니는 엄마에게 자식이자 남편이자 의논 상대였다.

엄마는 아직도 언니가 병원에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언니가 죽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몸이 며칠 사이에 더 작아진 것 같았다. 


언니의 장례식은 천주교 의식으로 치러졌다. 

신부님이 오셔서 장례 미사도 치러주셨다.

장례식을 치르는 내내 정말 많은 손님이 찾아와 언니의 죽음을 슬퍼해주었다. 

언니랑 같은 성당에 다녔던 한 지인은 조의 문자를 받고 언니가 모친상을 당했다는 말인지 알고 왔다가

언니의 영정 사진을 보고 통곡을 했다. 


언니의 장례식을 지켜보니,,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언니는 훨씬 더 좋은 사람이었다. 

좀 더 많이 만나서 얘기하고 밥먹고 수다떨고 여행 가지 못해서 많이 미안하고 속상하고 후회스러웠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남겨진 우리 자매들은 언니가 잠들어 있는 강화도 갑곶순교성지에 종종 간다.

언니의 납골함 앞에서 이야기도 나누고 울다가 또 웃기도 하면서 그렇게 슬픔을 나눠서 가진다. 

나는 언니 살아 있을 때 언니한테 잘못했던 일을 고백하며 사과했다.  

착한 언니니까 이렇게 말해주었겠지..

"이구,, 그러니까 언니한테 잘해라."


언니가 보고싶다. 



삼우제 때 갑곶순교성지에서 엄마가 언니한테 쓴 글.   때가 되면 우리는 모두 같은 곳에서 만나겠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