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던 피터슨, [12 Rules for Life] 발췌
[OVERTURE]
이 책은 긴 역사와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단 짧은 역사부터 시작해 보자.
2012년에 나는 쿼라(Quora)라는 웹사이트에 답변을 달기 시작했다. 쿼라에서는 어느 누구도 종류와 상관없이 온갖 질문을 올릴 수가 있고, 어느 누구도 답변을 달 수가 있다. 독자들은 답변이 마음에 들면 ‘공감(upvote)’을 누른다. 만약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역시 그것에 ‘비공감(downvote)’을 클릭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가장 유용한 답변은 높은 순위로 올라가고, 그렇지 못한 답변은 점점 내려가서 결국 사라진다. 나는 이 웹사이트를 호기심 충만하게 바라봤다. 누구나 답변을 달고, 그것을 토대로 자유롭게 순위가 정해지는 환경이 좋았다. 물론 종종 난상 토론이 벌어져 눈을 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진 적도 있었고, 같은 질문에 다양한 범위의 답변이 달려있는 것을 흥미롭게 보기도 했다.
교편에서 잠시 내려와 쉴 때에, (혹은 일부러 피할 때) 나는 쿼라에 왕왕 접속해서 내가 참여해도 괜찮은 질문들을 검색했다. 나는 의도적으로, 물론 답변을 달게 되었지만, 이런 질문들을 찾았던 것 같다. “행복과 만족에는 차이가 있을까?”, “나이가 들수록 더 좋아지는 건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건 무엇일까?”
쿼라 측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답변을 봤는지, 그리고 얼마나 높은 순위를 당신이 차지했는지 알려준다. 이로 인해서, 당신은 순위가 얼마쯤인지를 알 수가 있고, 당신의 아이디어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의 가치관을 배울 수 있다. 질문의 답변을 본 사람들 가운데서 ‘공감’이라는 버튼을 클릭하는 비율은 적다. 쿼라의 “우리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답변을 처음으로 한 지 5년이 지난 지금, 2017년 7월에 나는 이 서문을 쓰고 있는데, 그 질문의 나의 답변은 현재까지 1만 4천 명이 봤고, 무려 133번이나 ‘공감’을 받았다. 또한 “나이”에 관련된 질문에 내가 단 답변은 지금까지 7천2백 명이 봤고, 36번의 ‘공감’이 나타났다. 홈런을 친 건 아니다. 하지만, 기대한 만큼 호응을 이끌어냈다고 생각한다. 쿼라 같은 웹사이트에서는 대부분의 답변은 약간의 반응을 불러일으키지만, 오로지 아주 극소수의 답변들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많은 관심을 촉발시키기 마련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다른 질문들에도 답변을 달았다.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가장 귀중한 가치는 무엇인가?” 나는 이 질문의 답변을 리스트 형식으로 썼다. 혹은 몇 가지는 아주 진지하게, 다른 몇 가지는 놀림조로 빈정대게 작성했다. “당신의 고난에 대해 고마움을 가져라.”, “당신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아라.”, “안갯속으로 숨지 말아라.”, 그리고 몇 개 더 있었다. 쿼라를 접속하는 사람들은 이 리스트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내 답변에 의견을 달거나 공유했다. 주로 이런 반응이었다. “이 리스트를 당장 인쇄해서 레퍼런스처럼 여길 거예요. 왜냐하면, 단순히, 경이로운 리스트이니까요.”, 아니면, “당신이 이겼어요, 쿼라. 그러니까 이 웹사이트, 이제 문 닫읍시다.” 내가 교편을 잡고 있는 토론토 대학의 학생들도 마찬가지로 나한테 다가와서 그 답변이 얼마나 좋은지를 말해주었다. “귀중한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지금까지 약 1만 2천 명 정도가 봤으며, 2천 3백 명으로부터 “공감”을 얻었다. 쿼라에 등록된 질문 60만 가지 가운데서 “공감”을 약 2천 개 정도 얻은 답변은 고작 1백여 개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나 질질 끄는 나의 사색이 사람들의 아픈 곳을 건드렸나 보다. 백분위로 환산하자면 나는 99.9%에 오를 만한 답변을 한 셈이다.
