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을 과거로 남기기
월요일 아침 어제는 속을 썩이던 주차장 문이 기대와는 다르게 힘차게 열렸다. 한파가 오늘 이후로 끝이라고 했었나, 날이 풀리면 하고 싶은게 참 많다. 마음이 영 잡히지를 않아서 "한파야 한파" 핑계를 대고 어울리지 않게 집에 틀어박혀서 겨울 곰 처럼 보냈다.
지저분한건 못보는 성격인데. 어젠, 까먹은 귤껍질을 산처럼 쌓아놓고 그게 마치 혼자만의 고민과 사색을 대변하는 훈장처럼 히 웃었다. 귤 10개쯤 넘었땐 알맹이 하나에 껍질 한겹으로 신들린 쓰레기 줄이기 신공까지 장착했다. 귤 껍질을 까는 일에 집중한 동안에 목 아래와 목 위에선 그 문제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내게 주어진 마지막 결전의 시간인 것 처럼.
긍정적인 시선의 힘을 누구보다 믿는 내가 벗겨져 나간 귤 껍질과 함께 필사적으로 그의 알맹이를 들여다 보았다. 좀 치사하지만 몇개가 들었었는지, 달달한지, 무른데는 없는지 판단도 해보았다. 긍정적인 시선을 뺐더니 괘씸한 마음이 툭툭 치고 올라온다. 그의 알맹이가 심히 별로였기 때문이다.
친한아이가 "좋다는 놈 다 두고 왜 그런 놈 생각을 자꾸 하는거야" 아까워 할때도, 사람은 격어보지 않으면 모르는거라 어깨를 으쓱거리는 어른 흉내를 냈었다. 먼저 내 흠을 알아채고 메꾸는 일을 마쳐서 다행이다. 난 치사할만큼 정확한 덧셈뺄셈을 했다. (나같은 수학 모질이가) 더하기, 빼기, 는 했더니 그가 내내 노래를 부르던 내 흠은 애정을 갖고 관리해주면 감쪽같은 잔기스였다.
아마 그는 덧셈뺄셈이 먼저였을거다. 그런태도는 진실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어른이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나" 좋을 땐 사내처럼 기세좋게 다가오더니 덧셈뺄셈 후에 그 새침한 눈빛이라니. 내가 아는 진짜 남자는 그런 눈빛을 하지 않는다. 튼튼한 나무 뿌리를 운운했었던 그 입을 한번 꼬집어주면 싶다 (비겁한자식아).
생각해보면 그가 말한 내 흠들은 엔티크 가구만의 멋스러움 같은 것이었는데, 어디서 놀다온 행동거지를 못고치고 그는 나를 상대로 "가격후려치기"를 감행했던거였다. "이런 기스에 이 값은 절대 지불 못하지, 깍아주던가 사줘서 감사하다고 고개 숙이던가" 라며, 어른스러운척으로 무장한 그가 실은 얼마나 유치한 투정쟁이었는지. (좀 귀엽다)
돌이켜보면 내가 정확한 셈을 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솔직히 나는 그의 흠을 사랑했다. 세월에 닳은 모습도, 문 사이가 벌어져 잘 닫히지 않는 서랍도, 곧 풀릴 것 같은 느슨한 손잡이도. 문득문득 크고 작은 흠들이 보일 때마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그가 가진 오래된 나무 냄새를 맡았다. 그렇게 닳은 그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어릴 적 나였다면, 휘적휘적 앞장서 저만치 걸어가는 뒷모습에서 빼기 10점, 나란히 걸을 줄 모르는 모자란 배려심에 30점, 숟가락을 밉게쥐는 모습에서 20점 (엄마가 싫어할테니), 내 가장 친한친구와의 첫 인사를 하찮게 여기는 모습에서 50점, 거친 말투에서 30점, 저 통화하고 싶을 땐 꼭 받아야하는 이기심에 40점, 부재중일때 열내는 미성숙함에 10점, 어린아이같이 불안정한 모습에 50점, 아직 나를 다 알아보지도 않고 결혼을 입에 올리는 모습에서 30점, 만났던 여자를, 화려했던 과거를 겸손한 명예의 훈장 수여자가 되어서 내게 슬쩍 보여줄 때 80점. 잠깐, 총 점이 얼마더라. 아 모자란다)
빈틈이 있는, 어딘가 일 이 프로 어설픈 그가 사랑스러웠고 예전 누군가처럼 너무 능숙하지 않은 것도 좋았다. (내가 아는 한 오버스러운 메너남은 빛좋은 개살구다) 그의 크고 작은 흠들이 만든 독특함을 사랑했다. 그가 가진 흠을 내 취향대로 메꾸고 싶지도 않았고 온전히 오래오래 닦아주고 싶었다. 꽤 많은 지인들이 그의 흠에 대해 말하면 난 내 흠을 먼저 상기시켜주고 되려 그의 흠이 얼마나 멋진지, 얼마나 값어치가 있는지 자랑했다. 그가 날 어디다 놓아줄지 어떻게 사용해줄지 내심 기대하고 기다렸는데 그는 인테리어 실력이 영 꽝이더라.
귤 껍질과 함께 시작된 나의 덧셈뺄셈은 그의 마지막 모습에서 한번, 작은 행동들에서 여러번, 첫 인상에서는 아주 오래, 그를 곱씹어 보았고 결국엔 그가 가진 진짜 알맹이를 보고야말았다.
"그는 좋은 남자가 아니다" 내 귀는 잘 알고있는데 용기없는 내 입에겐 생소한 이야기이다. 이제 입까지 거들고나니 맥이 탁 빠진다. 우습지만 정말 이제 누구에게 가야할지 고민이다. 어딜놔도 예쁠 그 "좋다는 놈"들은 어쩌면 이렇게 다 새거에 만지기도 부담스러워서 새거가 취향인 요즘 여인들에게 양보하고 싶다. 아빠는 좋아하는 남자 취향을 좀 바꾸어보라고 갖가지 방법으로 설득하시지만 꼭 맞는 신발은 내가 직접 신어봐야 아는 것 처럼 내 짝은 내가 필연적으로 알아챌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난 여유롭게 이태원 가구거리나 가볼까한다. 그 곳에서 내마음에 쏙 들어 올 엔티크 가구를 찾으려고. (엔티크 흉내를 내는 싸구려는 필히 조심해야한다) 내가 원하는건 흠집 마저 여유로운 분위기가 있는 진짜 엔티크한 멋이 있는 가구다. 그런 가구를 찾는다면 그 가구가 갖고있는 그대로의 멋진 모습을 지켜주고, 세상에 둘도 없는 멋진 가구로 갈고 닦아줄거다. 진짜 사랑은 그런거니까, 온달과 평강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