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st in Translation Nov 04. 2020

인스타그램 짝사랑 후 내가 배운 것

자레드 우드, 2020년 9월 11일, 뉴욕타임스 모던 러브

원문: What I Learned From My Instagram Crush 



그의 체육관에 도착하려고 버스만 세 번이나 갈아탔고, 2시간 넘는 시간이 걸렸다. 나는 서울의 한 어학원에서 분할 근무(split shift)를 하고 있었는데, 낮잠을 자거나 혹은 그 헬스장으로 여행을 떠나려고 5시간의 텀을 두었고, 특히 출퇴근 시간이 너무나 길었기 때문에, 나는 제대로 땀 흘릴 일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하여튼 나는 그렇게 살았다.


나는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첫 해에 태호(Tae-ho)를 인스타그램에서 발견했다. 한국의 보디빌더들의 수많은 사진들을 좋아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마도 SNS가 나를 자극하고 있었나 보다. 노골적으로 애정(thirstiness)을 갈구하는 것 같아서, 나는 처음에는 태호의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지 않았다. 그저 나는 스크롤을 내리면서, 그의 삶, 이를테면 어디서 식사를 하는지, 누구와 데이트를 하는지에 대한 단서들을 찾아 나섰다.


그는 누구와도 데이트를 하지 않았었고, 싱글도 아니었으며, 동성애자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이미 한 여성분과 결혼했다. 나는 이런 사실을 인지 한 후, 극심한 실망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그를 향한 현실적인 가능성이나, 타국에서의 어떠한 관계를 생각하지 않았다. 문신에 동성애자인 미국 흑인은 한국에서 그렇게 수많은 로맨틱한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니까.


두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태호가 나온 사진을 유심히 보니, 나는 그가 서울 변두리 지역에 위치한 한 헬스장에 자주 찾는다는 것을 어떤 충성 고객(unsuspecting patron)이 입었던 티셔츠로부터 알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나는 서울에서 꽤 시간이 걸리는 바닷가 마을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하루 일과와 익명성에 꽤 만족했었다. 내 인생이 외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주변으로부터 이목이 집중되거나 고립된다는 점에서 일상이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했을 때이기도 했었다.


아무도 나와 잠자리를 가지지 않는다고 우는 소리로 낑낑거리며 체류 허가 기간을 훌쩍 넘긴 채 살아가는 희끄무레한 이방인으로 전락하기 전에 나는 하루빨리 변화를 경험해야만 했다. 지금의 계약이 끝나가는 상황에서, 나는 태호가 있는 헬스장으로부터 가까운 어학원 가운데 첫 번째로 찾은 곳을 지원했다(그럼에도 두 시간 거리였다).


한국에서 흑인으로 살아가면 몇몇 이상한 현상을 겪곤 한다. 헬스장에 근무하는 한 직원은 랩 음악에서 들은 비속어 표현을 연습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한때 선생님이었던 경력을 살려 적절한 문법을 구사하면서 그에게 미소를 보내며 대답을 했다. 미국 미디어의 과도하게 상투적인 것으로 인해 촉발되는 이 같은 유해한 고정관념은 일상생활에서 나를 따라다녔다.


내가 그 헬스장에서 몇 명의 트레이너들과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던 어느 멋진 날, 태호는 또 다른 트레이너들 가운데 한 명의 복근에 대한 우리의 토론에 참여하면서 내 곁을 느릿느릿 지나갔다. 태호는 셔츠를 집어 올리면서 반질반질한 자갈 같은 피부와 근육을 뽐냈고, 나는 기절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것을 만질 기회를 보내버렸다.


나만의 디폴트한 무관심이 한국에서 그리 잘 번역되지 않는 것 같아서, 새로운 페르소나를 만들었는데, 무작위 사람들에게 영어 과외가 필요한 지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태호는 미끼를 물었다.


카카오톡(와츠앱과 유사한 메시지 교환 플랫폼)은 나와 태호 간의 새로운 의사소통 수단이 되었다. 친밀도 면에서 볼 때, 인스타그램의 다이렉트 메시지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셈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에 우리는 헬스장에서 만나 첫 영어 수업을 진행할 예정이었지만, 전날 밤 그가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메시지를 보낸 터라, 취소를 할 것만 같았다.


나의 아버지는 그해 1년 전에 돌아가셨다. 아들이 아버지를 잃게 되는, 너무나 황망한 슬픔을 알기에 조의를 표했지만, 속으로는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이게 만약 끝이라면? 만약 그가 슬픈 상황에서의 영어 수업이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느낀다면?


하지만 3주 후,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는 수업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이번 주 토요일에 만날 수 있을까요?"


나는 매우 기뻤지만 느긋하게 응답했다. "그럼요! 오후 12시에 봅시다."


두 번의 버스 환승으로 두 시간이 걸리고 나서야, 나는 결국 그를 체육관에서 보게 되었고, 영어 수업을 통해 무얼 원하는지를 물었다. 나는 그가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영어와 한국어를 혼합해 말했다. 그가 말을 하자 나는 지금 이 순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태호의 두 팔과 두 손을 힐끗 쳐다보았다. 체육관에 설치된 TV에서는 그가 최근에 우승을 차지한 보디빌딩 대회 장면이 나왔는데, 반짝거리는 이두박근과 땀으로 가득한 대퇴 사두근을 보여주는 태호가 거기에 있었다.


두 번째 수업에서 태호는 자신의 부인을 나에게 소개해주었다. 그녀는 불안정할 정도로 높은 하이힐과 짧은 스커트가 아닌, 매서운 한겨울이 되면 으레 사람들이 주로 입는 적절한 옷차림에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나는 그래서 태호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그는 안목을 지녔다.