내가 삶을 대한 몇 가지의 규칙 리스트를 작성할 때는, 이것이 나중에 커다란 호응을 일으킬지 명확히 예상하지는 못했다. 아주 다양한 질문 게시물을 보면서, 나는 단 몇 달 동안에 60가지 이상의 답변을 제출하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쿼라 측은 최고의 시장 조사를 제공한다. 답변 작성자가 익명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객관적인 수치가 도출 가능하다. 쿼라가 내놓는 결과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사심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결과에 더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나의 답변이 엄청난 반응을 이끌게 된 이유에 대해서 고심했다. 삶의 규칙들이 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 사이의 올바른 균형을 이뤄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아마도 사람들이 규칙이 암시하는 어떤 구조에 끌려서 그런 걸까, 또 아니면, 그저 이 리스트를 좋아해서 그런 걸까.
리스트를 작성하기 몇 달 전쯤, 다시 말해서 2012년 3월쯤에, 나는 출판사 대리인으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다. CBC 라디오의 “행복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말하세요(Just say no to happiness)”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나의 대담을 그녀는 들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 프로그램에서 행복이 인생의 적절한 목표라는 주제에 비판적인 시각을 표출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나는 독일 나치나 소련 등 어두운 역사를 표현한 책들을 나에게 주어진 것 이상으로 많이 읽었다. 강제노동수용소의 참상을 편지로 전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은 한때 “한심한 이념(pitiful ideology)”이라는 말을 끄집어내면서 “인간은 행복을 누리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상은 오로지 “수용소 작업반장의 곤봉에 의한 폭력으로 나타났다.”라고 표현했다. 위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인생에 수반되는 고통은 ‘행복이야말로 개인에게 있어 적절한 추구 수단’이라는 사상을 대놓고 비웃는다. 그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나는 행복 말고, 더욱 진중한 의미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한 나는 그러한 의미의 본질은 과거의 위대한 이야기들 안에서 끊임없이 재현되고, 행복이 아니라 고통을 직면했을 때, 그것이 한층 성장할 만한 성격을 지녔다고 지적했다. 이 내용이 지금 쓰는 이 책의 긴 역사에 해당한다.
1985년부터 1999년까지, 나는 나만의 또 다른 유일한 저서인 [의미의 지도: 신념의 구도]를 쓰고자 매일 3시간을 저술 작업에 소비했다. 이 기간 내내, 그리고 작업이 완료된 이후로도 나는 그 책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초반에는 하버드 대학에서, 지금은 토론토 대학에서 하고 있다. 나는 2013년에 유튜브가 영향력을 발휘하는 과정을 목격하면서, 그리고 캐나다의 공영 방송국인 TVO에 직접 출연해 강좌를 통한 인지도 덕택에, 나는 학교 강의와 대중 강연을 촬영해서 온라인에 무료로 업로드하기로 결심했다. 이 플랫폼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2016년 4월까지 수백만 명 이상이 나의 영상을 시청했다. 하지만 이 시점 이후로는 시청자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는데,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1천8백만 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부분적으로나마 이런 인기 때문에 나는 정치적인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결국 너무나도 지나친 관심을 받고야 말았다.
정치적인 부분은 다른 얘기다. 아마도 또 다른 책에서 다루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의미의 지도]에서 인류 초기의 구전 문학에서 파생된 과거의 위대한 신화 및 종교적 일화가 서술적이기보다는, 의도적인 면에서 도덕적에 가까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의 과학자들처럼, 세상에 대한 탐구보다는 개인의 도덕, 즉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가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졌다. 나는 우리의 조상들은 세상을 하나의 물질로 바라본 게 아니라, 하나의 연극 무대로 바라봤다고 서술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어떻게 세상이 하나의 무대이고, 그것을 구성하는 주된 분자들은 혼돈(Chaos)과 질서(Order)라고, 여타 다른 물질적인 요소는 없다고 믿었는지를 긴 분량으로 설파했다.
