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일, 이제 열심히 안 하기로 했어요.
그간 글도 올리겠다 다짐해 놓고, 결국 나는 회사일만 했다. 모든 디자이너의 고충일지는 몰라도, 이직한 회사에서는 디자인에 대한 개입이 꽤나 심했다.
화면 하나에 개발팀 내 수정, 마케팅팀의 수정, 기획이라면서 일단 화면을 들고 오라는 식으로 구성된 말도 안 되는 TF팀의 수정까지...
한편으론 억울했다. 자신들이 회사에 관련된 콘텐츠를 블로그에 올릴 땐 아무 허락 없이 진행하면서 내가 디자인을 하는 건 매번 문제사항이라며, 수정을 거듭시켰다.
화면을 그리게 되면 화면 내 영역을 구분하고 해당 영역 내 들어가는 내용을 정하게 된다. 이때, 회사는 각 영역별로 이 내용이 들어가야 돼 를 지정시켜 놓고 나에게 작업을 넘긴다. 그러면 디자이너로써, 영역에 맞춰서 넘어온 내용일 끼워 맞출 수밖에 없다. 그렇게 끼워 맞춰 들고 가면 a 팀은 자긴 이 영역에 이내용이 없어도 된다, b팀은 자긴 이 영역에 이 내용이 꼭 있어야 한다. c팀은 아니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이러면서 갑자기 자기가 손으로 그린 화면을 들고 와서 이렇게 표현되야 한다며 난리가 난다. 결국 결론난 사항 없이 다시 수정을 하고 또 들고 가면 a팀, b팀, c팀은 각각 자기들이 생각하는 방향이 반영되지 않았다고 아우성이다.
화면을 만들고 그린 다는 건, 화면의 마지막 사용자를 고려해 최대한 편리한 화면을 그려내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화면을 그릴 때 최대한 사용자의 입장을 반영해 디자인해 가지만, 이 생각의 영역이 회사사람들 모두와 일치할 순 없다. 그러니 서로 반영이 되지 않았다 아우성이고, 나는 이미 충분히 사용자에게 많은 정보를 주었다로 대결구도가 형성된다.
네네 하고 그냥 수정을 해가면 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의 일이지 지금 한 달째 한 가지 화면에 대한 수정을 받고 있다. 서로 다 다르게 말을 하는데 그걸 다 담아내려고 하니, 화면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고 업무능률도 떨어진다.
화면 한 장 한 장에 일일이 수정을 받고, 그걸 다시 고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게 요즘 내 직장생활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화면을 출시하고 거기에 대한 피드백을 사용자로부터 받는 게 아니라, 화면을 그리고 회사사람들이 만족할 때까지 다시 그린다. 이게 서비스를 만들 때 맞는 방향일까.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이렇게까지 많은 수정 요청을 이렇게나 많은 다수에게, 출시도 하기 전에 각자 다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넣어달라 받는 게 처음이라, 다른 회사들도 수정에 대한 간섭이 이렇게까지 심한지 궁금해진다.
전에는 내가 하나의 업무를 끝내가면 일단 출시를 하고, 이후에 들어오는 피드백을 모아서 다시 수정을 하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지금 직장은 회사가 만족할 때까지 무한 수정이다.
이게 뭐 하자는 걸까. 이런 게 디자이너의 업무인가? 이럴 거면 인하우스를 왜 하지?
회사 내에 여러 명의 클라이언트를 모셔놓고 일하는 기분이다. 다들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그려주길 원한다. 손으로 그리지만 않았지 다들 자신의 머릿속에 내용이 있고 이걸 그대로 내가 표현하길 원한다. 결국 이런 식이라면 나는 내 생각대로 디자인을 하는 게 아니라, 남들 생각을 표현해 주는 사람 정도밖엔 되지 않는다.
디자이너로써 항상 툴러가 되는 걸 경계해 왔다. 단순히 디자인툴로 그림만 그려내는 사람, 남들이 원하는 대로만 그려가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했지만 지금 이 회사에서 내게 원하는 건 결국엔 툴러가 되는 길인 것 같다.
한동안 그게 싫어서 더 열심히 그려갔다. 수정사항도 모두 넣어보려고 노력하고 한 장의 화면 디자인을 10개 넘게 뽑아보기도 하고, 새벽 5시에 일어나 근무를 시작해, 밤 12시까지 앉아 일만 했다. 주말, 평일 가릴 거 없이 일만 했다. 잠들기 직전까지 일했으니, 보통 10시 11시까진 일을 한셈이다.
그렇게까지 해서 만들어가도, 회사사람들은 각자 다들 자기가 생각한 방향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아우성이었다. 오늘은 결국 일을 정리하기 위해 화면을 켜놓고 일일이 수정사항을 받아 적고 보여주면서 화면을 정리했다.