그들은 곧 필리핀으로 휴가를 떠나려고 했었고, 여행 표현을 배우고 싶어 했기에, 나는 한국어에 상응하는 일반적인 문장과 정확한 발음 표현을 준비해 갔다. 아마도 이러한 나의 지극 정성(showiness)은, 외국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특권인, 태호의 집으로 초대받는 것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감정적 상호작용도, 눈치도 없었던 태호를 향한 나의 일방적인 짝사랑은 나와 한국과의 관계에도 똑같았다. 별로 흥미로울 것 없었던 포항(Pohang)에서 살 때에도 나는 이 나라가 끌리기 시작했다. 한국어 알파벳인 한글을 읽는 법을 배웠고, 음식 재료와 길거리 표지판을 이해했을 때 나는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특히 내가 처음으로 쇠고기 비빔밥(유명한 쇠고기 음식)과 잡채(면 요리)를 먹었을 때는 너무나 좋은 나머지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러나 지식은 명확성을 수반한다. 한국에서 첫 해 동안 빨간 장밋빛 안경이 나의 얼굴을 언제나 감싸주었지만 , 조금씩 아주 조금씩, 주변에 눈에 띄기 시작하면서, 나란 존재는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도록 만들어졌다. 지하철을 타면 양 옆 좌석이 텅 빈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 많은 카페에서도 내가 가면 테이블을 독차지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일자리를 구할 때에도, 리크루터들은 학부모가 자녀의 선생님으로 흑인을 원하지 않는다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태호와의 거래에서도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종종 피곤함을 호소했고, 헌신적으로 영어 수업을 받으려는 자세도 갖추지 않았다. 태호는 자신의 헬스장을 개업하려던 도중이었기에, 영어는 아마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짧은 문장으로 현실적인 이유를 언급하며 수업을 취소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내가 다른 학생들의 수업에 집중하겠다고 단언하고 나서부터 그의 답장은 묵묵부답이었다. 나중에 그는 생각이 나서 나에게 안부를 묻는 내용의 이모티콘 하나를 보내왔다.


오로지 한 사람만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모든 감정을 쏟아부었다면, 정서적인 학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음 해 봄부터 업무가 안정화되기 시작하면서, 나는 태호 부부와 함께 스타벅스에서 음식이나 커피를 주문하며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나는 보통 쓸데없는 일을 하는 걸(the third wheel) 싫어하지만, 부부의 상호작용을 옆에서 관찰하면서, 내가 좀 더 잘해지기를 바랐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친구들의 전폭적인 동의에 힘입어 차별을 항의하던 과거 미국 뉴욕 시절 나의 삶과 점차 비슷해져 갔다. 한국에서의 새로운 삶은 닳아서 얇아지기 직전이었고, 이곳에서 나타나는 젠더, 성적, 인종적인 불균형에 더욱 비판적인 사람으로 바뀌어갔다. 태호와 그의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K-드라마, K-팝, 혹은 K-뷰티가 아닌, 한국 생활의 지저분한 면에 대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제시했다.


우리는 매주 몇 시간 정도 만나서, 영어 수업을 진행했었지만, 사회적인 기대나 결혼 같은 주제로 수다를 떠는 것으로 귀결되곤 했었다. 나는 갑자기 한국어로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후회가 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영어 대화를 배우려고 많은 돈을 나에게 지불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의 융합은 새로운 친밀감을 형성했고, 그는 자신이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나에게도 공유해 주었다. 내가 영어 자막(물론 공짜로 작업했다)을 입혀준 그의 유튜브 영상은 내가 실제로 알고 있었던 태호를 세상에 연결해주었다. 그는 행복했다. 그리고 나 역시도 행복에 가까운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한국에서 흑인으로 살아가는 건 힘들어."라고 내가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술도 안 먹어. 사람들도 좋아하지 않고."


"나도 알아. 한국은 살기 힘든 나라야, 형."이라면서 형제를 뜻하는 단어(혹은 친한 남자 친구들끼리도 서로 사용함)를 언급하며 답했다. "하지만 형은 좋은 직장에, 좋은 친구들이 있잖아. 형은 사람들을 돕잖아."


내 목이 조이는 듯한, 그리고 내 눈가를 촉촉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가 사용한 단어, '형'이었다. 한국 곳곳에서 하루에 수백만 번 이상 아무런 의미 없이 남발되는 이 단어가 나에게는 첫 키스처럼 다가왔다. 아니다, 키스는 아니다. 로맨틱한 기분이 안 들었기 때문이다. 그냥 정당화된 기분이었다.


SNS 게시글에 지나지 않았던, 초기에 내가 느꼈던 태호의 육체적인 매력은 점차 줄어들어, 현실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플라토닉 친밀감으로 대체되었다.


육체적으로 완벽한 표본(specimen)을 갖고 싶은 나의 소망은 이제는 우스꽝스럽고 사춘기 같이 보인다. 그때 나는 30대 중반이었고, 상황을 좀 더 잘 이해해야 했었다. SNS의 구조적 요소를 신뢰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가끔 열변을 토했다.


태호는 나를 사랑한 적이 없다. 한국도 나를 사랑한 적이 없다. 하지만 나의 소심한 스토킹의 씨앗으로 말미암아 몇 년 정도 앞서 경험했어야 했던 배움과 더불어 진정한 우정이 발아했다.


비록 나는 더 이상 한국에 있지 않지만, 태호의 인스타그램을 지금도 팔로잉한다. 때때로 나는 그와 농담을 주고받을 때 카카오톡 이모티콘을 사용하곤 하는데, 인간에게 알려진 모든 감정이 나타나 제공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태호에게 느끼는 특별한 고마움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아직 찾지 못했다.


-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