질서는 당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잘 알려진 사회적 규범에 따르고, 예측 가능하면서 협조적인 행동을 하는 곳을 의미한다. 사회적 구조, 발견된 영역, 그리고 익숙함이 여기에 속한다. 질서 있는 상태는 상징적으로, 그리고 상상으로 남성성으로 묘사되곤 한다. 성군과 폭군, 이런 이질적인 요소가 서로 영원히 맞물리는 상태이면서, 구조와 억압이 동시에 이뤄지는 사회이기도 하다.
이와 반대로 혼돈은 예상치 못한 것이 벌어지는 곳, 혹은 때이다. 일반적인 형태의 혼돈은 당신이 파티에 있는 사람들에게 농담을 던진 후, 그들 사이에서 침묵과 부끄러움만이 나타난다고 생각할 때이다. 혼돈은 더욱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거나, 실직인 상태에서 파멸에 가까운 형태로 발생하기도 한다. 상징적으로 질서가 남성성으로 표현되는 반면에 혼돈은 상상을 통해 여성적으로 여겨진다. 아주 친숙하고 흔한 환경에서 갑자기 예상치 못한 새로운 것이 불쑥 튀어나오는 상태. 창조와 파괴, 새로운 것의 원천과 망자(the dead)의 행선지(자연은 문화와 반대 작용으로 탄생과 죽음을 동시에 지닌다).
질서와 혼돈은 노장 철학(도교)의 유명한 그림에서 나오는 양과 음이라 할 수 있다. 각기 다른 두 가지의 요소가 서로를 맞대고 있다. 질서는 흰 바탕에 남성성을, 혼돈은 검은 바탕에 여성성을 의미하며, 대조를 이룬다. 하얀 바탕의 검은 점, 그리고 검은 바탕의 하얀 점은 변화의 가능성을 나타낸다. 두 가지의 상반되는 요소들이 단단하게 있을 시에 어디선가 미지의 세계가 슬그머니 희미하게나마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그 폭을 점차 넓혀간다. 이와 정반대로는, 모든 요소들이 무너질 경우, 혼돈과 재난에서 새로운 질서가 탄생된다.
노장 철학 신봉자들에게 의미는 뒤엉킨 두 요소라도 그 사이의 희미한 경계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 경계를 향해 걷는 것 자체가 인생의 길 위에 서 있는 거나 마찬가지며, 신성한 “길”이라고 믿는다.
이것이야말로 행복보다 더욱 나은 덕목이다.
내가 언급했던 그 출판사 대리인은 CBC 라디오 방송에서 내가 이 주제로 토론한 것을 청취했다. 방송을 듣고 나서 그녀는 보다 심층적인 질문을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고 한다. 그녀는 내가 이 주제로 일반적인 대중을 위한 책을 집필할 관심이 있는지를 이메일로 물었다. 나는 빽빽한 분량의 저서인 [의미의 지도]를 보다 손쉽게 읽을 수 있는 편집본을 이미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편집 과정에서, 그리고 결과물에서도 나는 특유의 활력을 찾을 수 없었다. 혼돈과 질서 사이를 정립하지도,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도 못한 가운데서 그저 과거의 나 자신과 저서를 자꾸만 모방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유튜브에 업로드되어 있는 TVO의 ‘빅 아이디어’라는 방송 강의들 가운데 일단 네 편 정도만 보라고 제안했다. 그녀가 이 영상들을 보면, 대중에게 보다 쉽게 스며들 수 있는 책을 저술할 때 과연 어떤 주제들을 집어넣어야 하는지를 가지고 많은 정보들을 추려내며 상당이 괜찮은 의논을 함께 할 수 있을 거라고 내다봤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몇 주 후에 그녀는 동영상들을 다 시청하고, 동료와 토론을 했다면서 나에게 다시 연락을 주었다. 그녀의 관심사는 좀 더 고조되었고, 출판 프로젝트에 보다 많은 열의를 보였다. 조짐 같은 게 좋았지만, 나에게는 그저 뜻밖이었다. 내가 말한 내용에 관해서 사람들이 낯선 유형의 진지함이 곁들인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때마다 나는 깜짝 놀라곤 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초반에는 보스턴에서, 지금은 토론토에서 계속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매우 놀라울 뿐이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내가 알려준 내용을 진실로 이해했다면, 언젠가 그 대가를 치를 지옥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은 후에 어떤 진실을 마주할지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라도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녀는 그것이 무얼 의미하든지 간에, 한 개인이 인생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갖춰야 할 것들을 가이드라인으로 써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나에게 보냈다. 