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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ileen Apr 10. 2016

상황의 탓

여행과 삶의 공통점 중 1.

요즘은 마음이 이리 저리 많이 흔들리고 있는 시간이라, 겁을 쉽게 먹곤 한다. 이럼 어쩌지, 저럼 어쩌지, 내예상이 빗나가면 어쩌지. 또 자꾸 비슷한 일들을 반복해서 나를 가둬놓는 기분이라서, 헐레벌떡 책장을 뒤졌다. 책을 읽어야 하는 기간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유학생활을 시작하며 손에 잡고 책장을 넘기는 ‘책'을 열권도 못 읽었다. 매일 영어 또는 한국어의 활자를 읽어 내리긴 하지만, 손에 책을 들고 진득하고 열정적인 독서는 거의 없었다. 아빠가 이런 나를 보고 참 이상하네, 했다. 어렸을때 나는 손에서 책을 안놓아서 매년 선생님들이 써주는 학생 보고서 류의 종이에 항상 책 이야기가 빠지질 않았으니 이상할 법도 했다. 집에서도 책을 읽었고, 학교에서도(심지어 수업시간에도) 책을 읽었고, 친구네 집에 놀러가면 가장 먼저 구경하는것이 그 집 책장이었으니까 꽤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다고 할 수 있다. 중학생이 되면서, 서서히 종이책을 안 읽기 시작했는데, 그 떄에는 또 한참 전자기기로 읽을 수 있는 로맨스 소설같은걸 한 500편 넘게 다운받아서 읽고 또 읽고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긴 하지만 사춘기는 단연 로맨스니까, 괜찮다.

아무튼, 종이책을 넘기는데 요즘은 30페이지를 집중해서 못 읽는다. 이건 큰일이 맞다. 어렸을땐 5시간을 앉아서 엄청난 집중력으로 책한권을 앉은자리에서 끝내곤 했는데, 요즘은 앉아서 30페이지 분량의 말을 읽는데도 너무 힘겹다. 그 열배 분량의 잡생각이 끼어들곤 해서, 결국 30페이지를 읽고 책을 닫는 나의 뇌는 뭐랄까 폭격을 맞은것과 같이 뒤죽박죽이 되버리곤 한다.

읽기 쉬운책부터 골라 읽어봐야지 하고 가벼운 에세이를 집어들고 슥슥 읽으니까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종이책을 넘길때에 나만의 향수 따위와, 이미 알고는 있지만 내 인생에 (복합적으로, 응용되어서)일어나버리면 우왕좌왕 하게되는 일들의 법칙같은 것을 동시에 느꼈다. 뭐랄까.. 요즘 내가 하는일에 빗대자면, 이렇게 저렇게 시험 버전을 만드는 광목천이 잔뜩 구겨진걸 계속 마음에 걸려 하다가, 한번에 스팀을 빵빵하게 넣고 빳빳하게 다려버리는 것 과 같은 기분이었다.

복잡하던 마음이 한결 다림질되고나니, 구깃하게 보이던 것들이 차차 깔끔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남의 연애는 기깔나게 조언하다가 내 연애는 온통 엉망진창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함, 사람들과의 관계, 내 자신의 발전 따위의 문제에도 엇비슷한 법칙이 적용된다. 그런 법칙을 찾으면, 뭔가의 공통점 발견!에 대한 기쁨에 잠깐 들뜨다가, 이내 썩 좋은 패턴은 아니군.. 하고 입맛을 다시게 된다.

나는 대체로 (데일리로) 꾸준한 사람은 아니어서 일과처럼 쓰는 일기에는 취약하지만, 그래도 내 자신을 가까스로 길들여, 생각이 날 때 마다는 기록을 하는 편이다. 예전의 사진과 일기에 돌아가보는 것,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의 다른점을 찾는것에서 휴식을 느끼는 편이기도 하다. 가끔 막 바빠서 고독의 시간의 연속이면, 14년에 다녀왔던 유럽사진을 보곤한다. 늘 잔잔하게 스믈스믈 행복해진다. 14년의 그 여행은 참 다양한 ‘처음’이 많았고, 꽤 길었다. 같이 다녀온 친구가 작년 여름께에 선물로 준 책이 여행과 인생을 논해서, 반을 읽는데도 그 친구와 함께한 기억을 비춰보느라 바빴다. 오늘은 사진이 아니라 글로 여행 에피소드를 떠올리는 날이다.

책에서는 내내 혼자 여행을 떠나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상세히 설명하지만, 나는 읽는 내내 저자에게 둘이가는 여행도 생각보다 엄청나게 배울거리가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고싶어서 안달이 났다. 그래서 계속 귀퉁이에 메모를 하고, 내 에피소드를 제목붙여서 써놓고, 뭐 그랬다. 저자는 늘 우리는 어떻게든 타인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가느라, 정작 자신이 하고싶은 마음속의 말에는 귀를 못 기울여서 일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또 그 목소리를 때때로라도 들어주는 것이 얼마나 도움되는 일인지, 그녀의 사례와 다른사람들의 사례를 들며 알려준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느라 다른이들의 목소리는 미처 듣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14년의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내가 그랬던 것 같다. 나는 표현욕구가 꽤 대단한 사람이었고, 그 표현욕구를 주체하지 못해서 다른사람을 다치게하거나 불편하게 했던 기억이 있다. 또, 뭐라 딱 단정지을 수 없는, 형체가 없지만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개인의 고독을 막 겪기 시작하는중이어서, 어떻게 헤쳐나가야 되는지 도저히 갈피를 못잡았던 기억도 난다.

