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지는것 과 만드는것의 간극
주어지는 숙명과 같은 인생의 기본 설정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부모의 살아온 경험들, 그 경험에 반영된 성격들, 그 성격에 반영된 나의 숙명들. 이름을 곱씹어본다. 정직하고 수를 잘 못쓰는 양 부모의 마음이 드러나는 이름일까. 철자마저도, 혀의 굴림마저도 반듯하고 꼿꼿한 이름. 덧없다는걸 알면서도 주어진 숙명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아이를 빚을때의 부모의 마음은 속죄일까. 자신의 오점들을, 그리고 그 오점들 때문에 누명씌워졌던 자신의 숙명들을, 만회해보고싶은 기회인걸까, 아이는. 나의 부모는, 빛나는 성품을 갖지못한것이 제일 애통해서 나에게 그런 이름을 선물한걸까.
시발점이야 무엇이 되었든, 숙명이 하나 더 생겼다. 내가 숙명의 무게를 하나도 몰랐을때 곰곰히 고민하다가 내 자신에게 선물하게 된 숙명이다. 두번쨰 이름은 부모의 숙명이나 기대에 부합하는 이름은 아니지만, 입안에서 굴려지는 소리가 마치 동그란 사탕을 핥아올리는 것과 같아서 어디하나 뻣뻣한 곳이 없다. 부르면 입안에서 도르르 굴러나온다. 혀가 입 천장에서 통통 부딪히는 소리는 질릴 틈 없이 인생의 어떤 방들을 가득히 채운다.
힘주어 뻣뻣한 것들이 유연하게 되려면 누군가 자꾸 두 팔을 걷어붙이고 개입해서 반죽하고, 도마위에 팽개치면서 또 반죽하고, 반죽을 모아 차가운 공간에 혼자 두었다가, 물을 넣어가며 또 다시 반죽하고의 수없는 반복이어야만 한다. 숙명에서 또 다른 숙명으로까지의 거리는, 모를때에는 가깝고 알수록 멀어져버린다. 두 숙명 사이를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반죽하고 또 반죽되고를 반복하다 보니 두 숙명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아득해져간다.
급한 마음으로 치루는 일들은 항상 매듭짓지 않는 바느질로 지어진 옷을 입는 모양새와 같다. 빠르게 결정하고 들떠버려서 헐레벌떡 입는 옷의 이음새는 꼭 닫히지 않는다. 이음새가 닫히지 않는 옷들에는 늘 변명이 뒤따라오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