그 순간, 나는 쿼라에 쓴 리스트가 갑자기 떠올랐다. 그리고 쿼라에 답변을 단 이후에 이럭저럭 그 리스트에 대한 추가적인 생각도 글로 서술했다. 사람들도 이 리스트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용으로 한 긍정적인 피드백을 많이 보내주었다. 나는 쿼라의 리스트와 대리인의 제안 사이의 뭔가 새롭지만 꽤 괜찮은 적정선이 있을 거라고 느꼈다. 나는 그래서 새로운 리스트를 보냈다. 그녀는 만족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나의 친구 겸 제자인, 또한 소설가 겸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던 그렉 허위츠(Gregg Hurwitz)는 새로운 책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이는 나중에 ‘엑스라는 고아(Orphan X)’라는 스릴러 작품으로 나왔고,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허위츠 역시 나의 리스트를 좋아했다. 그는 ‘엑스라는 고아’에서 여성 주인공인 미아(Mia)를 내세웠는데, 리스트에 관련된 내용이 하나씩 진행될 때마다 그녀는 그것을 냉장고에 붙인다. 이런 장면들은 리스트의 매력에 대한 나의 추정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근거이다. 나는 대리인에게 각 규칙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써서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동의를 표했고, 나는 책의 대략적인 내용의 제안서를 가능한 많이 썼다. 실제로 각 규칙에 대해 쓰기 시작할 때면, 내용은 전혀 줄어들지가 않았다. 내가 원래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나 보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나의 첫 번째 저서를 저술하고자 오랜 기간 동안 자료를 수집했었기 때문이다. 역사와 신화, 신경 과학, 정신 분석, 아동 심리학, 시, 그리고 성경의 수많은 일화들까지 연구했다. 괴테의 파우스트, 밀튼의 실낙원, 단테의 지옥편을 읽었고 내용 대부분을 이해했다. 그것이 좋든 싫든, 나는 하나의 복잡한 문제의 답을 찾고자 모든 걸 합쳤다. 냉전 시대의 핵 교착 상태가 이뤄진 이유, 혹은 여러 이유들을 알고 싶었다. 나는 신념 체계가 너무나 중요한 나머지 자신들을 보호한답시고 세계의 나머지를 파괴하려는 위험을 짊어지려고 하는지를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로 간 공유하는 신념 체계가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나머지 하나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결국 깨달은 나는 그러한 체계는 신념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동일한 관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서 상호 예측이 가능하다. 그들은 상대방의 기대와 욕망에 맞춰 행동한다. 그들은 협동을 할 수 있다. 그들은 평화롭게 경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는 심리적 양상으로, 그리고 어쩔 때는 직접 행동으로 촉발되는 하나의 공유된 신념은 그들이나, 혹은 전혀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걸 단순히 압축해 버릴 뿐이다. 또한 공유된 신념은 세계를 단순화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서로 상대방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잘 아는 사람들일수록 세상을 길들이고자 함께 행동할 여지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조직의 유지 관리에 단순화보다도 더욱 필수적인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만약 단순화가 위협을 받는 다면, 그건 한 국가가 흔들리는 것과 같은 파급력을 지닌다.