그때 여행을 갔다. 나는 파리의 에펠탑의 야경이라던지 암스테르담의 파티와 페스티벌, 사하라 사막 가보기등의 재밌는 경험을 해서 너무 즐거웠지만, 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도 봤던 것 같다. 일상생활에서는 크게 영향을 안미쳐서 눈에 잘 띄지않는 나의 버릇들이 여행에서 영향을 미치는 걸 지켜보며, 그 버릇들이 저지른 다른 일들에 대해 사과하는 법을 배우고, 그리고 나서 마음을 추스리고 다른 일들을 다시 손에 잡는 법을 배웠던 것 같다.

관계는 단순하게 생각해도, 복잡하게 생각해도 어려운 일이다. 20년을 같이 똑같은 집에살며 엄마밥을 같이먹은 동생이랑도 얼굴만 보면 앙앙거리는데, 20년동안 어디서 뭘하는지조차 몰랐던 사람들을 만나서 매일 얼굴맞대고 사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두명이서 오주동안 여행을 다니니까, 관계의 본질을 엿 볼 기회가 있었다.

여행과 삶에서는, 남탓도 내탓도 아닌 상황의 탓인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그 상황은 마주하기 엄청나게 고통스러운게, 개개인의 작은 부분부분이 다같이 합쳐져서 일어난 일이기때문에, 특정한 누구를 탓해서도 안되고, 그렇게 작은부분의 지분을 따져서 누가 얼만큼 잘못했나-를 따지는 일또한 결국엔 본질적으로는 문제를 해결하는데에는 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나도 여행중에 한번 '상황의 탓'으로 된통 혼난 적이 있다. 파리에서 8일간 예쁘고 재밌는 파리지앵 흉내를 열심히 내다가, 근교에 있는 몽생미셸을 가보자고 결정했다. 자동차로 패키지 투어 같은걸로 많이 가는 곳이라서, 인터넷에서 기차/버스 교통편 정보가 별로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교통편을 이어붙여보고, 그러면 가는길에 가고싶었던 마을 두군데를 보고 기차를 계속 갈아타서 한번 가보자, 라고 결정을 했는데, 막상 가보니까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버스는 하루에 한대, 것도 이른아침 7시에 한대, 뭐 이런식의 황당한 교통편이어서 둘이 엄청나게 당황했다. 그래서 기차를 한 7번인가 갈아타고 버스도 타고 하루종일을 막막한 마음으로 교통수단위에서 보냈다. 기차가 달리긴 달리는데 여기서 내리면 다음 기차가 있는지 없는지, 있어도 하루에 하나 아침일곱시 기차인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답답하긴 했다. 더군다나 몽생미셸에서 고르고 고른 숙소는 이미 요금을 지불한 상태라서, 거기까지 도착하지 못하면 숙박비를 날리는 셈이 되니까, 더 초조했다.

그렇게 아침 일찍부터 후다닥 기차역을 뛰어다니다가 결국엔 11시쯤 되어서 포기했던 것 같다. 몽생미셸을 70키로미터인가 앞두고, 근처의 어디 작은 마을에서 멈췄다. 더이상 기차나 버스가 다니지 않는 시간이었고, 우리는 비에 젖어서 냄새가 나고 있었으며, 심지어 친구는 개인적인 일로 고통받는 날이었으니, 11시까지 버텼던게 용하긴 했다. 그래도 마침내 들어간 작은 호텔의 리셉션에서까지, 교통편을 다시한번 확인하고 우리에게 몽생미셸을 가는 방법은 이십 몇만원을 주고 택시를 잡는것 아닌 이상 없다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인정한 다음에 체크인을 했다. 몸과 마음이 하루만에 어마어마하게 지쳐버려서, 그동안 별일없이 여행하던 우리는 풀이 팍 죽었다. 터덜터덜 밥먹으러 가는길에, 많은 얘기를 했다. 그때 친구가 개인적으로 무슨일을 겪고 있는지 아는데도 내탓 한번 안하고 같이 상황이 이렇게 되버려서 안타깝지만 앞으로는 조금 더 현명하게 잘 여행하자, 라고 대화를 나눠서 정말로 고마웠다. 그리고 이 사람이랑은 재밌고 즐거운 일 뿐만 아니라, 어려움도 같이 힘을 내서 극복할 수 있겠구나 했다.

듣기 좋은 말은 중독이고, 즐거운 상황을 즐기는 것은 쉬운일이며, 동시에 누구와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듣기 싫은 말, 겪기 싫은 상황을 듣고 겪을때, 상대방에게 잘못을 뒤집어 씌우지 않고, 냉정하게 문제를 바라봄과 동시에 상대방,그리고 내 자신을 격려하며 문제를 이겨나갈 수 있는 관계가, 훨씬 더 어렵고, 훨씬 더 드물다.  그래서 서로를 더 성숙시킨다고 생각한다. 이런것들이 일상에서의 수련이 아닐까. 잘못을 똑바로 맞서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 없고, 그럴듯한 핑계거리를 대는 일만큼 쉽고 유혹적인 일이 없는 만큼, 겪어지고 나면 ‘그래. 한단계 성장했다. 기특한것’ 같은 마음이 드는것이다.

수도원에서 모두들 속세와 떨어져 자아를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다면 것도 꽤 좋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각자의 할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수련을 외면하며 살아도 되는게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수도승들보다 더 어려운 수련이라고 할 수도 있다. 끊임없는 유혹 바로 옆에서 사는 셈이니까. 더 어려운 만큼, 조금 더 성숙된 나의 흔적을 찾는일이 더 뿌듯하게 다가올 수 있다.

지금 이런 글을 쓰는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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