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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이다

by 삐딱한 나선생

내가 먹는 것으로 몸이 만들어진다.

내가 보고 듣는 것으로 생각이 만들어진다.

나는 결국 내가 보낸 시간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들의 시간


예전, 한 동료교사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

"나도 운전주무관 했으면 좋았을 텐데.

딱 정해진 운전만 하면 되잖아."


친구는 교사로서의 삶이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 같다.

주변에 좀 더 나아 보이는 곳과 비교가 됐을 것이다.

모르는 남이 볼 땐 그렇게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나도 군대를 운전병으로 갔다.

솔직히 그나마 편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폰도 가질 수 있고, 훈련도 빠질 수 있다고.


막상 가보니 쉬운 곳은 없었다.

괜히 쓸데없는 군기는 강하게 잡았다.

차량 정비, 갑작스러운 출동, 사고에 대한 부담도 있었다.

행정반 일은 같이 해야 해서 운전이 없다고 마냥 쉬는 것도 아니었다.


함께 근무하던 운전주무관님도 그랬다.

운행이 없을 땐 거의 시설주무관님이었다.

물건을 나르든, 쓰레기를 정리하든 같이 했다.


회식을 하다가도 너무 늦지 않게 들어갔다.

당연히 업무의 특성상 술은 자제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게 나의 삶이라면 꽤나 괴로웠을 것 같다.


어쩌다 탑승 도우미를 했을 땐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해서 귀찮았다.

그러다 생각해 보니 운전주무관님은 매일 이렇게 해야 한다.

하교버스도 마치면 정상 퇴근보다 30분 이상 늦다.


폭설이 내려도 버스는 웬만하면 운행한다.

복잡한 시내에서도 아이를 내리고 차를 돌리더라.

각이 잘 보이지 않는 좁은 차고에 넣고 빼는 것도 경이롭다.


버스 사진1.jpg


멀리서 볼 땐 알 수가 없다.

그건 나와 상관없는 그들의 시간이니.

오직 가까이에서 보낸 시간이 그들을 달리 보이게 한다.



함께한 시간


올해 전담을 맡으면서 교류하는 사람이 많이 바뀌었다.

우선 같은 전담인 교무부장님과 가장 자주 만난다.

체육관을 함께 쓰는 스포츠강사님이 두 번째.

(남자 셋다 술을 좋아하는 게 크지만..)


담임선생님들과는 크게 마주할 일이 없다.

건물도 나뉘어 있어 굳이 찾아가지 않고서는.

멀리 출퇴근하는 분이 많고 따로 만날 계기가 별로 없다.


오히려 행정사님들하고 자주 본다.

아침, 저녁으로 물을 뜨러는 가야 하니까.

회식도 좋아하셔서 퇴근 후에도 자리를 종종 한다.


요즘은 내가 교사라는 인식도 흐릿하다.

그냥 교무실에 소속된 한 명의 직원 같다.

주변의 사람이 바뀌니 나란 존재도 바뀐다.


아내도 작년에 교무를 맡으며 변화가 컸다.

급식도 학생이 아니라 교장, 교감선생님과 먹었다.

교무실 회식뿐만 아니라 행정실 회식에도 불려 다녔다.


담임교사와는 "교무부장님~" 하면서 거리가 생겼다.

반면 행정사님과는 개인적인 깊은 얘기도 나눴다.

교감선생님께서 챙겨주시는 전화도 자주 받더라.


어쩌면 아내에겐 쉽지 않은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교사는 원하든 원치 않든 매년 새로 시작한다.

학년도 업무도 그와 관련한 모든 관계를 포함하는 것이다.


반에 도움반 학생이 있어서 특수교사와 더 자주 보게 될 수도 있다.

교실이 붙어 있었건 퇴근 길이 같았건 별것 아닌 이유도 좋다.

함께 하는 시간이란 흔치 않게 찾아오는 기회인지 모른다.



쌓아온 시간


내겐 수년간 만남을 지속하는 행정사 친구가 있다.

배려심이 많고 유쾌해서 봐도 봐도 좋다.

그는 같이 근무할 때도 훌륭했다.


과학 실험에 필요한 물품을 옆 학교에 빌려서라도 구해줬다.

웬만한 보고 공문은 자료만 확인하고 알아서 처리했다.

나이만 같다고 친구가 되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걸 염려하는 선생님도 있었다.

"친하게 지내는 건 좋지만 이것저것 다 얘기하진 마.

교사들끼리 한 얘기가 교무실, 행정실에 전해질 수 있으니까."


처음엔 내가 말실수라도 했나 싶었다.

괜한 오해나 분쟁을 많이 보셨는지도 모른다.

지내고 보니 다른 직종과는 거리를 두려는 분 같았다.


'교사들은 하지도 않고 행정사한테만 시켜!'

'저 주무관님은 왜 그렇게 말을 딱딱하게 하지?'

일의 구분은 집단의 경계가 되어 때론 편이 나누어지는 것도 같다.


"교사가 메인이고 내가 서포트하는 거지.

그런데 가끔은 시키는 것만 하는 게 허무할 때도 있어."

친구는 자신의 업무의 특성을 알지만 한계도 느끼고 있었다.

또 그런 속에 있는 이야기는 가까이 지내왔기에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학교의 구성원은 내가 선택할 수 없다.

그래도 저녁에 만날 사람, 내 삶에 오래 둘 사람은 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인연으로 내가 살아보지 못한 다른 삶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가진 생각이 만나는 사람을 정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또 나의 생각을 바꿔간다.

나는 결국 내가 만나는 사람과 쌓아온 시간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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