자신들이 믿는 것을 위해 투쟁을 할 거라는 것은 그리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저,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과 기대와 욕망의 일치를 유지하고자 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자신들의 기대와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적절한 균형을 계속 유지하고자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평화적으로, 예상 가능하게, 그리고 생산적으로 다 같이 살아가는 균형을 유지한다는 게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그리고 이 균형은 불확실성과, 그에 따라 불가피하게 촉발되는 견딜 수 없는 감정들의 아수라장(chaotic mix)을 줄인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한 사람을 가정해 보자. 둘 사이에 맺어진 신성한 사회적 조약은 마침내 파기되었다. 행동은 말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고, 배반 행위는 친밀한 관계에서 허술하지만 그래도 조심성 있게 협상된 평화에 엄청난 지장을 준다. 배신의 결과로써, 사람들은 혐오감, 경멸, 죄책감, 불안감, 분노와 두려움 같은 끔찍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충돌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고, 종종 매우 치명적인 결과를 자아낸다. 공유된 신념 체계는, 다시 말해서 절충된 행동과 기대를 서로 간 공유하는 체계이다. 이 체계는 모든 종류의 강력한 권한을 통제하고 조절한다. 사람들이 심리적 공포나 혼돈과 같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미리 막는 무언가를 보호하고자 투쟁을 벌이는 건 당연한 이치이다(만약 그 감정이 지속될 경우에는 나중에는 다툼과 전쟁으로 변한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공유된 문화적 체계는 인간의 상호작용을 안정화시키지만, 동시에 가치의 체계를 지니는데, 여기서 가치만의 계급이 생기며, 어떤 가치는 우선적으로, 중요한 성질을 띠지만, 다른 것은 그렇지 않게 여겨질 수도 있다. 가치의 체계와 같은 것이 없을 경우에 사람들은 단순히 행동을 하지 못한다. 기실, 심지어 그들은 인지 조차도 못한다. 왜냐하면 행동과 인지는 하나의 목표를 요구하는데, 그것은 정당해야 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스스로 가치를 입히기도 한다. 우리는 목표들과 관련된 긍정적인 감정들을 수많이 경험한다. 우리 스스로가 앞을 향해 정진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렇게 행복한 감정이 들지 않는다. 이때 그 정진(혹은 진보)은 가치를 암시한다. 더욱 최악인 점은, 긍정적인 가치가 부재하는 삶의 의미는 단순히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정서적으로 연약한 존재이고, 고통과 불안은 인간의 존재에 있어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존재에 내재하는 고통에 맞서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반드시 심오한 가치 체계에 내재하는 의미를 찾아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존재 자체의 공포가 급속도로 널리 퍼지기 시작한다. 결국, 절망과 체념을 앞세우는 허무주의가 고개를 들 것이다.
가치가 없다면 의미도 없다. 하지만 가치 체계들 사이에서도 충돌의 여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쩌면 금강석처럼 매우 단단한 바위와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곳 사이에 영원히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 집단 중심의 신념을 잃어버릴 경우에 인생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고 비참하다. 집단 중심의 신념을 되찾을 경우에는 다른 집단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서양에서 우리는 부분적으로나마 집단 분쟁의 위험을 줄이고자 우리의 전통, 종교, 그리고 심지어 국가 중심의 문화까지 탈피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점차 무의미한 절망감에 제물로 되어가고 있고, 결과적으로 아무런 개선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의미의 지도]를 저술할 때 나는 우리 인류가 갈등을, 특히 20세기의 전 세계적인 불균형 같은 충돌을 겪을 여유 따위가 더 이상 없을 거라는 인식이 강하게 들었다. 파괴를 목적으로 한 우리의 기술은 너무나 강력해졌다. 