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만족의 상태에 대한 만족적인 상태
막연하게 두려운것들을 나열해보자면 여러종류의 목록이 만들어진다.
서프라이즈에 나오는 파란색깔 귀신
처참하게 죽어있는 상태의 무언가를 마주하는것
항상 찾아가면 그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부재
어떤방식으로든 안전망을 쳐놓고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도태되는것
아마도 나는 마지막이 제일 무섭다.
절친한 친구 A를 안 몇년동안,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와 나의 닮은점과 다른점을 끊임없이 비교했다. 내 자신이 그녀와 비교당해져서, 어떤점이 더 낫거나 혹은 낮거나 했을때 기쁘게 되거나 불행하게되거나 따위의 감정이라기보다는, 좀더, 어떤 환경과 어떤 찰나가 결합해서 어떤 성격의 부분을 만드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다. 난 그런게 늘 너무 궁금하다.
눈에 띄게 두드러지던 그녀의 특징중 하나는, 차분한 낙천적임이었다. 그녀는 약삭빠른 면모가 조금도 없었다. 셈을 할 생각조차 안하는 것 같아보이기도 하지만, 셈을 한다고 해서 상대가 안보는 틈을 타서 자기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무언갈 움직여놓는 사람 또한 아니었다. 무엇보다, 뭘 가져도 만족해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느긋했고, 자신의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작업하고 또 잘 했지만, 상대적으로 처절하고 필사적인 노력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최선은 아주 산뜻하고 경쾌했으며, 어디에도 얼룩진 구석이나, 구김살을 볼 수 없는 최선이었다.
내가 그녀를 보면서 가장 부러워하고, 가지고싶어했던 특징 중의 하나였다.
반면 나는 그녀에 비해 조금 더 집요하게 필사적인 모습이 있었다. 나는 인정을 잘 안해주던 터프한 부모님들에게 자라서 그렇다고 핑계를 대지만, 아닐수도있다. 나는 복잡하고 다양한 방어체계를 설계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엄마에게 인정을 받지않고도 불행하게 살지않을 방법은 몇몇가지로 추려진다. 엄마의 인정에 미련이 없으려면, 엄마가 인정하거나 인정하지않는 가치에도 미련이 없어야한다. 그래서 나는 많은것들에게 미련을 버렸다. 선택과 집중이 모토가 된 인생은 한두가지정도를 제한 나머지에 결코 진심으로 화내거나 기뻐하는 법이 없어져서 조금 심심하다.
A와 그녀의 부모님과 몇주씩 여러번 여름을 같이 보낸 나로서는, 그녀의 부모님의 긍정적이고 마치 무한정으로 솟아나는것만 같은 서포트가 경이로웠다. 뭐랄까 강아지가 고양이를 보는것같았다. 강아지인 내가 아무리 귀가뾰족하고 야살맞게 굴면서 야옹 울어도 나는 야살맞고 귀가뾰족한 야옹거리는 강아지이지, 고양이가 되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A의 부모님처럼 나의 부모님도 나를 자신의 최선으로 사랑했겠지만, 누구든 사랑의 전달방식은 다르므로 아무도 탓할수없다.
그렇지만, 내 권한 밖의 모든일들을 관전할때 주어지는 나의 특권이라면, 내게 주어지지 않은것들을 부러워하며 주어진것들은 못보는 선택지와, 그녀와 나에게 다르게 주어진 상황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내게 주어진것들에 감사하고 주어지지않은것들을 배울수있는 선택지중에 선택을 할수있는 그런 권리?
요즘들어 조금 더 밝은쪽을 찾아가는 내가 마음에 드는 이유는. 나는 불만족해야 만들고, 만족하면 안만드는 사람인걸 파악한게 가장 큰 이유인것같다. 난 만족하면 더이상 움직이지 않고, 그게 나를 가장 밑바닥까지 잡아끄는 제일 핵심적인 요소라, 나는 차라리 유난스럽게 큰 불만족은 아닌 이 불편한 불만족들을 어깨에 얹어서라도, 순간을 발견하고, 내 자신의 반영을 바라보고 하는 것들이 일상에서 몇가지 안되는 영감적이고 고무적인 부분이다.
설명하자면 불편하지만 물병하나를 허리에 대고 자면 그 다음날 허리가 아프지 않아서 생활하기가 좋은 뭐 그런 간소한 불편함이니까.(검증되지않은 사실) 나는 그런 간소한 불편함에 많이 생각해서, 재밌는 것들을 많이만들면, 그것도 또 나름대로 알차고 꾸준한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알차고 꾸준한 까칠함을 위하여!
그리고 그 까칠함이 지나치지않게 발란스를 잡아주는 대단하고 멋진친구 A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