그 와중에 대표님이 회의자리에서, 디자인의 병목현상 때문에 일이 진행이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른 디자이너를 붙여서 업무를 해라라고 말했다. 억울했다. 수정을 안 줬으면 사실 끝난 일이고 다음단계로 넘어가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디자인 병목 때문에 진행이 안된다니!
기획을 하겠다며 4주 이상 시간을 잡아먹고, 나한테는 고작 2주의 시간도 못준다는 식으로 나오니 서러웠다.
내가 여러 번 얼마나 급한 업무인지 묻는 질문에도 개발팀 팀장은 내게 알아서 디자인 마감 시간을 정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마감을 정해서 말했고, 더 빨리 필요한 거면 얘기해 달라고 했다. 아무도 더 빨리 달라고도 안 했는데, 디자인 병목이라니!
글을 쓰는데 눈물이 난다. 속상했다. 저 말을 듣는데 너무너무 속상해서 말문이 막혔다. 내가 수차례 기간을 물을 때마다 원하는 대로 충분히 고민하라는 식으로 나와놓고, 저렇게 말을 한다는 게... 너무 속상했다. 디자이너로써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이 회사가 나를 보는 게 이 정도였구나 싶었다.
그리고 물었다. 얼마나 빨리 필요한 건지, 기간을 전달받은 게 없다, 나에게도 알려달라고, 그랬더니 그제야 자신들을 11월까지 개발이 완료되길 원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디자인을 한 번에 많이씩 해가는 것도 안된다고 했었다. 한 번에 많이 들고 가면 다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만 그리고, 그걸 일일이 수정해야 하는 게 더 큰 문제라고, 그래서 화면 내에 한 파트씩 나눠서 수정을 받았다. 그랬더니 이번엔 느리다고... 어쩌자는 건가.. 그래서 한 번에 화면을 좀 많이 그려가도 되는지 허락을 받았다.
또 퇴근시간을 넘겼다. 현타가 온다. 내가 일하고자 하는 방향이 이게 맞을까?
컴퓨터를 껐다. 퇴사가 하고 싶어졌다. 이게 뭐 하는 짓일까. 침대에 한참을 무기력하게 누워있다가, 학교(야간대 대학원 다니는 중)에 갔다. 늦었다. 부랴부랴 짐을 싸서 학교로 향했다. 수업을 듣는 내내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전철대신 택시를 탔다.
택시 아저씨와 인생사는 얘기를 했다. 기사님은 택시 업무를 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또 도움을 주고 있다면서 뿌듯하게 자신의 일을 소개했다. 기사님이 부러워졌다. 기사님이랑 얘기를 하다 보니 그간 회사의 일도 털어놓게 되었다. 기사님은 이야기를 듣고 내게 말씀하셨다.
"인생의 만족도가 중요해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저는 택시일과 새벽엔 장사를 하며 지내는데 이전에 회사를 다닐 때 보다 훨씬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졌어요. 회사일, 그거 열심히 해서 지금 본인의 인생에 대해 만족도가 높아졌나요? "
"결국 회사일을 열심히 한다는 건, 그 회사에서 인정받으며 일하고 싶다는 건데 그 인정받아서 뭐 하게요, 인정을 받으면 본인 인생의 만족도가 높아지나요? 좋은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면서요, 그러면 하고 싶은 건 다 해보세요"
"회사 일 말고 다른 것들이요, 본인이 평소에 원하던 것들이요. 꼭 회사를 그만두고서 하는 게 아니라, 어차피 이직했고 이직했으면 이전에 있던 것들(복지나, 연봉, 회사 네임 등등..)을 포기하고 나왔다는 건데 포기한 만큼 자기 인생에 자유도를 높여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까지 열심히 일에 목메지 마세요, 어차피 열심히 일해서 그 회사에서 인정받아봤자 이인자예요. 그 회사에서 인정받아 어디에 쓸 건데요?"
"자기 인생을 위해 사세요. 회사에선 꿀 좀 빨고, 하고 싶은 거 하세요. 그러다가 회사가 나가라고 하거나 자르면 그만큼 실업급여받으세요, 그러면 실업급여받는 동안 쉬면서 하고 싶은 거 해도 되죠. 그게 더 본인을 위한 인생을 사는 길 아니겠어요?"
기사님과의 짧은 2시간의 대화에서,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인정을 바랐는지 깨닫게 됐다. 아무리 열심히 해서 넘겨도 수정만 요청하는 회사에서 무엇을 바라겠나. 그리고 회사에서 인정받아 또 무엇하겠나. 그냥 앉아서 꿀이나 빨자. 달달하게 월급 받으면서 적당히 일은 처리해 주고, 나를 위해 살자.
디자이너로써의 자부심과 인정, 그걸 회사 안에서 찾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자. 정말로 나를 위해, 그리고 디자이너로써의 나를 위해서도 평소 내가 하고 싶었던 디자인을 하고, 그걸로 성공하자. 회사는 그저 그것을 위한 발판이다. 나도 꿀 좀 빨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