전쟁의 잠재적인 결과는 말 그대로 세상의 종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신념, 가치, 그리고 문화 체계를 일찍이 버릴 수도 없는 법이다. 나는 그간 몇 달 동안 이러한 아주 어려운 문제들을 계속 고뇌했다. 아니면 유독 나한테만 보이지 않는 세 번째 방안이 있는 걸까? 이 기간 동안의 어느 밤에 나는 꿈을 꿨는데, 공중에서 매달리는 나 자신을 느낄 수가 있었다. 대성당의 돔 천장에 달려있는 대형 샹들리에에 내가 매달려 있었다. 그 높이는 지상에서 여러 층이 될 정도로 꽤 높았다. 성당 내 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육안으로 거리가 너무 멀어 소인으로 보였을 정도였다. 성당 내부가 너무나 큰 나머지, 양쪽 벽과 나 사이에는, 심지어 저 높은 천장과 나 사이에는 아주 크나큰 공간이 있었다.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나 자신에게 주입시켰다. 임상 심리학자로서 나 자신을 실험하는 상황은 전혀 아니었으니까. 꿈은 아직 항해하지 못한, 저 멀리 기억이 흐릿한 세계를 향해 빛을 발산한다. 나는 그동안 기독교를 연구했다(종교들 간의 차이를 줄이려고 노력하지만 매번 기독교를 다른 종교보다 더 많이 공부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 역시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는 것으로부터 더 많은 걸 이끌어내야 한다. 나는 그 대성당이 십자가 모양으로 이뤄졌으며, 돔 천장 부분은 십자가의 중앙에 위치했다는 걸 깨달았다. 또한 나는 그 십자가 중앙이 가장 커다란 고통의 지점이자, 죽음과 변환의 지점이자, 세계의 중심을 상징으로 묘사하는 지점이라는 것을 한꺼번에 인지했다. 그 지점은 내가 있고 싶어 하는 곳이 전혀 아니었다. 결국 나는 발버둥을 친 나머지, 저 높은 지점에서, 저 상징적인 하늘에서 내려와 안전하고 익숙한, 그리고 그리 특색이 전혀 없는 지상에 발을 내디딜 수가 있었다. 어떻게 내려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고 나서, 비록 여전히 꿈이었지만, 나는 침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무의식인 채로 잠을 청했다. 하지만 긴장이 풀어지자 나는 나의 몸이 어디론가 이송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매우 센 바람이 나를 휘감은 채로 대성당을 향해 다시 나아가려는 조짐을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십자가 모양의 대성당 중간 지점이었다. 도망칠 방도 따위는 전혀 없었다. 정말로 악몽과 같은 순간이었다. 나는 스스로 잠에서 깨고자 별 노력을 다했다. 침대 뒤에 있는 커튼이 바람에 의해 베개 위로 살랑거렸다. 눈이 반쯤 잠긴 채로 나는 침대 끝을 바라봤다. 그곳에 대성당 정문이 나타났다. 그 순간, 나는 꿈에서 벗어나려고 나의 머리를 대차게 흔들었다. 그러자 모든 게 사라졌다.
이 꿈은 나를 존재 그대로의 중심에 놓았다. 거기에는 어떠한 탈출구 따위도 없었다. 꿈의 의미를 찾는 데 몇 달이나 걸렸다. 이 기간을 통해서 나는 과거의 위대한 이야기들이 계속 반복해서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더욱 완전하면서도 개인적인 깨달음에 도달했다. 중심에는 개인이 있다(the centre is occupied by the individual). 중심은 십자가로 인해 표시되었고, 어떤 지점의 ‘X’ 마크나 다를 바 없다. 십자가에 존재하는 것은 고통과 변환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자발적인 수용이 필요하다. 한 집단과 그에 따른 교리에 대하여 노예와 비슷한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초월하는 동시에 그 반대에 있는 극단적인 허무주의의 위험성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 대신에, 개인의 의식과 경험에서 충분한 의미를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럼 어떻게 세상은 갈등이라는 끔찍한 딜레마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적, 사회적 붕괴로부터도 자유로울 수가 있을까? 정답은 이거였다. 개인의 지위 향상과 발전을 통해, 그리고 양 어깨에 존재론적 고통을 기꺼이 짊어진 채로 용감무쌍하게 발자취를 남기는 것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개인적 삶, 사회,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가능한 많은 책임감을 져야 한다. 우리는 각자 진실을 말하고, 황폐한 것을 고치며, 오래되고 낡은 것을 무너뜨린 후 다시 복원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세상을 해치는 고통을 줄일 수 있으며,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런 작업은 많은 걸 요구한다. 모든 걸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대안으로 나타난, 일종의 권위주의적 무서운 신념, 무너진 세상에서 나타나는 혼돈, 고삐 풀린 자연 세계의 무자비한 대재앙, 목적의식 없는 개인의 실존적 불안과 나약함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나는 이러한 주제로 연구를 하거나 강의를 했었다. 또한 나는 비슷한 주제로 한 이야기들과 개념들을 수도 없이 설파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전적으로 옳다거나 완벽하다고 주장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존재라는 것은 한 개인이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복잡하기 때문에 나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얘기할 수는 없다.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어쨌든, 이전의 모든 연구와 나의 생각은 새로운 에세이와 함께 이 책이 되었다. 원래 나의 초기 아이디어는 쿼라에 올린 40가지의 답변을 주제로 해서 각각의 짧은 분량의 에세이 모음이었다. 이 제안은 펭귄 랜덤하우스 캐나다에 승인을 받았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나는 40가지의 답변을 25가지로, 그리고 16가지로, 마지막으로 지금처럼 12가지로 줄였다. 공식 편집자의 도움과 관심을 통해서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허위츠의 무자비하면서도 무서울 정도로 아주 정확한 비판 하에) 지난 3년 동안 나는 리스트를 편집했다.
이 책의 제목인 [인생을 위한 12가지 규칙: 혼돈에 대한 해독제]을 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왜 저 제목이 여타 다른 후보들을 제쳤을까? 다른 무엇보다도 간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원칙을 정리하고, 그렇지 않을 시 혼란이 야기된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준다. 우리는 규칙, 기준, 가치를 각각 따로, 혹은 다 같이 필요로 한다. 우리는 짐을 나르는 동물, 짐을 짊어지는 짐승이다. 우리 존재가 꽤 비참하다는 걸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짐을 짊어져 가야 한다. 우리에게는 일상과 전통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질서다. 때로 과도한 질서가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그리 좋지 않다. 하지만 혼돈은 우리를 수렁에 빠뜨릴 수가 있어서, 우리는 익사하고 마는데, 이것 역시 좋지 않다. 우리는 좁지만 앞을 향해 쭉 뻗어 있는 길에 서 있어야 한다. 이 책에서 나오는 12가지의 규칙들, 또 그에 따른 에세이들은 그 길에 서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그 길은 질서와 혼돈을 나누는 경계선이다. 또한 그 경계선은 동시에 우리가 충분히 안정적으로, 충분히 탐구하며, 충분히 변화하며, 충분히 바로잡으며, 충분히 협력하는 곳이기도 하다. 아마 우리가 적절한 삶을 살았더라면, 우리만의 자의식에 따른 고난을 용인했었을 것이다. 아마 우리가 적절한 삶을 살았더라면, 처음에는 분노를, 그런 다음에는 질투를, 그다음에는 파괴와 복수를 꿈꾸는 욕망을 차례로 표출하는 피해의식 따위와 상관없이 우리의 연약함과 죽음을 강조하는 지식에 맞설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우리가 적절한 삶을 살았더라면, 우리 스스로의 부족함과 무지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전체주의적 확실성에 의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우리는 지옥으로 가는 길들을 미연에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20세기에 진짜 지옥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이 규칙들과 그에 따른 에세이들로 하여금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더욱 잘 이해가 되도록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은, 개인의 영혼은 진실한 존재로서의 용감무쌍한 행동을 갈구하고 있으며, 그러한 책임을 다할 의지 자체가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결정과 동일하다는 점이다.
아마 우리가 적절한 삶을 산다면, 다 같이 우리는 번영할 것이다.
이 책의 페이지를 계속 넘기는 당신에게 최고의 행운이 깃드기를….
박사 조던 B. 피터슨
임상 심리학자 겸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